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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 시티>는 어떤 드라마?
김현정 2003-03-14

남자들은 몰랐지!

삼십분 안에 완결된 이야기 하나를 뱉어내야 하는 드라마의 한계 때문에, 이들은 여성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도 유독 고개를 내미는 특징 몇 가지만 골라 캐리커처로 스케치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설명만으론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비난을 부인할 수 없는 캐릭터를 보완하는 건 에피소드 하나마다 캐리가 던지는 질문,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 반전과 변화를 거듭하며 흘러가는 네 여자의 뉴욕생활이다. “뉴욕 여성들은 정말 사랑보다는 권력을 택하는 걸까?” “여자의 미모는 지성이나 유머감각보다 중요한가?” “성공한 여자들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 주변엔 우리를 기죽게 하는 여자들이 있는 걸까? 그들의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걸까?” 진부해 보일지 몰라도, 어떤 여성도 감히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직접 던지지는 못한다. 심지어 캐리마저 “여자들은 모두 구출받기를 원한다”는 샬롯의 단언에 삼십대 독신여성이라면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일단 질겁한 뒤에야 정겨운 검은색 노트북으로 그 질문을 타이핑할 수 있다.

몇 가지 상황을 빠르게 교차시킨 뒤 질문을 뽑아내고, 캐리의 내레이션을 따라 본격적인 대답찾기에 돌입하는 <섹스 & 시티>의 구조는 모든 여자들이 두려워하는 상황에 맞부딪치는 대리체험을 제공해 공감을 얻었다. 이 시리즈는 또 꾸준히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상 후보에 오르고 캐리를 연기한 사라 제시카 파커가 3년 연속 골든글로브 코미디 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작품성을 공인받았으며, 이야기의 현실성을 두고 여러 매체가 대담과 리서치를 시도할 정도로 사회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화제를 모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대담한 노출과 남자들이 몰랐던 음담일 것이다. 네 친구가 사우나를 찾는 <섹스 & 시티> 세 번째 시즌의 한 에피소드는 TV시리즈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한꺼번에 수많은 나체가, 그것도 음모까지 등장한다. 정사신을 도맡는 사만다 역의 킴 캐트럴이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구사하는 파격적인 체위나 “큐피드의 화살이 떠난” 맨해튼에서 게이 클럽만이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동성애 예찬은, 제작진이 모른 척할 수만은 없는 상업적인 혐의를 덮어씌웠다.

로맨틱코미디보다 현실적 탈출구를

그러나 <섹스 & 시티>는 섹스라는 앞단어에 함몰되지만은 않는다. 또 하나의 축인 시티, 캐리가 데이트 상대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뉴욕에서 독신여성들은 사랑에 울고 우정에 웃는다. 한 친구가 실연당해 우울해하면 세 친구는 “우리가 진정한 솔메이트”라며 격려하고, 남녀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로 “네 그곳은 어떤 남자라도 지도없이 찾아갈 것”이라며 악담을 퍼붓다가도 따뜻한 포옹으로 설전을 끝맺는다. 신기하게도 친구 사이의 삼각관계가 없는 이 시리즈의 프로듀서 대런 스타는 “캐리와 유부남인 옛 애인 빅의 부적절한 섹스를 제외한다면, <섹스 & 시티>에서 유머없는 섹스신은 없다. 가장 진지한 에피소드에선 섹스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변호했다. 사만다의 레즈비언 관계 역시 <섹스 & 시티>가 남녀 사이의 섹스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여자들의 관계에 무게를 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만다는 남자들이 한번도 주지 않았던 레즈비언 파트너의 배려와 진솔한 애정이 부담스러워 그녀를 떠나고 만다. 게이인 공동 프로듀서이자 메인작가 마이클 패트릭 킹은 “내가 게이의 시선으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편견이다. 나는 다만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알 뿐”이라고 말했다. 원작과 달리 단 한번도 남성이 주체로 등장하지 않는 <섹스 & 시티>는 결혼을 지상목표로 설정하는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의 판타지 대신 현실적인 탈출구를 모색한다. 그리고 여기엔 귀여운 팁이 하나 더 있다. “<섹스 & 시티>에선 그동안 여자들이 맡았던 역할을 남자가 대신한다. 여기선 남자가 눈요깃감이다. 그리고 대런과 마이클이 남자배우를 고르는 안목은 정말 환상적이다”라는, 사라 제시카 파커의 평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

<섹스 & 시티> 다섯 번째 시즌은 이십대가 그러했듯, 삼십대에도 끝은 보인다는 필연으로 다가가고 있다. 친구들은 <섹스 & 시티>의 쾌감 중 하나였던 솔직한 음담을 더이상 나누지 못할 것이다. 사만다는 “그 남자는 정액 맛이 정말 이상해. 식이요법을 시도해볼까?”라며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이젠 미란다가 시즌4 끝무렵에 출산한 아들 브래디가 유모차에 얹혀 있으므로, “나 그 남자랑 스시를 먹었어(나 그 남자랑 섹스했어)”라고 돌려 말하며 분통을 터뜨려야 한다. 변태 정치인과의 에피소드 제목을 ‘정치적 발기’(Political Erect)라고 붙였던 재기발랄함도 모두 흩어지고 말 거라는 캐리의 암담한 예감과 함께 휘청거리고 있다. 남자가 없어서 감자튀김이나 양말 따위로부터 칼럼 소재를 구해야할 처지로 전락한 캐리는 “보습제처럼 날마다 비관주의로 무장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희망과 믿음이 날마다 무너지는 세상인데,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할까”라고 자문하기도 하고, 노출 중독이 아닐까 의심을 사던 탱크톱 패션 대신 가릴 건 가리자는 스타일로 방향을 선회했다. 캐리는 강박처럼 매달렸던 빅과 너무도 완벽하지만 떠나보내고 만 에이단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을까, 조금 절망한다. 곡절많은 이혼을 거치면서 결혼에 대한 꿈이 송두리째 박살난 샬롯은 더이상 나이 먹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녀에게 서른여섯 번째 생일은 결코 축하해선 안 되는, 서른다섯 번째 생일의 속편에 불과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마라톤 완주에 도전하던 날씬한 미란다가 어마어마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애엄마가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미란다가 뚱뚱하다는 이유로 카지노에서 모욕을 당하던 날, 네 친구는 다시 한번 뭉치지만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냉큼 흩어진다.

이것은 성장일까, 퇴락일까. <섹스 & 시티>는 나이나 외모처럼 여자에게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가 남자에겐 그렇지 않다는 투덜거림을 반복한다. 나이먹어서 주름이 늘고, 아무도 찾지 않게 될 거라는 건 대부분 독신여성들이 가지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나이든 캐리의 편집장은 그녀 앞에서 팬티만 입을 수 있지만, 캐리는 벌써부터 몸을 드러내기가 싫은 것이다. 그러나 변해가는 캐리의 질문은 여전히 여자들의 문제에 정면으로 파고든다. 다만 그 질문을 던져야 할 관객의 나이가 캐리와 함께 40이라는 무서운 숫자로 다가가는 것뿐이다. <섹스 & 시티>가 여섯 번째 시즌에서 막을 내리리라는 소문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 이상은 캐리도, 사만다도, 미란다와 샬롯도, 우리 모두도 마주하기 힘든 나이다. 그러나 서른 초입에서 출발한 <섹스 & 시티> 대신 관객은 언젠가 마흔에서, 쉰에서 출발하는 인물들과 나란히 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섹스 & 시티>는 여자들에게 비아그라 먹고 섹스하는 법을 가르쳤고, 여자들도 포르노 속 판타지를 현실로 실험해볼 수 있다는 파격을 가르쳤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향해 무언가 질문하는 방식을 가르친 시리즈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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