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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화제작4 <25시> [4]
최수임 2003-02-21

뉴욕을 배반한 모든 것에 Fuck!스파이크 리의 <25시>

“스파이크 리가 <25시>라는 그의 최고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 2월13일치) 스파이크 리의 <25시>가 선보인 다음날, 독일언론들은 13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시종일관 파워풀한 에너지를 뿜어낸 리의 최신작에 대해 이같은 찬사를 보냈다.

스파이크 리의 <25시>는 마약거래가 적발돼 내일 아침에는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뉴욕의 백인 남성 ‘몬티’(에드워드 노튼)의 자유로운 마지막 하루를 한편의 긴 랩송처럼 읊은 작품으로, 9·11 사건 이후 뉴욕에서 촬영되었다. 주인공 몬티는 매우 쿨한 방식으로 마지막 자유 시간을 보낸다. 우선 바를 경영하는 아버지를 만난 뒤 옛 친구들과 함께 클럽의 파티에 가며, 키우던 개를 그 친구 중 한명에게 부탁한 뒤 다른 한 친구에게는 ‘제정신으로 갈 수 없다’며 마지막으로 자신을 때려줄 것을 부탁한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여자친구가 있는 자신의 고급아파트에 돌아온 그는 “면회를 가려면 가는 길을 알아둬야 하지 않겠냐”며 그를 배웅하러 온 아버지의 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25시’에 대한 상상에 빠져든다. ‘계속 이 길을 가서, 어느 소도시에 들어가 일손을 구하는 작은 바에 취직해,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다가 몇년 뒤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쓰면, 그녀가 찾아와 아이를 낳고 함께 살다가 아이들이 장성하면 진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하지만 그는 계속 피를 흘리며 감옥으로 가는 차 안에 앉아 있을 뿐이다.

상당히 감성적 울림이 강한 영화지만, 스파이크 리는 이 영화에서도 특유의 직설적인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이 도시의 모든 것에 퍽큐, 나는 사랑했는데 나를 배반해버린(처음에 그는 여자친구가 자신을 신고했다고 생각한다) 나츄렐레에게 퍽큐, 자신의 바에서 영원히 끝없는 고민에 휩싸여 사는 아버지에게 퍽큐, 미국에 산 지 10년이 되도록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퍽큐(스파이크 리는 이 영화에서도 예의 한국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그들이 파는 싱싱한 과일과 꽃들에게 퍽큐, 러시아인, 유대인, 동성애자, 히스패닉, 이탈리아인들에게 퍽큐, 오사마 빈 라덴에게도 퍽큐, 이 도시의 모든 것에 퍽큐.” 감옥행이 결정된 뒤 아버지를 찾아간 바의 화장실 거울을 보며 몬티가 내지르는 내면의 (랩 형식의) 이 독백은 영화에서 가장 격렬한 대목이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에드워드 노튼

“내가 몬티의 상황에 놓인다면? 글쎄 정말 모르겠군요.” 스파이크 리만이 그의 최고작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에드워드 노튼은 <25시>에서 경이로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는 에드워드 노튼의 영화이기도 하다.

스파이크 리

“런던도 아니고, 보스턴도 아니고, 왜 뉴욕이냐”라는 질문에 스파이크 리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글쎄, 뉴요커로서 나는 지금 현재 뉴욕의 모습을 찍어야만 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뉴욕 내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많이 드러나 있는데, 당신도 거슬러올라가면 이민자의 후손 아닌가?” “미국적인 것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가치로 완전히 돌아간 것 아닌가, 당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됐는가?” “9·11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닌가?” 등 기자회견에서는 다양한 공격적인 질문이 스파이크 리에게 쏟아졌다. 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진 자리의 2002년 모습과 그래도 여전히 조깅을 하고 개와 함께 산보하고 클럽에서 다프트 펑크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뉴욕 사람들의 모습, 그것들은 분명히 <25시>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에는 감독부터 쉽게 답하지 못했다. 과연 리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정치적 입장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다만, 현재 뉴욕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는 그의 태도에서, 스파이크 리가 ‘뉴요커’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몬티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그려낸 이야기가 일반적인 의미의 휴머니즘을 인상적으로 달성하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 영화의 시각적, 음악적 스타일은 그의 어느 영화보다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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