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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8 마일> [5]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하다. 간과하고 있는 것들도 있고 구조도 조금 덜 힙합적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할리우드영화다.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 아마도 에미넴 자신은 이런 말을 싫어하겠지만, 영화 속의 그는 힙합 카우보이이다. 카우보이는 법도 질서도 없는 서부의 척박한 땅에서 자기 자신을 지킨다. 외롭게 투쟁하는 그는 결국 악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정의의 씨앗을 심는다. 에미넴 역시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는 게토의 정글에서 외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간다. 여자친구는 힙합 제작자와 놀아나고 엄마는 아들의 동창놈과 놀아나며 여기저기 폭력이 난무하지만 주인공은 그 모든 손쉬운 유혹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우정을, 힙합의 기본 정신을 지킨다. 그래서 그는 역시 정의의 씨앗을 심는다. 이 영화는 힙합 서부영화다. 서부영화의 코드들이 힙합이라는 하위문화 코드의 옷을 입고 있다. 카우보이영화는 늘 정의의 사나이인 카우보이와 ‘악의 축’의 대표자와의 결투에서 끝난다. 카우보이들의 결투는 OK목장에서 벌어지고 힙합 카우보이들의 ‘배틀랩’은 디트로이트 8마일 로드 바깥에 있는 지하의 힙합 클럽에서 벌어진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배틀랩/결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지미는 그는 승리를 자축하러 가자는 친구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간다. 카우보이들은 꼭 이겨놓고 어딘가로 돌아간다. <하이 눈>에서의 보안관 게리 쿠퍼는 그 모든 어려운 대결들을 끝낸 뒤 보안관 딱지를 땅바닥에 팽개친다. 그 뜻은 자신의 승리를 더이상 사리사욕의 발판으로 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주인공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에미넴 역시 자신의 승리를 힙합신에서의 군림으로 이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겼나. 그의 승리는 악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데서 비롯된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그는 힙합 결투의 현장에서의 승리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총총히 어딘가로 사라진다. 에미넴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내 기억으로는 이처럼 힙합 같은 하위문화를 다룬 흑인영화 중에 이렇게 카우보이영화의 구조를 띠고 있는 영화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힙합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에서도 힙합은 중요한 장치로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일종의 폭동으로 끝을 맺는다. 또 카소비츠가 만든 ‘프랑스의 게토영화’ <증오>에서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파국으로 내몰린다. <사회에의 위협>에서는 삶 자체가 파국이다. 그 파국을 빠져나오려는 주인공의 힘겨운 노력을 그린 하드코어한 성장영화다. 또 즉흥시 낭송을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흑인들의 삶을 다룬 마크 레빈의 영화 <슬램>에서는 총에 맞아 실명한 친구가 ‘복수’를 하겠다고 하니까 주인공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복수? 그건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길일 뿐이다. 복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영원한 악순환의 일부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백인의 ‘마스터 플랜’에 걸려드는 것이다. 로렌은 ‘너 자신을 인정하라’고 한다.

우리가 문을 열 때, 리듬이 그 열쇠

----------이런 영화들은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보면서도 그 구도를 일정하게 깨뜨리는 결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커티스 핸슨의 은 이와는 조금 대조적이다. 역시 일종의 성장영화로 취급할 수 있다. 트레일러 파크에서 힘겹게 사는 하층 백인의 애환을 그린 영화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은 ‘배틀’의 구조에 집착한다. 물론 이 배틀은 넓게 보아 8마일 이쪽 사람들이 저쪽 사람들과 투쟁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는 하다. 영화 속의 지미는 끝없이 돈과 욕망이 지배하는 8마일 저쪽의 시스템에 자기 자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힙합 클럽에서의 배틀에서 시작하여 배틀로 끝나는 이 영화에서 배틀은 결국 이 영화를 카우보이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정의/불의 식의 딱딱한 이분법을 유지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에미넴이 배틀에서 이기면 정의가 실현되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는 카우보이처럼 배틀의 현장을 떠나고 현실의 질서는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영화는 8마일이라는 경계선을 중심으로 한 이분법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그 구분을 넘어서는 징후를 담아내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이 영화는 이렇듯 배틀의 구조에 집착함으로써 할리우드에서 생존한다. 여전히 구조 자체가 할리우드영화다.

----------물론 ‘배틀’은 힙합의 중요한 하나의 요소이다. 운을 맞춘 랩을 통해 서로 경합을 벌이는 배틀 랩의 역사는 깊고도 깊다. 그 기원은 아프리카에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민사소송에 해당되는 개인간의 분쟁을 이 배틀랩으로 해결하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동네 추장이나 심판관 앞에서 소송의 당사자들이 운에 맞추어 서로 항변하다가 운이 틀리는 사람이 소송에서 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랩 소송’의 바탕에는 라임, 즉 운은, 다시 말해 시는 하느님이 주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라임을 맞춘 말의 흐름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풀린 혀는 하늘에서 내린다. 게토에 사는 흑인들의 발설장치인 랩의 기원에는 이처럼 뿌리깊은 무엇이 있다. 배틀 자체가 대결이긴 하지만 단순히 이기고 지고를 가르는 게임이 아니라 흑인에게 랩이 얼마나 뿌리깊은 자기표현 양식인가 하는 점을 확인하는 중요한 참여수단이다. 따라서 배틀은 대결의 의미보다는 풀린 혀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로 나누는 일종의 제의이자 축제의 현장이다. 전설적인 힙합 그룹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의 랩 대사 한 대목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문을 열 때 / 리듬이 그 열쇠.”(Rhythm is the Key/as we open up the door)

----------이 말 속에는 힙합의 비밀이 담겨 있다. 힙합은 리듬의 보편성을 표현한다. 에미넴 역시 그 리듬의 일부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그 보편적인 리듬의 출렁임이다. 리듬은 몸의 문을 열고 마음의 문도 열며 세상의 문을 열어 새로운 곳에 이르게 한다. 리듬은 때로 사람을 신 앞에 데려다 주기도 한다. 리듬은 물결이기 때문에 어딘가로 간다. 반복되면 될수록 그 물결은 바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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