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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7]
김혜리 2003-03-07

나는 불안을 안다

<히치콕과의 대화>

20세기를 벌벌 떨게 한 연쇄살인자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엄청난 겁쟁이였다. 다섯살의 어느 날 앨프리드는 너무 늦게 귀가했다. 아버지는 막내의 손에 쪽지를 들려 동네 경찰서로 보냈다. 메모를 읽은 서장은 다짜고짜 꼬마를 유치장에 가뒀다. 끔찍한 공포의 5분이 흐른 뒤, 경찰과 감옥은 소년에게 평생 원수로 각인됐다. 히치콕 영화 속에서 번번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거치적거리는 무수한 경찰들은 복수의 제물이라고 볼 수 있다. 훗날 <싸이코>에서 별 활약도 없는 보안관의 장면이 군더더기 아니냐는 질문에 히치콕은 “경찰서에 도움을 청하면 어떻게 되는지 완벽히 보여줬다”고 흡족해했다.

예수회 학교의 몽둥이는 앨프리드의 죄와 벌 노이로제를 악화시켰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는 벽에 등을 붙이고 뿌루퉁한 아랫입술을 내밀고 남들 노는 모습을 구경만 하는 냉소적 관찰자였다. 약삭빠른 자기 PR의 귀재로 알려진 전성기에도 히치콕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항상 죄와 무질서, 불온한 무엇이 자신의 인생과 영화를 망쳐버릴까봐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목표한 ‘디렉터스 컷’에 한치 오차없이 들어맞는 거리와 길이의 숏들을 찍어서 아무리 간섭을 좋아하는 제작자도 손쓸 도리가 없게 만들었다. 일상에서는 제대로 정돈된 책상의 모습에 위안을 받았고 욕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꼼꼼히 사용한 흔적을 청소했다. 히치콕은 ‘불안’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나 에드거 앨런 포만큼 잘 알고 있었다.

뭉게구름처럼 동글동글한 히치콕의 실루엣은, 미키 마우스의 그것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캐릭터로 통한다. 어린 시절에는 일하는 부모에게 방치되는 시간이 길었고, 운동도 독서도 귀찮아한 앨프리드 히치콕은 불안을 식탐으로 달랬다. 나중에는 알코올이 추가됐다. 스트레스의 바로미터였던 히치콕의 체중 곡선을 그의 필모그래피와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함수가 발견될 법도 하다. 자신의 모든 영화에 스파이처럼 깜짝출연했던 히치콕은 조난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라이프 보트>(1943)에 이르러 고민에 빠졌다. “대개의 경우 행인 역으로 간단히 해결했습니다만 바다 위를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생각다 못해 구명선 옆을 떠가는 시체로 분할까 고려해봤지만 물에 빠질까봐 겁나서….” 결국 히치콕은 조난자가 읽는 신문 광고란의 다이어트 약품 광고에 실린 사진 2장으로 간접 출연했다. 당시 그는 150kg에서 100kg의 획기적 감량을 달성한 직후였다.

프랑수아 트뤼포 지음 | 곽한주 등 옮김 | 한나래 펴냄

강박증을 앓는 인간은 많지만, 히치콕은 자신의 천재를 활용해 사적인 강박관념을 전 인류적 관심사로 만들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처럼 언제나 관객이라는 인자를 포함시켜 창작했던 히치콕의 갈고리는 서스펜스였다. 그는 서스펜스를 공포나 경악, 추리와 엄격히 구분했다. 히치콕에게 서스펜스는 필연적으로 대상이 악인이냐 선인이냐와 무관한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자극하는 주술이었다. 그 주술의 집행에 있어 히치콕은 편집광이었다. <나는 비밀을 안다>에서는 칸타타의 심벌즈 소리에 맞춰진 총격의 긴장을 높이기 위해 관객이 악보까지 읽게 했고 <의혹>에서는 독이 든 우유잔 안에 전구를 넣어 흰 광채가 눈을 사로잡게 했다. 영화를 만들지 않을 때 히치콕이 제일 즐겼던 장난은 꽉 찬 엘리베이터에서 “노인네가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릴 줄 누가 알았나” 운운하며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내려버리는 짓이었다. 그는 거장치고는 대중에게 죄스런 쾌락을 너무 많이 제공한 엔터테이너였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1962년 <새>를 편집 중이던 히치콕을 찾아가 오랫동안 명석한 인터뷰어를 기다려온 거장의 고백에 50시간 동안 귀를 기울였다. 대화를 빙자한 작가론에 가까운 책 <히치콕과의 대화>(프랑수아 트뤼포 지음·곽한주, 이채훈 옮김/ 한나래 펴냄)에서 위에 열거한 일화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왔죠?”라고 매듭지어지기 일쑤인 즐거운 샛길들이다. 두 거물이 마주 앉았다고 언제나 만사형통은 아니다. 그러나 히치콕과 트뤼포는 특별한 커플이다. 살인을 연애처럼, 연애를 살인처럼 찍었던 감독에게 또 다른 감독은 예찬은 반문처럼 찬사는 논박처럼 던진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히치콕이 더 궁금하다면

<히치콕과의 대화>가 출시된 히치콕 영화들과 한 챕터씩 번갈아 곱씹을 수 있는 책이라면 <앨프레드 히치콕>(베른하르트 옌드리케 지음·홍준기 옮김/ 한길사 펴냄/ 1997)은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소상한 작품론을 걷어낸 감독 전기다. 연대순으로 히치콕의 주요 행보와 각 작품의 핵심적 특성, 평가와 증언을 엮어 히치콕의 스케치를 제공한다. 명료한 어휘와 세련된 위트의 소유자인 히치콕 본인의 목소리를 좀더 듣고 싶다면 <히치콕이 말하는 히치콕>(Hitchcock on Hitchcock/ 시드니 고틀립 엮음/ 캘리포니아대 출판부 펴냄/ 1995)이 있다. 히치콕 본인이 영화전문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에 기고한 글, 회고, 강연록을 주제별로 묶었다.

거인의 그늘을 벗어나 히치콕 영화세계의 전체적 조망을 얻으려면 외곽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로빈 우드의 <다시 보는 히치콕 영화>(Hitchcock Films Revisited/ 컬럼비아대 출판부 펴냄/ 1989)는 전작 <히치콕 영화>의 개정판. <현기증> 등의 탁월한 분석으로 손꼽히는 필독서로 히치콕 영화가 인간의 윤리적 모호성을 내성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해설한다. 여성을 관음주의적 시선에 종속시키고 내러티브가 남성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한 히치콕 영화는 페미니즘 비평의 묵직한 이슈이기도 했다. <너무 많이 안 여자들>(The Women Who Knew Too Much/ 타니아 모들레스키 러틀리지 케간&폴/ 1988)는 이 분야의 중요한 저작이다. 욕심많은 영화학도라면 <히치콕 백주년 에세이집>(Hitchcock: Centenary Essays/ S. 이시이 곤잘레스, 리처드 알렌, 샘 곤잘레스 편/ 1999)에 도전해볼 만하다. 토머스 엘세이저, 피터 월렌, 슬라보예 지첵 등 전문 연구자들이 인간 히치콕, TV 속의 히치콕, 섹슈얼리티 등을 파고든 에세이를 모아 모자이크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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