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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1]

이 감독, 정말 헷갈리게 하는 군

<패왕별희>의 첸카이거가 <투게더>로 돌아왔다. 한국영화 제작문제로 재작년에 잠시 방한한 적이 있을 뿐, 그는 실패한 <풍월> 이후 7년 동안 한국 관객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세계의 관객의 뇌리에서도 조금씩 잊혀져갔다. 장이모는 그나마 간혹 대중적 성공이라도 거뒀지만, 동세대인 그는 제대로 거론조초 되지않았다. 그는 그래도 괜찮을만큼 조락한 감독인가? <투게더>는 헷갈리는 영화다. 퇴행과 부활의 가능성 모두를 품고 있다.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근작들을 다시 훑어보며, 미완의 첸카이거론을 다시 쓴다. - 편집자

첸카이거가 찍은 <황토지>는 내 고향과 비슷했고,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왜 그렇게 감동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결심했다. “영화를 찍을거야, 딴 건 필요없어.” -<지아장커, 중국영화의 미래 중에서>-

첸카이거는 올해 <북경 바이올린>을 만들고 난 다음, 중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남방주말>이라는 신문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자기 생각에는 이 영화가 중국 내에서는 흥행에 성공한 것 같고, 게다가 120만달러에 미국에 팔렸다고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험영화를 찍는다는 것, 예술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관객에게 아주 이기적인 행위이다.” 그 말은 15년 전 <황토지>를 만든 자신이 이기적인 행위를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아장커, <씨네21> 380호, 인터뷰 중에서-

<패왕별희> 영광 끝, 조락 시작

지아장커를 감동시킨 첸카이거와 지아장커를 배신한 첸카이거 중 과연 무엇이 그의 진실에 가까울까? 중요한 건 그 말을 한 사람이 지아장커라는 점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첸카이거의 영화궤적을 따라가다보면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는 데 있다. 영화감독에게 부여되는 본질적인 소명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럴 수도 있다. 홍상수에게 메스를 버리고 깃발을 들라고 요구하는 만큼의 멍청한 억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더이상 <황토지>에서처럼 역사를 다루지 않느냐고 첸카이거를 비난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 첸카이거가 처한 모순은 그가 더이상 역사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것은 아니다.

<투게더>

그의 영화 <황토지>가 1985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은표범상을 수상하며 첸카이거는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2년 뒤 <황토지>의 촬영감독이었던 장이모는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받았다. 죽은 것으로 치부되었던 중국영화의 부활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중국 제5세대는 아시아영화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일찌감치 장이모가 비난과 찬양의 혼란스러운 대상이었던 것과 달리 첸카이거는 일정하게 믿음의 신봉자들을 거느렸다. 그러나 첸카이거에 관한 논란의 여지는 그가 <패왕별희>로 칸의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나 실망스런 <풍월>의 실족이 5세대 몰락의 신호처럼 받아들여졌고, 이후 그의 작품은 비평적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한데다 그나마 국내엔 소개조차 되지 않아, 첸카이거는 어이없게도 과거의 감독으로만 기억됐다. 그러다, <투게더>가 왔다. 논란은 부활했다.

그동안 첸카이거에게 가해진 비판의 요지는 두 가지였다. 오리엔탈리즘과 형식주의. 첸카이거가 국제영화제용 영화를 만든다는 비판은 귀에 못이 박힐 만큼 지겹게 들려왔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해왔다. 또한 그의 형식주의는 <풍월>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신작 <투게더>에서 첸카이거는 그 둘 모두의 비판을 비켜간다. 적어도 텍스트 내에서만큼은. <투게더>는 오리엔탈리즘을 이용해먹을 만큼 거대한 역사적 소재가 아니다. 또한, 형식적으로도 소박하다. 그동안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아온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최근에 만든 영화들 중 형식주의 영향이 과연 있었는가? 오히려 거기에 얽매여 있는 것은 <영웅>이 아닌가? <투게더>가 형식주의 영화인가?”라며 반문했다. 이 반론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일국주의와 패권주의를 스타일화한 장이모의 <영웅>이 있다고 하여, 자신의 영화 <투게더>가 치켜세워 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첸카이거는 지금 <황제와 암살자> <킬링 미 소프틀리>를 돌아서 중국의 현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이것이 <투게더>와 첸카이거가 처한 모순의 관건이다.

처음부터 첸카이거를 정치적인 영화감독으로 추동시킨 건 그의 영화가 아니라 중국사회였고, 중국 정부였다. 문화혁명의 획일주의에 고통을 겪으면서, 끊임없는 검열의 억압을 견디면서 첸카이거는 저항하기보다 성찰했다. 그 성찰의 방식을 미학적으로 알레고리화했다. <황토지>는 상징적 독법으로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서구에서 <황토지>는 한 중국 감독의 정치적 토로이기보다 아시아의 미학적 발견으로 먼저 인식되었던 것이다. <황토지>에서 첸카이거는 민요를 수집하는 팔로군 병사의 눈을 통해 중국 대지와 그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과의 관계를 질문했다. 문화혁명을 겪었던 획일화의 자전적 경험을 투영하며 과거 속에서 희망을 모색했다. 시대가 인간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지를 황토의 대지 위에서 걱정했다. 그리고 <대열병>을 만들었다. 1984년 10월1일. 덩샤오핑의 위세를 상징하는 퍼레이드를 위해 젊은 병사들이 소집된다. 첸카이거는 단 몇 발짝의 퍼레이드를 위해서 몇달간을 훈련받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과연 이것이 인민을 위한 혁명정신인가를 되물었다. 미학적으로는 <황토지>보다 덜 독창적이지만 획일주의에 대한 첸카이거의 반영적 근심만큼은 더욱더 알레고리화되어갔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횡대와 종대 속에 끼어 있는 젊은 병사들은 황폐화되어가는 인성에 대한 편린들 그 자체였다. <아이들의 왕>에서 문화혁명의 시행을 따라 시골 학교로 하방된 젊은 교사는 “이제는 아무것도 베끼지 말아라. 사전도”라는 글을 남겨두고 다시 떠나간다. 학교에 단 한권밖에 없는 사전을 베끼지 말 것. 개개인의 창조적 이해를 믿을 것. 아마도 이건 첸카이거 스스로가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다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청의 소설을 영화화한 <아이들의 왕>을 만들었을 때까지 그 누구도 첸카이거를 의심하지 않았다. 세편의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민족적 알레고리가 서구의 이목을 이끌어내기 위한 마케팅용 오리엔탈리즘과 만나기 이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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