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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4]
문석 2003-03-07

돈과의 타협은 없다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

“영화란 것은 존재하지 않아.” 1925년의 한때, 장 르누아르는 매일 아침 되뇌었다. 영화를 잊기 위해! 1924년 그가 의욕적으로 만든 데뷔작 <물의 소녀>가 극장을 한곳도 잡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야심은 없었지만 이 영화가 그 정도로 형편없다고 생각지 않았던 르누아르는 좌절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에겐 예술가 이외의 자질, 특히 장사꾼의 능력은 없었다. 호구지책으로 마련한 그림가게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을 정도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오귀스트 르누아르였는데도!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먹고살기 위한 일을 할 것인가, 예술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 갈등의 순간, 운명은 예술편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찾은 한 극장에서 그는 <물의 소녀> 중 일부가 피아노 연주와 함께 상영되는 광경을 봤다. 관객은 거대한 박수소리로 이 영화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안 돼, 결단코 우리는 영화 만들기를 포기할 수 없어!” 그는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선택한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26년 자신감을 갖고 만든 <나나>가 대실패를 겪으며 100만프랑의 손실을 냈고, 그는 “분신과도 같은” 아버지의 그림을 모두 팔아야 했다. 31년 걸작 <암캐>를 만들 때도 낭패를 겪었다. 당시 그는 원하는 대로 촬영과 편집을 마친 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사건은 제작자 리슈베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 벌어졌다. 상업성 있는 코미디를 기대했던 리슈베는 완성된 영화를 본 뒤 경악했고, 다른 감독에게 재편집을 맡겨버렸다. 르누아르의 항의는 원천봉쇄됐다. 스튜디오는 그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주인공 캐스팅 과정에서 첫 아내 카트린과 헤어지는 아픔마저 감수하며 돌입한 작품이었기에 그의 고통은 남달랐다. “나는 3일 낮과 3일 밤 동안 몽마르트르의 술집들을 전전하면서 술로 슬픔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다행히 제3자의 중재로 영화는 애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대중적 성공도 거뒀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장 르누아르 지음 | 오세필 옮김 | 시공사 펴냄

대성공을 거둔 <거대한 환상>을 만들 때도 “제작비를 구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그 자체로서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회고처럼 그는 3년 동안이나 시나리오를 들고 발품을 팔아야 했다. 1940년 할리우드로 터전을 옮긴 뒤 그는 평생 폭스사로부터 좋은 급료를 받을 것이라는 ‘거대한 환상’ 속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감독이라는 자리가 그의 이름에 박힌 접는 의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강>의 경우, 할리우드 제작자 그 누구도 참여하려 하지 않아 영화 속에 코끼리 사냥장면을 집어넣지 못해 안달인 한 꽃가게 주인의 자본조달 수완에 의지하기도 했다. 훗날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영화를 찍기 위한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는 평생을 애써야 했다. 한두번의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나는 오로지 신의 섭리를 통해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암캐> <인간야수> <거대한 환상> 등의 성공작이 있었는데도 제작자들과 영화자본은 그의 작품이 “돈을 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유형의 영화가 아”니라고, 즉 상업성이 없는 영화라고 단정했다. 제작자를 상대로 르누아르는 유연했을지언정 결코 부러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동안 관객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는 영화,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돈을 모으느라 헐떡거리면서도 ‘작가영화’를 고집했던 것은 어쩌면 그의 책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독창성을 갖지 않으면 역사에서 잊혀지고 만다는 진리를 일러준 그의 아버지인 오귀스트와 “가면 뒤에 숨은 실제 얼굴과 번드르르함 뒤에 감춰진 기만을 보게 해주”고 “고정관념을 혐오하도록 일깨워”준 어린 날의 보모 가브리엘이 그 모든 발단이었다고 그의 자서전은 보여준다. 문석 ssoony@hani.co.kr

장 르누아르가 더 궁금하다면

<감독 장 르누아르>(문화학교서울 엮음·펴냄)는 지난해 서울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회고전과 함께 출간된 비평서다. 김의찬, 유운성, 김성욱 등이 <암캐> <랑주씨의 범죄> <위대한 환상> 등 그의 대표작을 해설한다. 자서전과 함께 가장 유명한 앙드레 바쟁의 <장 르누아르>(Jean Renoir/ DaCapo Press 펴냄)는 르누아르의 작가론으로도 유명하지만, 프랑스 비평사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힌다. 바쟁이 50년대 당시 프랑스에서 그리 인정받지 못했던 르누아르를 프랑스 최고의 감독으로 끌어올린 것은 즉흥성과 현장의 미학을 통해 시적 리얼리즘을 구축한 그의 성가를 높이 산 탓이었지만, 르누아르의 ‘부활’은 바쟁 사후 이 책을 출간한 <카이에 뒤 시네마> 세대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이용’된 측면도 없지 않다. USC 영문과 교수 레오 브로디가 쓴 <장 르누아르의 영화세계>(Jean Renoir the World of His Films/ Bantam Doubleday Dell 펴냄)는 그의 작품들의 중심적 모티브를 가장 잘 분석한 책으로 꼽히며, 영국의 영화평론가 레이먼드 더그내트의 <장 르누아르>(Jean Renoi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펴냄)는 박식한 시네필답게 그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관련된 자질구레한 사실들까지 보여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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