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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2]
문석 2003-03-07

신이 사랑한 필름광 엿보기

데이비드 로빈슨의 <채플린- 거장의 생애와 예술>

광기가 천재의 천부능력에 대한 일종의 대가라면, 신은 찰리 채플린을 어여삐 여긴 게 틀림없다. 채플린에게 선사한 수많은 재능에 비해 절대자가 그에게서 요구한 것은 ‘고작’ 엄청난 창작욕과 지독한 완벽주의, 그리고 쉴 틈 없는 변덕의 소유자로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 ‘재능의 대가’는 끝없는 재촬영, 자신과 스탭들에 대한 집착, 수많은 시행착오로 나타났지만.

여기 하나의 사례가 있다. 1918년 초 채플린은 훗날 루이 델뤽이 “영화 사상 최초의 종합예술작품”이라 일컫는 <개의 생애>의 촬영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소유한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영화였기에 채플린의 의욕은 대단했다. 그런데 촬영을 시작한 지 몇주가 지나자 그는 갑자기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주말을 지낸 뒤 월요일 스튜디오에 나온 채플린은 돌연 이제부터 <위글과 아글>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작품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스탭들에게 그는 개미풀과 소금, 달팽이 대여섯 마리를 사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 되자 <위글과 아글>을 까맣게 잊은 채플린은 새로운 의욕으로 <걱정할 것 없어>(<개의 생애>의 촬영 당시 제목)에 달려들었다.”

창조에 관한 한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돼 있었던 채플린의 면모는 그와 거의 평생을 함께한 촬영감독 롤랜드 토테로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시퀀스를 끝내고 나면 다른 누군가의 탓을 하곤 했다…. 그러고는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서 밤새도록 생각해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맙소사, 바로 이렇게 했어야 했어….’ 그런 다음 사람들을 모두 내쫓고는 무대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1917년작 <이민선>의 최종 편집본은 1800피트 정도였으나, 잘려나간 분량은 무려 4만 피트 이상이었다. <황금광 시대>(1925)의 완성본은 8555피트 분량이었지만, 촬영된 필름은 23만1505피트였다. 이토록 심한 필름의 ‘낭비’는 할리우드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916년 67만달러, 이듬해에는 107만5천달러의 연봉을 받을 정도로 할리우드 흥행업자의 총애를 받았던 채플린이 아니었다면 1주일, 심지어 몇달치의 촬영 분량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작업에 돌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 한기찬 옮김 | 한길아트 펴냄

하지만 채플린은 이같은 ‘창작의 자유’를 스탭들에게까지 나눠주진 않았다. <개의 생애>를 찍으며 정리한 회계장부에는 콩을 구입한 마지막 5센트까지 적혀 있으며, 필름 35피트(애개!)의 사용처에 대해 자세한 해명을 요구한 기록까지 남아 있다. 채플린의 이러한 면은 독단성으로 비치기도 했다. 1923년 <파리의 여인>을 야외에서 촬영하던 중 한 스탭은 그에게 배우들의 동작 방향이 잘못 됐다고 지적했다. 수많은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권위에 상처를 입은 채플린은 오히려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다음날 편집용 프린트에서 그 착오는 뚜렷했기 때문에 채플린은 “이를 갈면서도” 재촬영해야 했다.

그렇다고 채플린에게 인간적인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슈 베르두>를 찍을 때 너무 긴장해 대사를 틀리는 한 노배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자신도 일부 잘못된 대사를 읊었다는, 채플린 영화의 한 대목 같은 에피소드는 오히려 숱하게 많다. <키드> <시티 라이트> <황금광 시대> 등에서 보이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통찰력은 이미 영화 밖 그의 삶 안에 있었다. 로빈슨의 지적처럼 단지 “찰리 채플린은 완벽을 추구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이 완벽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시도해보는 것이다.” 꼼꼼한 자료조사와 방대한 인터뷰를 통해 그의 영광스런 성취와 참혹한 좌절을 1천여 페이지에 걸쳐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이 책에서 채플린은 완벽이라는 정상을 향해 필름 롤을 굴리고 굴린 시시포스로 드러난다. 문석 ssoony@hani.co.kr

채플린이 더 궁금하다면

<찰리 채플린-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데이비드 로빈슨 지음·지현 옮김/ 시공사 펴냄)는 <채플린-거장의 생애와 예술>의 저자 로빈슨이 쓴 또 다른 책이다. 로빈슨은 <옥스포드 세계영화사>에서 무성코미디 시대와 찰리 채플린에 관한 글을 저술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 <…거장의 생애와 예술>을 축약한 듯 보이는 이 책은 ‘디스커버리 총서’답게 간략한 내용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풍부한 사진 자료를 보여준다. <채플린 자서전>(명문당 펴냄), <찰리 채플린>(정성호 옮김/ 오늘 펴냄, 절판), <찰리 채플린 자서전>(신태영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절판)은 모두 1964년 출판된 채플린의 <나의 자서전>(Charles Chaplin: My Autobiography/ Plume 펴냄)의 번역본이다. 어린 날 영국에서 코미디 배우로 활동하던 시절의 그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담고 있다. 자신과 이웃들의 비루한 삶이 훗날 그의 정치적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책이라기 보다는 양서로 꼽히기도 한다. 외서로는 최근 출간된 <찰리 채플린과 그의 시대>(Charlie Chaplin and His Times/ 케네스 S. 린 지음, Simon & Schuster 펴냄)가 이중적이었고 다소 위선적이었던 채플린의 이면사를 비판적으로 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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