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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윤여정 스토리 [3]

“윤여정 쟤는 목소리 때문에 안 돼, 그랬대요.”

잠자리에 누운 성우에게 영희가 말한다.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길가다 교통사고처럼 아무랑 부딪칠 수 있는 게 사랑이야. 사고나는 데 유부남이, 할아버지가, 홀아비가 무슨 상관이 돼. 나면 나인 거지.”(<거짓말>)

경에게 유순이 울먹이며 말한다. “우리 복수 울렸다간… 너 절단 나. 나한테… 나 땜에… 울 만큼 운 애야… 나는 걔 울렸지만 남이 울리는 건 못 봐….” (<네 멋대로 해라>)

윤여정은 드라마 작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배우다. <내가 사는 이유>로 만난 노희경 작가를 비롯해 <네 멋대로 해라>의 인정옥 작가까지 조용하던 그들이 윤여정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 할라치면 갑자기 말이 늘어난다. 그러나 누구보다 윤여정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름 석자는 바로 작가 김수현이다. 데뷔 초 <무지개>를 시작으로 성공적인 복귀작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최근 막을 내린 <내 사랑 누굴까>까지 윤여정과 김수현은 운명적인 짝패처럼 늘 함께 존재했다. “다시 연기하라고 옆구리 찌른 사람도 김수현 선생이었어요. 대뜸 ‘조영남 마누라가 그렇게 대단한 건 줄 아니?’ 그러더라고. 하지만 쟤는 김수현 아니면 안 돼, 라는 누명을 벗으려고 김수현 선생 드라마 할 때면 다른 배우가 하는 것보다 100배쯤은 노력해왔어요. 촬영 있으면 그 전날 밤을 새다시피 해요. 대사 분량도 워낙 많은데다 1쪽부터 130몇쪽까지 머릿속으로 쭉 훑고도 한번에 이게 다 안 꿰어지면 일어나서 대본을 다시 봐요. 게다가 그 사람 브로킹이 정말 복잡하거든요. 그 많은 대사를 하면서 밥을 놓으면서 다리미질하고, 그걸 집에서 실제로 다 해보는 거예요. 예전에 누가 집에 와서 내가 연습하는 걸 보고 ‘윤여정이란 사람, 상당히 열심히 하는 배우구먼. 그런데 노력하는 거에 비하면 정말 빛 안 나네’ 그러더라고. (웃음)”

<네 멋대로 해라>

<저 푸른 초원위에>

윤여정은 <거짓말>에서 가끔은 청승맞고, 가끔은 소녀 같은 귀여운 여인이.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소매치기 아들의 철없는 엄마가 되었다.

“안 보여요, 안 보여, 안경주세요.” 을지로의 한 카바레. 늙은 나이에 “몸이 원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시어머니 병한이 초등학교 동창생과 카바레에서 멋지게 탱고를 추는 <바람난 가족>의 촬영현장. 감독의 컷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안경부터 찾는다. 춤동작이 어색할까봐 모니터 앞으로 달려오는 그는 바로 앞 모니터를 볼 때도, 심지어 가까이 있는 사람도 안경이 없으면 잘 알아보지 못한다. 본인 표현대로 “장애인” 상태로, 눈에 맞지 않아 그 흔한 콘택트렌즈 한번 끼지 않은 채, 30년 긴 시간 동안 연기해온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또 어떠한가. “요즘엔 개성있는 목소리들이 많지만 옛날엔 진짜 해괴한 목소리였죠. 나중에 들었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윤여정 쟤는 목소리 때문에 안 돼, 그랬대요. 그러고보면 난 참 많은 난관을 딛고 일어선 거지. (웃음)” 그러나 윤여정은 배우에게는 2.0의 소머즈 같은 시력이 아니라 바늘 하나 떨어지는 것도 느끼는 민감한 촉수가, 성우 같은 낭랑한 목소리가 아니라 걸걸한 한마디의 대사로도 가슴을 치는 살아 숨쉬는 음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하루는 자고 있는데 한진희씨가 전화를 했어요. ‘여보세요’ 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받았는데, 그러더라고. ‘아! 천상 천하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혹시… 나 못 알아보면 전화줄래요?”

“김기영 감독이 날 보고 늘 알렉 기네스 같은 훌륭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때는 알랭 들롱이 최고였지, 알렉 기네스가 누군지나 알았겠어요. 난 그 사람이 영화에 나오면 누군지 잘 몰라봐요. 한참을 찾다가 후반부쯤에 아, 저 사람이 알렉 기네스구나 그런다니까. <콰이강의 다리>도 그렇고 <닥터 지바고> 때도 그랬고. 그런데 마흔살쯤엔가 <인도로 가는 길>을 보는데 어쩜 어쩜, 끝까지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봤어요. 까만 분장을 하고 나오니 알아볼 수가 있나. 그때 깨달았죠. 아, 김기영 감독이 원하는 배우가 저런 배우였구나. 그 인물이 되어버리는 그런 배우가 되라는 말씀이셨구나.”

“이제, 김기영 감독이 원하는 배우가 되어가고 계신 것 같으세요?”

“글쎄요. 많이 바라고 원하면 가까워진다고 하잖아요. 앞으로 더 애써볼게요. 혹시… 나 못 알아보면 전화줄래요?”

1966년에 데뷔해 2003년까지 37년. 한때를 풍미했던 여배우들이 흑백사진 속의 우아한 자태로 박제되어 추앙받는 동안, 그는 70년대 마포선술집 작부가 되어, 남편의 외도를 알고 무너진 가슴을 쓸어내리는 부인이 되어, 소매치기 아들의 철없는 엄마가 되어, 첫사랑과 바람난 행복한 시어머니가 되어 우리 곁에서 늙어가고 있다.

부디, 그를 몰라보는 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그리고 궁금한 마음에 정신없이 전화기 버튼을 누르게 되기를.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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