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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무간도> [9]

옛날, 홍콩누아르를 보러갔다

----------<영웅본색>을 처음 본 것은, 동네 3류 극장이 아니라 불법 비디오였다. 아직 극장에서 개봉하기 전이었고, 습관처럼 빌린 비디오의 하나였다. 이소룡과 성룡, 미스터 부 등 홍콩영화가 나올 때마다 즐겨 봤지만 총으로 싸우는 액션영화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주윤발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고, 오우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은 기존의 어떤 홍콩영화와도 달랐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한국의 ‘컬트영화’는 홍콩 누아르에서 시작했다는 평가대로, <영웅본색>은 3류 극장에서 재발견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주윤발의 검은 코트와 질겅질겅 성냥개비를 씹고 다니는 사람이 도처에서 목격되었다. 나 역시 기억한다. 대학 주변의 재개봉관에서 <영웅본색>을 다시 보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조그만 소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은 누구나 소마에게 공감했다. 아니 여성이라면 장국영에게 공감했을까?

----------홍콩누아르는 국내에서 붙인 신조어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홍콩에서 만들어진 비장한 액션영화들에 ‘필름누아르’라는 헌사를 붙이면서, 홍콩누아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꽤 적합한 표현이었다. 학문적으로 냉정하게 검토된 것은 아니지만, ‘홍콩누아르’란 말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워낙 코미디를 좋아하는 중국인의 성향답게, 코미디를 버무린 작품들도 등장하긴 했지만 홍콩누아르의 본령은 역시 ‘비장미’다.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는 영웅의 초상을, 극단적인 정서와 액션으로 그려낸 홍콩누아르는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홍콩누아르의 시조인 <영웅본색>은 서극과 오우삼의 합작품이다. 서극은 제작을, 오우삼은 감독을 맡았다. <영웅본색> <천녀유혼> <동방불패> <황비홍> 등 시대의 맥을 짚어내며 고비마다 홍콩영화의 트렌드를 창조해낸 서극과 무협지의 세계에서 타임 슬립한 듯한 고전적인 영웅들이 벌이는 우아한 총격전을 그려낸 오우삼, 두 사람의 조합이 아니었다면 홍콩누아르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극이 <영웅본색>을 기획한 것은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이미 출생지인 베트남에서 홍콩으로 도망친 기억이 있었던 서극에게, 홍콩 반환은 현실적인 두려움이었다. 서극은 그 불안감과 그들이 결코 놓칠 수 없는 전통적인 가치를 비극적인 영웅들에게 투사했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은 후배인 이자웅에게 말한다. 머리에 총을 대본 적이 있냐고.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상대에게 덜덜 떨면서 굴복했던 비참한 경험. 그 경험을 두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지만 그는 배신한 후배 이자웅의 밑에서 굴욕을 견디며 살아간다. 단 하나, 친구가 돌아온 뒤 함께 복수할 것을 꿈꾸면서. 비틀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던 굴욕을 견디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한다. 찬란한 죽음의 대가로.

----------홍콩누아르는 홍콩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에서도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서구에서도 오우삼과 서극을 비롯하여 임영동과 황지강 등의 영화가 찬사를 받았고 이들은 고스란히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오우삼은 홈런, 황지강은 범타, 서극과 임영동은 삼진 아웃. 세계에서 인정받은 홍콩누아르는 걸작을 양산했고 장르 자체의 매력도 탁월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홍콩누아르가 받아들여진 방식은 조금 달랐다. 당시 대학생을 중심으로 홍콩누아르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소마의 처절한 싸움에 열광했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절대악에 맞서 싸우는 비극적인 영웅. 80년대 말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우던 학생운동권의 많은 수가 홍콩누아르의 영웅에 주목했다. 그들은 홍콩누아르의 영웅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그것은 60년대 일본의 전공투 대학생들이 스스로를 ‘내일의 죠’라고 불렀던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도쿄대의 야스다 강당에 적혀 있던 낙서 중에는 ‘우리는 내일의 죠다’,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 꿇지 않는다’ 등의 인상적인 문구가 남아 있었다. 치바 데쓰야의 <내일의 죠>는 빈민가의 민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불굴의 파이터였다. 아무리 두들겨맞아도 결코 쓰러지지 않고 상대를 눕히고야 마는, 닫힌 세상과 철저하게 싸우며 불꽃처럼 화려하게 죽어간 영웅이었다. 아무리 현실의 패배가 눈에 보여도, 그들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죠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봉헌했다. 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 역시 그랬다. 군사독재와 싸우면서, 결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소마처럼 지금의 굴욕을 견딜지라도, 결코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복수를 다짐하면서, 그들의 화려한 죽음을 지켜보고 열광한 것이다. 옳건 그르건 그것이 80년대의 시대정신이었다. 그 시대정신이 홍콩누아르를 열렬하게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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