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6]

구원 뒤의 질투의 카오스

<잉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확신은 바로 이 시기(<제7의 봉인>) 동안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의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지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해명될 수 없는 어떤 ‘사악함’- 심술궂고 위협적인 사악함- 이 존재하며, 인간이야말로 그 사악함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이 오늘날까지 내가 간직하고 있는 철학이다.”(<열정>) 충돌하는 두개의 진술.

구원을 염원하는 감독의 내면에도 때때로 그 성스러움과는 상관없는 치사한 악마가 살아 있었다. 잉마르 베리만은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는 직업적인 관심을 내세워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이전에 겪었던 여러 가지 성적 체험들을 털어놓도록 꼬드겼다. 꼬드긴 대가로 그는 수많은 경험담을 들어야만 했고, 그러면서 그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의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도저히 참을 길이 없었다. 질투의 감정은 “내장과 생식기를 할퀴고 쥐어뜯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종종 비평가들에게 “베리만의 최신 토사물을 조사하느라 눈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다”는 악평을 들어야만 했다. 베리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 자신의 영화 안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를 비난한 비평가들을 흔적없이 자신의 영화에 등장시켜 타락시키기도 했다.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었다고 느낀 영화비평가 하리 셰인을 영화 <산딸기>에서 보건부 관리 베르게루스로 등장시켜 악랄하게 복수했다. 때로 분노의 감정은 분산되어 분출되었다. 왕립극단 단장으로 “마을 한가운데 교회를 세운 것”과도 같은 성과를 거뒀음에도 끊임없이 질책을 받자, 영화 <제식>의 세 인물들에 자신의 분노를 투영시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현실에서의 치욕적인 오해를 걷잡을 수 없는 영화제작의 광기로 몰고간 <뱀의 알>의 제작일지가 눈에 띈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쉰일곱이 되던 해. 세무관에게서 첫 번째 통지서가 날아들었고, 신문들은 일제히 그의 세금 탈세 혐의를 대서특필했다. 베리만은 그 순간에도 “그는 정확히 이런 감정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의 감정상태를 묘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난받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적으면서, <뱀의 알>의 아벨 로센베의 성격화에 냉정하게 자신의 상황을 투영시키려 했다. 그러나 베리만은 점점 더 고혈압에 시달렸고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했다.

잉마르 베리만 지음 | 오세필 옮김 | 시공사 펴냄

현실에서의 치욕을 잊기 위해 <뱀의 알>의 제작에 집착했다. 말 그대로 아집이었다. 어느 목탄화 그림에서 발견한 ‘베리만 거리(그의 이름과 동일한)’의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세트를 지었고,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레드퍼드, 리처드 해리스를 차례로 찾아가 출연을 요청했다. 끝내 모두가 <뱀의 알> 출연을 거절했고,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던 실패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베리만은 광기의 힘에 기대어 <뱀의 알>을 완성했다. “<마법의 등>에서 나는 <뱀의 알>이 예술적으로 실패한 이유가 1920년대 베를린을 배경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실패의 원인이 좀더 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개인사의 질곡은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사람처럼 지나치게 격앙”되어 있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세금 탈세 혐의로부터 온 치욕의 감정은 영화 한편의 광기를 휘어잡고 있었다.

이처럼 베리만에게 영화의 바깥은 언제나 영화의 안에 표식을 두고 있었다. 그의 영화 <늑대의 시간>과 <꼭두각시들의 삶으로부터>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거울은 부서졌어. 하지만 부서진 조각들은 무엇을 비추고 있지?” 베리만에게는 여전히 마땅한 대답이 없다. 유머라고는 어느 한 군데 찾아보기도 힘든 그의 자서전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내면으로, 더욱더 내면으로 들어서기 위해 그 결정지어져 있지 않은 풍경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진실에 가득 찬 (치사한) 고백과 번복이 뒤섞여서 돌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정한석 mapping@hani.co.kr

베리만이 더 궁금하다면

잉마르 베리만의 또 다른 자서전 <마법의 등>(민승남 역/ 이론과 실천 펴냄)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시기적으로는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보다 앞서지만, 국내 번역서는 오히려 최근에야 나왔다.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가 영화를 중심으로 한 그의 자서전이라면, <마법의 등>은 스톡홀름 왕립극단의 단장을 지낸 ‘연극인’으로서의 자서전에 가깝다. 베리만의 자서전적 성격이 들어 있는 최초의 흔적은 <베르이만이 말하는 베르이만>(Berman on Berman)이라는 인터뷰집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베리만에 관한 묵직한 이론서를 보고 싶다면 메를린 존스 블랙웰이 집필한 <잉그마르 베르이만 영화에서의 젠더와 재현: 스칸디나비아 문학과 문화>(<Gender and Representation in the Films of Ingmar Bergman(Studies in Scandinavian Literature and Culture>)가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