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다시,싸움처럼 <파괴> 만드는 전수일 감독 [2]
김현정 2003-03-07

▣ 웃는 모드

철원과 부산 현장을 두번 찾아가서 찍은 꽤 많은 필름 중에 전수일이 웃고 있는 컷은 단 한컷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하거나 웃거나 딱 두 가지 경우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자는 무척 드물었던 것이다. 철원에서 전수일이 처음 웃은 순간은 촬영이 모두 끝나고 “인터뷰 꼭 해야 하나. 너무 불쌍해 보이기만 할 텐데…”라고 말했을 때였다. 지난해에도 그는 한결같은 말투로 비슷한 문장을 말했지만, 이번엔 표정이 달랐다. <새는…>을 호평한 프랑스 언론의 기사를 직접 번역한 문서들을 들고 나타났던 그는 가리는 것이 많았고, 정말 깐깐한 선생님처럼 보였다. 그를 앞에 두고선 결코 <새는…>의 난해함을 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처절하게 영화를 만드는 와중에서도 전수일은 자신의 험난한 경험을 농담처럼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힌 것 같았다.

자살안내원 S를 연기하는 정보석과 행위예술가 마라를 연기하는 추상미는 모두 일일드라마 촬영에 몸이 묶여 있는 상태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촬영하고 있지만, 등장인물이 많지 않은 탓인지 배우들 사이의 유대는 무척 돈독하다.

장현성은 어느 방송사에서 ‘저예산 설경구’라는 컨셉을 잡아 프로그램을 만들 만큼 <나비> <비디오를 보는 남자> <서바이벌 게임> 등 작은 영화만 두루 거쳤다. 흥행에선 전수일과 막상막하. <나비>가 서울 8천 관객을 동원했다는 장현성에게 전수일은 “내가 훨씬 낫네. 나는 단관개봉이었는데도 서울 4600 했다”고 뿌듯하게 대답했다. 장현성이 “감독님, 저는 <나비>도 별로 재미없었는데 <새는…>은 조금 더 재미없었어요”라고 반격하자 “그거 봤냐? 야, 그런 영화를 뭐 하러 봤어”라며 세번 만나는 동안 처음으로 소리내 웃기까지 했다. 막다른 데까지 몰리면서 만든 자신의 첫 장편이 지난해나 지금이나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외부의 장애 때문에 못하면 못살 거 같아서” 무모하도록 영화를 고집해온 그는 <새는…>이 예정보다 일찍 간판을 내렸을 때, 화가 났었다. 그런 그가 이젠 많이 풀어진 까닭은 바쁜 일정에도 성실하게 동행해준 재능있는 배우들과 어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눈밭도 두려워하지 않는 스탭들 덕분일 것이다.

속타는 심정을 말로 다 할 수는 없어도, 함께하는 사람들을 믿기 때문에, 전수일은 편안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다. 바람을 막아주는 제대로 된 벽 하나 없는 철원 노동당사 2층, 얇은 옷 한벌만 걸친 추상미가 퍼포먼스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도, 전수일은 급조한 엑스트라들의 동선에 신경쓰느라 연기를 하는 추상미와 장현성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배우를 믿으니까 그냥 간 거라고. 철원 현장을 정리하고 다음 촬영지인 눈쌓인 진부령으로 이동하는 동안, 추상미는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양수가 자기 몸 위로 쏟아지는 장면을 혹시 잡았는지,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했다. 전수일은 단 한번에 끝내야 했던 그 장면에서 이미 흰 천을 적신 붉은 양수밖에 포착하지 못했지만, 아쉬워하는 배우는 감독에게 기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산에는 영화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혼자가 맘 편하다”고 말하는 이 고독한 감독은 동등한 비중을 가진 다섯명의 배우를 조율하고 서울과 부산에서 알음알음 모여든 스탭들을 이끄는 사이, 코트 자락처럼 끌고 다니던 그림자를 약간 버렸다. 이수아는 전수일이 처음보다 말수가 훨씬 많아졌다고 했다. 전수일 자신도 원작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면서 전과는 달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다고 했다. 추상미는 아주 오래 전 다른 감독의 이름으로 제안받고선 한번 거절했던 <파괴>를 그렇게 달라진 시나리오 때문에 받아들였다.

▣ 혼자 몰래 웃는 모드

전수일은 <파괴>를 아무도 모르게 시작했던 것처럼, 좋은 일이 생겨도 널리 알리지 않았다. <이재수의 난> 합작에 참여한 필립 아브릴의 회사 언리미티드가 투자를 결정한 것을 알고 전수일은 부산에 있던 장현성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서도 한 시간을 넘기고서야 이 반가운 소식을 입 밖에 낸 전수일. 장현성은 그가 “혼자 몰래 키득대는” 경우가 이거말고도 더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수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도 했다. 당연하게도 혼자 살짝 좋아하는 전수일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색하고 다음날 촬영을 논할 때나 “서울 3만, 지방에선 별로 안 볼 테니까, 전부 전국 7만만 보면 <파괴>는 대박”이라고 무표정하게 셈할 때나 그 속마음에선 어떤 미소가 번질지 조금은 그려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전수일은 1년 전 “다른 영화가 필요”하고 “속도가 빠르기만 한 서울보단 바다가 있는 부산이 좋아서” 사람도 없고 영화 자본도 없는 부산을 지킨다고 말했다.

추운 날씨, 썰렁한 스튜디오 안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던 날은 폐건물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새는…>의 포스터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주 멀고 싸늘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따뜻한 부산 날씨에 익숙한 제작진이 겹겹이 껴입고 마지막 겨울이 머무르고 있는 강원도에서 강행군을 하던 2월 말엔, 그 목소리에서 오히려 온기가 느껴졌다. 다른 영화를 볼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배우들의 논리보다도, <파괴>의 대중성을 믿게 하려는 스탭들의 노력보다도, 설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희망이 더 믿음직스러웠던 건, <파괴>가 말도 안 되게 시작해 끝을 바라보고 있는 탓이 아닐까. 전수일이 영화를 만든 9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 무게에 압도될 정도로 캄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영화를 만든다. 만들고 싶으면 만든다는데, 희망을 제외한 어떤 조리있는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

<파괴>의 원작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죽음, 원하거나 이끌거나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각색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다. 죽고 싶은 사람들을 자살로 인도하는 남자가 화자인 이 소설은 죽음에 이르는 두 여자를 중심으로 다섯개의 에피소드를 배치했고, 각각의 에피소드는 인물과 이야기가 겹친다. 전수일은 낯선 화법으로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소설을 영화에 적합하도록 바꾸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동식이 자살안내인 S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기법을 이용했다. 영화는 다섯명의 인물에게 거의 비슷한 비중을 할애한다. S(정보석)는 어려서 가출해 술집에 나가는 세연(이수아)과 유명한 행위예술가 마라(추상미)에게 자살의뢰를 받는다. 이들 곁엔 마라의 퍼포먼스를 비디오로 찍고 싶어하는 아티스트 상현(장현성)과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총알택시기사 동식(김영민) 형제가 있다. 동식은 상현과 동침한 적이 있는 애인 세연이 자살하자 그 죽음 뒤에 누군가 배후가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세연의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그 촉수 끝에 자살을 디자인하는 S가 걸려든다.

소설과 영화가 눈에 띄게 차이나는 부분은 구성 외에 인물의 변화다. 소설의 화자가 비엔나에서 만난 홍콩 여자의 에피소드는 마라와 세연에게 나뉘어 붙여졌다. 종잇조각으로 된 옷을 입고 있다가 돈을 내는 액수만큼 종이를 떼어내는 설정은 마라의 퍼포먼스로, 생수병에서조차 정액 냄새가 날 정도로 날마다 함께 사는 남자의 정액을 마셔야했던 기억은 세연의 과거로 간 것. 홍콩 여인 대신 영화에 끼어든 인물은 철없이 죽음을 동경하는 젊은 로커 커트다. 커트는 권총으로 자살한 커트 코베인처럼, 죽음이 자신을 전설로 만들어줄 거라 믿으면서 세연을 통해 S에게 접근하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커트가 속해 있는 밴드는 부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파괴>의 영화음악을 맡기도 한 언체인드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