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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저 목소리! 윤여정 스토리 [1]

16년만에 <바람난 가족>으로 스크린 복귀하는 그녀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이유

고 김기영 감독의 미개봉 유작인 <죽어도 좋을 경험>(1988)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났던 윤여정이 16년 만에 돌아왔다.

남은 인생을 육체와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기로 작정한 <바람난 가족>의 속시원한 시어머니가 되어.

허스키하면서 높은 음성,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독설, 알맞게 계량된 감정의 부피와 무게. 긴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무뎌지지 않은 채 더욱 날카롭고 깔깔한 표면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는 그는, 또래 배우들 앞에 놓여진 모성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어머니’란 대명사에 묶여지지 않은 채, 윤·여·정·이라는 이름 석자를 대중의 머리 깊숙이 박아넣었다.

<화녀> <충녀>의 팜므파탈로 시작해 진정한 팜므파탈로 돌아온 이 배우의, 이 여인의, 아니 이 인간의 인생유전 위에, 자신의 드라마 속에 그를 불러오는 영광을 누렸던 노희경, 인정옥 작가 두 사람의 윤여정에 대한 헌사를 보탠다. - 편집자

1984년, 윤여정은 김포국제공항 플랫폼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13년 미국생활의 막바지, 영원할 거라 믿었던 사랑의 균열을 감지하고 다시 한국땅에 발을 디딘 이 여자. 그에게 남은 거라곤, 40kg이 조금 넘는 여린 몸뚱이와, 줄이은 담배로 새된 목소리, 더이상 발랄이란 수식어가 부담스러운 서른여덟의 얼굴, 그리고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두명의 아이들뿐이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나. 나 이제 늙고 못생겨졌는데. 돌아갈 비행기는 떠났다. 도망칠 곳도 없다. 이제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연기밖에 없었다.

“TV에 이상한 아이가 있다”

2003년, 오늘도 TV를 켜면 윤여정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일연속극에서 내뱉는 특유의 칼가는 목소리는 멀리서 들어도 ‘윤여정이군…’

할 만큼 독특하게 차별화된 것이다. <화녀>에서 독기와 광기로 뒤범벅된 명자를 연기했던 ‘발칙한 아이’는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그리고 13년 만에 이혼을 했고 다시 드라마로 돌아왔다. 이후 <사랑과 야망>류의 주말극에서 멋지게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도시적인 여자로, <사랑이 뭐길래> 같은 홈드라마에서는 쉼없이 말을 쏟아내는 깐깐한 아줌마로, <거짓말> 같은 미니시리즈에서는 가끔은 청승맞고, 가끔은 소녀 같은 귀여운 여인으로, 그렇게 그는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었다. 어떤 이에게 윤여정은 여전히 <네 멋대로 해라>의 ‘복수엄마’이겠지만, 그는 이미 임상수 감독의 새 영화 <바람난 가족>의 현장으로 날아와 속옷만 걸친 채 남자친구에게 샴페인 잔을 권한다. 센티멘털한 향수를 허용하지 않는 채, 그때 윤여정이 이랬었는데…, 회상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이 부산한 배우인생의 시작은 다 ‘대학’ 때문이었다. “고2, 고3 때 위궤양 때문에 안 가본 병원이 없을 정도로 무지 아팠거든요. 수업일수는 모자라는데, 낙제시키면 시집가는 데 지장이 있을 거라고 낙제는 안 시켰어요. 그때만 해도 이화여고 나와서 어느 대학 가면 반에서 몇등했는지 다 알 정도였는데, 그 상황에서 갈 수 있는 대학은 뻔하고, 사람들이 그걸 아는 게 왜 그렇게 죽고 싶고 부끄러웠는지. 그래서 일단 높은 데를 지원해서 치고 떨어지자고 마음먹었죠. 우리 엄마는 지금까지도 내가 자기 때문에 연기를 시작했는지 모를 거예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나는 스타였어요. 공부 잘하는 애,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나가면 일등하는 애, 결국 엄마에게 대학 대신 뭔가 대단한 걸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 막 탤런트라는 신직종이 나왔죠. 당시만 해도 영화배우하고 다르게 탤런트는 이순재 선생같이 서울대학 나온 똑똑한 사람이 하는 거라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동그란 콧망울에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작은 샘물처럼 피고, 귀엽고 애교 있는 작은 몸집의 이 여고생을 처음 알아본 건, 사실 옆집 아저씨, 김재형 PD (<용의 눈물>)였다. “김재형 아저씨가 동생하고 나를 당시 TBC에서 하던 <어린이 열차>라는 프로그램에 견학을 시켰는데, 그때 잘 보였는지 김동건 아나운서 옆에서 선물주는 MC보조를 하게 됐어요. 그곳 사람들이 얼마 뒤 탤런트 시험이 있다며 한번 응시해보라고 했고 그래서 시험을 보게 된 거죠.”

결국 TBC 탤런트 공채 3기로 뽑히긴 했지만 탤런트란 직업은 이 어린 아가씨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꽤 지루한 것이었다.

윤 여 정 프 로 필

1947년 6월19일생

1966년 TBC 탤런트 3기

1971년 <화녀>

1972년 <충녀>

1985년 <어미>

1988년 <죽어도 좋은 경험>

2003년 <바람난 가족>

TV 주요작

<저 푸른 초원 위에> <네 멋대로 해라> <꼭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거짓말> <내가 사는 이유> <목욕탕집 남자들> <작별> <분례기> <엄마의 방> <사랑이 뭐길래> <사랑과 야망>

상궁 1, 2, 나인 A, B에서 머무르는 시시한 역할은 고사하고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늘 야단만 맞는 신인의 시간들이 왜 고달프지 않았으랴. “대학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그만두는 것도 별 미련이 없었어요. 그렇게 학교를 다니면서 1, 2년 놀다가 우연히 8·15특집극을 하게 되면서 다시 연기를 시작했죠. MBC 개국하면서 스카우트되어 간 거고.”

슬슬 배우로서 운이 튼 건 <수사반장>의 ‘백바지클럽’편에서 여자깡패 두목으로 나가면서였다. “어릴 때 내성적이고 얌전해서 아무도 내가 배우가 될지 몰랐대요. 그런데 원래 세상 다 아는 양아치가 공주역할 하면 잘하잖아. 그건 걔가 양아치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공주를 그렸기 때문일 거예요. 아마 내가 얌전하고 내성적인 아이여서 여자깡패 같은 연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그가 윤여정이라는 이름의 탤런트로 불리게 되었을 때는 “말 잘 듣는 얌전한 소녀”는 더이상 없었다. 대신 그는 ‘이상한 아이’, ‘획기적인 아이’로 불렸고, 당시 이낙훈 선생은 “TV에 이상한 아이가 있다”며 영화배우들을 데리고 방송사에 구경시키러 올 정도였다. 그렇게 윤형주며 송창식 등 대학 나온 연예인들이 ‘새로운 물결’을 이루었던 70년대 초, 이 발랄한 젊은 아가씨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은 고 김기영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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