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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1]
최수임 2003-02-21

참을 수 없는 `현재`의 무거움<어댑테이션>에서 <25시>까지, 베를린을 달군 화제작들

“부시의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실례합니다. 저기 비어 있는 자리인가요?”

2003년 베를린영화제에서는 미국영화 기자회견장에서라면 거의 빠지지 않았던 ‘전쟁’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과 영화시작 훨씬 전부터 극장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빈자리’를 찾는 질문, 이 두 가지가 쉴새없이 반복되었다.

4천명이라는 유례없이 많은 취재진이 몰려든 올해 베를린영화제는 영화를 보는 것에서 기자회견장의 의자를 차지하는 것, 프레스센터의 컴퓨터 하나를 차지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극심한 선착순의 경쟁이었다. 극장 안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일찍 채워져갔고, 기자회견장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오는 이들도 늘어갔다. 영화는 초반 30분에 거의 판가름이 났고 극장 앞 계단에는 노트북을 안고 바닥에서 기사를 쓰는 기자들로 붐비었다(꼭 그런 몸싸움과 속도의 경쟁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영화제 중에 유니프랑스 대표 다니엘 토스캉 드 플랑티에가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그 입술 마르는 속도의 싸움에서 살아남아 어딘가 자리를 차지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혹은 기자회견에 참가하면, 그 안에는 ‘전쟁 대 평화’라는 테마와 세계 주변부 ‘이주민’들의 현실이 가장 큰 이슈로 눈앞에 펼쳐졌다. 경쟁작으로서는 첫선을 보인 마이클 윈터보텀의 <이 세상에서>는 그 두 테마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성향을 대표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독일 감독 한스 크리스티안 슈미트의 <불빛>과 이탈리아 감독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난 두렵지 않아>, 그리고 또 다른 독일 감독인 볼프강 베커의 <굿바이, 레닌!> 역시 주변부를 바라보는 진정어린 시선을 드러내며 눈길을 모았다.

니콜 키드먼 (<디 아워스>):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한 니콜 키드먼. 독특한 디자인의 붉은 옷을 입고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낸 키드먼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최고의 스타였다. “분장 때문에 못 알아볼 뻔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화답하던 키드먼은, “버지니아 울프를 원래 좋아했냐?”는 질문에, “아니다. 학교에서 울프를 배울 때 나는 그게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하면서 버지니아 울프를 제대로 알 기회를 얻었다”고 솔직한 답을 들려주었다. 주드 로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능숙한 솜씨로 대처하기도.

조지 클루니 (<위험한 마음의 고백> <솔라리스>): 니콜 키드먼이 2003년 베를린 영화제의 히로인이었다면, 조지 클루니는 남자배우 중 가장 인기를 끈 스타였다. 배우로 출연한 <솔라리스>와 자신의 감독데뷔작인 <위험한 마음의 고백> 두 편이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조지 클루니는, 밤 10시가 넘어 일반 관객을 위해 열렸던 레드카펫 입장에서 베를린 소녀들의 사인공세에 휩싸이기도 했다. 영화제에서 <솔라리스>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위험한 마음의 고백>은 ‘성공적인 감독 데뷔’라는 평을 들었는데, 클루니가 어느 쪽에 더 마음을 두고 있는지는 그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감독으로서 불리기 시작하는 데 상당한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첫 연출작의 소재로 미국의 유명 TV 쇼 프로듀서이자 CIA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던 실존인물 척 배리스를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TV 프로듀서로 일했다”며 배경을 밝혔다.

반면 스파이크 리의 가 9·11 이후 미국, 특히 뉴욕 시민의 불안을 내비치는 것을 제외하면, <어댑테이션> <데이빗 게일의 생애> <솔라리스> 등 미국영화들은 정치적 색채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파이크 존즈의 <어댑테이션>과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는, ‘메시지’를 추구하는 다른 영화들 사이에서 오히려 바로 그런 점, 재기발랄한 서사의 실험성으로 존재를 내세우는 작품들이었다.

무거운 주제인 ‘죽음과 질병’도 빈번히 등장하는 테마였다. 캐나다와 스페인 합작영화인 이자벨 코아제의 <나 없는 나의 삶>은 젊은 ‘어머니’가 죽음을 선고받은 뒤 남은 두달을 사는 이야기. 파트리스 셰로의 <그의 형제>는 난치병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그의 동생과의 관계에 집중해 그려냈으며, 스파이크 리의 역시 7년간의 복역이라는 사회적인 ‘유사 죽음’을 하루 앞둔 주인공의 마지막 밤과 아침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을 저울에 달아 잴 수 있다면, 올해 베를린영화제는 무거움이 우세였다고 할 만하다. <어댑테이션>과 <디 아워스>에 반하다가도 <이 세상에서>나 <난 두렵지 않아> <불빛> 의 무게에 더 마음이 기우는 게 베를린의 평균심리였다고나 할까. 막이 내린 뒤 관객의 기억 속에서 영화들에 처음 주어졌던 별점은 자꾸 달라질 것이지만 말이다. 2월10일부터 14일까지 열렸던 2003년 베를린영화제의 경쟁부문 화제작들을 경향별로 묶어 소개한다.베를린=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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