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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8 마일> [6]

----------배틀은 사실상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8마일>은 배틀이 이처럼 힙합의 기원을 암시하도록 해주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 ‘대결적’ 요소만을 상업적으로 지나치게 견인해내고 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삶은 대결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맞다. 삶은 대결이다. 8마일 저쪽이든 이쪽이든 미국사회는 정글이다. 힙합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다. 대신 이 정글에서의 삶의 법칙에 대해 발설한다. 하드코어 힙합신을 호령하는 수많은 하드코어 래퍼들의 혀가 수많은 자기 이야기들을 들려주지만, 그 기본적인 발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세상은 정글’이라는 개념이다. 힙합의 내용은 늘 ‘8마일’ 저쪽과 이쪽을 가르지만 정작 힙합의 주제는 ‘8마일 저쪽과 이쪽’에서 함께 통용되는 삶의 법칙들이다. 그것이 힙합의 재미난 점이다. 힙합에서는 사실상 주류와 비주류가 없다. 세상을 정글로 파악하는 순간 ‘여기/저기’는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 먹고 먹히는 순환 구조가 있을 뿐이다. 하드코어 힙합에 관한 가장 큰 오해의 하나가 마치 래퍼들의 이야기를 게토에서 내보내는 정의의 메시지처럼 생각하는 점이다. 물론 힙합계에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던 그룹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퍼블릭 에너미이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의식화된 힙합을 구사한다. 현실이 변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메시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벌써 옛날 일이다. 로드니 킹 사건에서 폭발한 ‘LA 폭동’ 이후의 힙합은 그러한 정치적인 지향점이 없다. 단지 누가 더 하드코어한 삶을 살았느냐가 이야깃거리일 뿐이다. 하드코어 힙합의 자연주의는 실상 게토의 보고서라기보다는 미국사회 전체의 보고서이다. 영화 <8마일>이 약간 오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점이 그것이다. 삶이 대결이다? 맞다. 대결이니 분명 나와 적이 구분된다. 딱 둘로 갈린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알려주는 것은 적도 없고 나도 없고 단지 대결만이 있다는 점.

삶은 대결이다, 그래서?

----------다시 말해 정글의 문법이다. 힙합은 동시에 게토에 사는 흑인들의 소수집단적 삶의 양식이기도 하고 동시에 광범위하게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보고서이기도 하다. 힙합은 철저하게 비주류적인 삶의 생동감을 포착되고 그것을 나누는 양식이지만 동시에 주류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기도 한 것이다. 힙합은 미국의 주류 음악시장을 평정한 지금도 게토에서는 여전히 소박한 삶의 양식으로 조금도 변함없이 기능한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힙합의 진수를 알 수 있다. 힙합스럽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 역설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삶의 양식에는 궁극적으로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생존’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생존’은 선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힙합이 이야기하는 그 ‘대결로서의 삶’ 자체에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힙합의 ‘대결’과 ‘정의/불의’식의 이분법을 나란히 놓는 것은 적어도 하드코어 힙합과는 무관한 일이다. 이 점은 흑인들도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작 하드코어 힙합의 내용은 미국사회의 주류에서 판치는 놈들의 삶의 양식과도 일치한다. 힙합처럼 아이러니한 장르가 또 어디 있을꼬! 힙합은 총이다. 대신 흑인들이 쥔 총이다. 그것은 백인 경찰이 쥔 총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총이긴 총이다. 미국사회의 어디에서든 총이 사용가능한 수단이듯 ‘정글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힙합 역시 미국사회의 어디에서든 사용가능한 총이다.

----------8마일 이쪽/저쪽도 아니고 그 경계 자체와는 너무 먼 변방에서 사는 ‘나’ 같은 사람은 그 총 자체가 없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그까짓 ‘8마일’이라는 경계선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친다. 에미넴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그는 영화 속에서는 그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불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여전히 건전한 미국 시민의 한 사람일 뿐이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는 관심없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8마일 저쪽 사람들이나 이쪽 사람들 그 어느 쪽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아니다. 우리가 그리는 삶은 그 정글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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