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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3]

거장과 그의 수호천사들

<감독의 길>

구로사와 아키라의 감독 데뷔 시나리오는 번번이 검열관들에 의해 매장되었다. 그는 이제 단지 술마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시나리오를 써서 팔아치우는 자포자기의 삶을 연장하고 있었다. <스가타 산시로>라는 제목의 소설을 신문에서 발견하게 된 그 어느 날 전까지. 구로사와는 본능적으로 이 소설이 영화의 훌륭한 소재임을 느낀다. “이 책의 영화화 판권을 구입하십시오. 훌륭한 영화가 될 겁니다.” 도호 영화사의 기획담당 총책임자 모리타 노부요시를 찾아간 구로사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했다. “좋아. 어디 한번 읽어볼까.” “아직 안 나왔어요. 저도 아직 못 읽었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이 책이 좋은 영화가 될 것을 장담합니다.” “좋아. 하지만 자네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자네가 좋게 말한다고 당장 나가 판권을 사올 수는 없지 않은가. 책이 나오면 자네가 읽어보고 정말 좋다면 그때 다시 오게. 그러면 내가 판권을 구입하지.”

이날부터 구로사와는 아침, 점심, 저녁,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서점에 들러 마침내 책을 구입한 뒤 단숨에 읽어버린다. 한밤중에 달려간 구로사와. “확실합니다. 판권을 사십시오.” “알겠어.” 도호 영화사가 판권 교섭을 위해 사람을 보낸 다음날, 간발의 차이로 다이에와 쇼치쿠 역시 소설의 판권을 사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스가타 산시로>는 구로사와의 것이었다. 신문에서 그의 기사를 읽었던 소설가의 부인이 구로사와를 추천했고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사와 아키라의 ‘감독의 길’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구로사와는 자신이 운명의 기로에 놓인 순간마다 어디선가 ‘수호천사’가 나타나곤 했다고 회상한다.그리고 구로사와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길을 가르쳐 주었던 수호천사들의 이름은 바로 ’스승’이었다. <스카타 산시로>, <붉은 수염>, <쓰바키 산주로>, <마다다요>에 이르기까지, 구로사와의 영화 속에서 스승들은 언제나 현명함을 깨우쳐 주는 수호천사들이었다. 결국 구로사와의 마지막 영화가 되어 버린 <마다다요>의 햐켄 선생이 어린 시절 구로사와에게 처음으로 교육의 의미를 일깨워준 다치가와 선생과 겹쳐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 민음사 펴냄 | 7500원

때로는 불같고, 때로는 연약한 청년 시절 구로사와를 지켜준 것 역시 그런 스승들이었다. <스카타 산시로>를 악의적으로 대하는 검열관들을 향해 "나쁜 자식들, 의자나 처먹어"라며 박차고 나오려는 찰나, 그 자리에 있던 오즈는 "100점이 만점이라면 <스카타 산시로>는 120점이다! 축하한다, 구로사와"라고 격려해 주었다. 또는, 구로사와가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야마모토 가지로는 꾸지람으로 옳은 행동을 가르쳐 주었다. 구로사와의 휴머니티는 곧 야마모토로부터 배운 것이다. 조감독 구로사와 시절. 배우 중 한 사람이 오픈 세트의 어느 간판에 쓰여 있는 글자를 구로사와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약을 파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야마모토 가지로의 청천 벽력 같은 호통. "구로사와, 그건 나프탈렌 파는 간판이야. 무책임한 말은 절대 하지마. 모르면 모른다고 해"

<감독의 길>(민음사 펴냄)은 <라쇼몽>에 이르러 끊어지듯 끝맺음되어 있다. 구로사와는 자신의 영화인생이 진정으로 시작된 그 지점에 자서전의 마침표를 찍어놓았다. 그가 여기서 멈춘 것은 자신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로사와는 자신을 중심에 놓기보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수호천사’들을 기억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으로 되돌아온다. 그들을 통해 삶과 영화를 되짚는다. 그리고 <라쇼몽>에 이르러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춘다. 이 책의 영문판 제목이 ‘Something Like an Autobiography’인 점, 자서전이 아니라 ‘자서전 비슷한 무엇’이 되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정한석 mapping@hani.co.kr

구로사와가 더 궁금하다면

국내 번역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천재이다>(문예춘추 엮음, 김유준 옮김, 현재 펴냄)에는 생전에 인터뷰를 싫어하기로 유명했던 그가 남긴 소중한 인터뷰 자료들이 들어 있으며, 그가 직접 뽑은 100편의 영화 목록도 수록되어 있다. 외서이긴 하지만, 구로자와 영화세계의 개괄적인 입문을 위해서는 도날드 리치의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들>(The Films of Kurosawa Akira)이 도움이 된다. 일본영화연구자이자 오즈 영화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도널드 리치는 <스카타 산시로>에서 <마다다요>에 이르는 구로자와의 30편 모든 영화에 대한 비평을 싣고 있다. 만약 구로자와를 통해 아시아의 비교영화연구의 흐름에 동참하고 싶다면 미츠히로 요시모토가 쓴 <구로자와: 영화연구와 일본 시네마>(Kurosawa: Film Studies and Japanese Cinema)가 흥미를 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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