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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싸움처럼 <파괴> 만드는 전수일 감독 [1]
김현정 2003-03-07

희망이 있다면, 파괴는 없다

전수일 감독이 또다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다시’라면, 이 낯선 감독에게도 전작은 있다는 뜻이다. 그는 단편 하나와 중편 두개를 모은 <내 안에 부는 바람>과 제작한 지 3년 만인 지난해에야 개봉한 장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를 거의 혼자 힘으로 완성했다. 물론 이 두 영화를 본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제는 <파괴>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원작인 이 영화는 전작과는 격이 다른 제작비 때문에 여전히 혼자인 전수일을 거의 파괴의 경지로 몰아넣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9년 동안 단 한순간도 마음놓을 새가 없었을 사람. 그래도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삶의 터전인 부산에서, 온갖 걱정거리를 짊어지고, 영화를 만든다. 이 놀랍고도 신기한 고집의 소유자를 만나기 위해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파괴>의 현장을 찾았다. - 편집자

강원도 철원 노동당사를 찾은 지난 2월26일 <파괴>는 크랭크업을 10여일 앞두고 있었다. 이젠 마음이 좀 편하시겠어요, 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전수일 감독은 변하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답했다. 잠시 뒤 프로듀서로부터 전해들은 사정은 감독이 침통해 보이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파괴>의 순제작비 8억원 중 지금까지 투입된 자금은 5억원 남짓. 그 5억원도 개인투자와 개인대출로 끌어온 돈이고, 촬영이 예정대로 끝난다 해도 부채로 버텨온 비용을 집행할 방법이 없다. 임금을 받을 거라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일하는 스탭이 여럿이다. 그렇다면 이 현장은 도대체 얼마나 암울할 것인가. 뼈대만 위태롭게 남아 있는 노동당사 건물 사이로는 바람만 몰아치는데, 보온물통 하나 없이 휴대용 가스버너 주위에 바람막이를 둘러치고 줄서서 뜨거운 물을 받는 스탭들은 얼마나 추울 것인가. 그러나 이 역시 성급한 판단이었다. 자의로 도와주는 정체불명의 사람들도 몇몇 섞여 있는 <파괴> 현장은 단출하나 생기있었다. 젊은 스탭들은 말도 안 통하는 폴란드 촬영팀과 한국말로 농담을 했고, 합작을 고려 중인 프랑스 제작자도 들렀다. 무엇보다도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던 전수일의 무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 무표정 모드

전수일은 가만히 있어도 진지해 보이는 사람이다. <나비>에도 출연했던 배우 장현성은 “가장 심각해 보이는 그 순간, 사실은 아무 생각도 없다는 걸 뒤늦게 간파했다”고 장난처럼 말하지만, 그의 마음속엔 수많은 상념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전작만 봐도 그렇다. 조재현이 중편 중 하나에 출연한 <내 안에 부는 바람>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체험하는 시간의 의미를 담은 사색의 산물이었고, 설경구가 무명 시절 주연한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는 평범한 관객이라면 지루함을 참지 못했을 롱테이크로 일관하는 자전적인 영화였다. 오죽하면 추상미가 “감독님이 절대로 보지 말라 그랬다”면서 <새는…>을 피해갔을까. 무표정한 틈틈이 아주 잠깐 웃는 얼굴을 보이는 전수일은 그 자신의 영화가 주는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지명도 높은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원작인데도 <파괴>가 2년 가까이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쩔쩔맸던 것은 전수일의 말처럼 “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칸과 베니스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던 전력마저, 때로는 심각한 방해물이다.

의욕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던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전수일은 <파괴>가 이 정도로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파괴>가 누구나 생각하는 자살문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에도 나오듯 “스스로 끝을 결정하는 압축적인 삶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라는 점에서, 손해보지 않을 만큼의 흥행은 되리라고 자신했다. “한국에선 하루에 서른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1년이면 1만명이 넘는다. 대중적인 소재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코 쉽다고는 말할 수 없는 원작과 자신있게 난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전수일의 전작에 자신이 없었는지, 판권을 공동소유하고 있던 동아수출공사가 손을 뗐다. 그래도 누군가 투자를 할 것만 같았지만, 사람들은 호의를 보이다가도 계약서를 쓸 순간만 다가오면 등을 돌렸다. 홍승현 프로듀서는 “전수일 감독 영화에 투자를 하겠다고 그러면 주변에서 다들 말린다고 하더라”라는 씁쓸한 소문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디지털 장편영화 후반작업을 진행할 비용이 없어서 일단 <파괴> 프로듀서를 맡은 인물. “<새는…>과는 다를 수 있도록, 감독은 연출만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적성에도 안 맞는 프로듀서에 손을 대게 됐다는 홍 프로듀서는 배우들의 출연료를 많게는 1/3 수준으로 깎는 설득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그 1/3조차 아직 다 지불하지 못했다.

결국 전수일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시스템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새는…>이 개봉할 무렵 전수일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2억5천만원에 달하는 빚을 짊어지고 있었다. 직접 차린 제작사 동녘필름이 있다고는 해도 어떻게 다시 4억원을 대출받았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지만, 지인들이 믿고 투자한 혹은 빌려준 돈이었다고, 전수일은 돌려 묻는 질문에 돌려 답했다. 그렇게 마련한 제작비 일부에 추상미와 정보석, 이수아, 장현성, 김영민이 포진한 출연진을 믿고 일단 촬영은 시작했지만, 때마침 충무로는 블록버스터들의 연이은 흥행 실패로 한참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촬영한 러시필름을 보고 나머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겠다고 나선 어느 영화사는 아직도 돈을 주지 못한 상태다. 쓴맛을 한두번 본 게 아니라서, 동녘필름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며 새로운 자금을 구하고 있다.

전수일의 아내이자 <파괴> 제작을 위해 뛰고 있는 조인숙 동아대 교수는 시나리오와 함께 “한번도 남편 하는 일을 말린 적이 없는데…”라는 문장을 언뜻 흘리는 메일을 보내왔다. 몇주 전, 부산 촬영현장에 가기 위해 소식을 주고받았을 때의 밝은 목소리와는 너무 달라진 어투였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그녀와 그녀의 제자인 홍 프로듀서는 <파괴>가 전수일의 전작들과 다른 상업적인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여기에 이르러 전수일의 무표정은 한층 더 단단해졌다. “객관적인 전작들과 달리 <파괴>는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는 탓에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가 좁혀지긴 했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그대로다. 나는 아직도 숏과 숏을 나누는 데 거부감이 있다. 배우들의 감정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롱테이크를 좋아한다. 컷을 불러야 하는데도 일부러 배우들을 그냥 놔둘 때가 대부분이다.” 이러니 다른 데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프랑스 유학 시절 전수일을 알게 된 이은진 해외합작 코디네이터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질 자콥과 친분이 두터운 피에르 루시앵이 자막없는 러시필름만 보고도 너무나 훌륭한 영화라고 칭찬했다며 밝게 말했다. 차이밍량 같은 감독들이 그렇듯, 유럽 자본에서 출구를 찾는 걸까. 프랑스 영화사 언리미티드는 후반작업 지원을 결정했고 유럽 배급까지 맡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영진위가 지원하는 예술영화 프로젝트에서도 두번이나 쓴잔을 마셨는데,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무작정 촬영을 시작했을 거라고 말하는 전수일은 그 후반작업까지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 길을 전수일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엄숙한 얼굴로 견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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