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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윤여정 스토리 [2]

“미스 윤, 청승맞아서 캐스팅했지”

아랫입술을 윗니로 지그시 깨어물며 “까르르르” 천진한 웃음을 보이던 명자. 그 시골처녀가

어느 작곡가집의 가정부로 들어가 임신을 하고 낙태를 당하며 점점 미쳐 집안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가정비극, 김기영 감독의 71년작 <화녀>는 윤여정의 심장에 배우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홍글씨를 새겨넣었다.

“당시에 한 드라마에서 오빠로 나왔던 최무룡 선생의 권유로 고영남 감독의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김기영 감독이 그 제작비를 다 물어주시고 <화녀> 촬영장으로 나를 끌어오셨다니까. 마의 손길이야. 마의 손길. (웃음)” 고약하고 무서운 인상에 말도 별로 없는 이 이상한 감독이 계약서에 쓴 계약조건도 얼마나 변태 같았는지. ‘촬영 들어가기 2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감독과 만날 것!’ “얼마나 만나기 싫었겠수. 감독님 만나는 시간이면 친구들을 불러냈어요. 우연히 온 것처럼 방해놓으라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다 아셨더라고. (웃음) 그 몇달 동안 만나면서 자기 작품 하나하나를 쭉 보여주고, 참 그때 영화공부도 많이 했어요. 사실 공부인지도 몰랐죠. 이놈의 영화 언제 끝나나. 시계만 봤지. (웃음)”

촬영들어가서도 김 감독은 윤여정을 “내 말을 알아들은 유일한 배우”라며 특별히 아꼈다. “촬영장에서 아무하고도 말을 잘 안 해요. 남궁원씨랑 전계현씨와도 말을 잘 안 했어요. 사실은 내가 눈이 나쁘니까 늘 가까이서 보시면서 디렉팅을 하신 건데 둘이 연애하나, 막 뒷말을 하고 했다우. 감독도 변태고 주인공 애도 변태고 하면서….” 김기영 감독은 현장에서 늘 윤여정 자신도 생각 못했던 표정이나 행동들을 끄집어내곤 했다. “‘그때 미스 윤하고 나하고 만났을 때 내가 무슨 이야기 했을 때 어떻게 웃었었죠? 손을 어떻게 했었죠? 그때처럼 하세요.’ 그러는 거야. 그때 알았죠. 영화 들어가기 전에 나를 왜 만났는지. 그 사람 내 생활의 디테일한 걸 다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화녀>

<충녀>

시골처녀가 어느 작곡가집의 가정부로 들어가 임신을 하고 낙태를 당하며 점점 미쳐 집안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가정비극. 김기영 감독의 <화녀>는 윤여정의 심장에 배우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주홍글씨를 새겨넣는다.

그렇게 거장의 손을 통해 조금씩 배우로 빚어져가긴 했지만 이제 갓 신인 딱지를 땐 여배우에게, 한 집안을 서서히 파멸로 이끄는 <화녀>의 팜므파탈적 캐릭터는 당연히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지독한 사람이었어요. 원하는 게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계속 고생을 시키니 결국엔 나올 수밖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충녀> <죽어도 좋을 경험>까지 했으니 윤여정의 ‘독기’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겠지만. 15년 뒤 박철수 감독의 <어미>에서 인신매매당한 뒤 자살한 딸의 복수를 위해 서슬을 퍼렇게 세운 윤여정이 마침내 인신매매단의 보스까지 죽인 다음 무표정한 얼굴로 경찰 오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한대 빼어무는 인상적인 라스트신 역시 이런 트레이닝의 과정이 낳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번은 김 감독님에게, 그때 왜 나를 캐스팅하셨어요?, 라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청승맞아서’라고 대답하시더라구요. 사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발랄의 상징이었거든요. 그래서 참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야, 내가 청승맞긴 어디가 청승맞아 했는데 늙으면서 보니까, 내가 청승맞은 구석이 있더라구요. 그러고보면 김기영 감독, 날 참 잘 아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배우는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

“그때는 누가 장희빈에 어울리나 하고 시청자들이 뽑았어요.” 시청자들에 의해 선발된 71년 MBC의 <장희빈>을 시작으로 <대원군과 민비> <박마리아> 같은 굵짉굵직한 역사물의 주인공을 도맡아하던 윤여정은 김수현 작가의 TV데뷔작 <무지개>를 시작으로 김수현과의 끈질긴 인연의 첫 매듭을 묶었다. 그리고 김수현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새엄마>에서 은혜라는 맏딸 역할을 맡아 청춘스타로 인기몰이를 하려던 즈음, 그는 돌연 결혼을 결심했다.

“연기는 그게 다였어요. 잘했는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결혼을 했고 72년 말부터 84년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아줌마처럼 청소하고 애 키우면서 살게 된 거죠. 삼십몇년 연기했다고 해도 그 시간들을 제하면 정말 짧게 연기를 한 거죠.”

그러나 13년간의 길다면 긴 미국생활 동안 그의 몸은 연기를 잊었겠지만, 그의 눈과 머리는 끊임없이 연기를 보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사나 상황에 과장이 많았던 한국형 드라마에 비해 그가 밥을 지으며 빨래를 하며 보았던 미국 드라마는 생활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미국생활을 끝내고 윤여정이 보여준 연기를 낯설어 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그가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활적인 연기를 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막상 한국에 들어오긴 했는데 배우를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더라고. 너무 오래 떠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예기치 않게 가정파탄을 맞으면서 내가 가장이 되어야 했어요. 근데 이제 밥 벌어먹으려고 목숨 걸고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내가 연기를 참 못한다는 걸 알겠더라고. 못하겠는 거야. 안 돼.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걸 알겠는데 이렇게밖에 안 되는 거야. 너무너무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더욱이 공식적으로 이혼발표가 나자 그를 캐스팅하겠다고 하는 감독들은 현저히 줄었고 그나마 들어오는 대본은 죄다 ‘미국 갔다온 여자.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 같은 캐릭터였다. “배우라는 게 참 수동적인 직업이에요. 아무리 그런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어해도 누가 써주지 않으면 못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분례기> <관촌수필> 같은 드라마가 내 손까지 온 건 행운 이었구요.”

SBS 창사 초기 이종한 PD는 윤여정에게 <분례기>를 함께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고 그는 제발로 찾아온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투리를 배우기 위해 충청도 내려가서 열심히 듣는 것도 모자라 대본 아래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사투리 발음을 일일이 토씨달듯 적어내려가며 지독하게 연기에 집중했다. “왜 우리집은 충청도나 전라도가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 했다우.” 도도하게 치켜들었던 턱을 거친 땅으로 내리고, 쏘아붙였던 눈빛을 수줍게 감춘 그는 더이상 ‘미국 갔다온 도시여자’가 아니라 가난하게 태어나 비극으로 치닫는 시골처녀 ‘똥례’가 되어 있었다. “그때가 되니 사람들이 너 연기 잘한다고 합디다. 그런데 그런 칭찬 듣기 위해서 한 연기가 아니었어요.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 걸고 한 거였어요. 요즘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어. 배우는 목숨 걸고 안 하면 안 돼. 훌륭한 남편두고 천천히 놀면서 그래 이 역할은 내가 해주지, 그러면 안 된다고. 배우가 편하면 보는 사람은 기분 나쁜 연기가 된다고, 한신 한신 떨림이 없는 연기는 죽어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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