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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실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나다 [3]
이다혜 2003-03-28

문화정책은 시장에서 배제되는 중요한 가치들을 보존하는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극장에 걸리기 힘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는 정책적 지원으로 제작되고 상영된다. 민간 자율이라는 건 결국 시장의 힘에 전적으로 맡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지 않나.

→ 시장에 맡기겠다는 게 아니다. 민간이 갖고 있는 자발성과 창조성에 의존한다는 거다. 예컨대, 영화진흥위원회는 현장과 직접 맞닿은 사람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기구다. 책상에서 만들어지는 정책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제안되는 정책이 훨씬 더 존중돼야 한다. 처음부터 최상의 제안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시행착오의 과정이 문화적 힘을 향상시킬 거라고 믿는다. 공적인 조직이 그 방향으로 가는 데는 분명히 충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지난 대선, 반전시위, 촛불시위 속에는 분명히 무언가 새로운 게 있다. 그것의 정체를 몇 마디로 단정짓긴 힘들지만, 분명히 새로운 문화적 힘이 싹트고 있다. 난 그걸 믿는다. 그 새로운 문화에 형식을 부여하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껏 문화부의 영화정책은 아무래도 문화산업론이 우세했다. 확실히 변화는 있겠다.

→ 인사말에도 밝혀두었지만, 나는 돈이 안 되는 문화분야는 지원하고, 돈이 되는 분화분야는 육성한다는 분리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화는 거대한 유기체다. 이 유기체에 피가 제대로 돌게 하는 게 우선이다. 나는 그 피가 창의성과 자율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좀 구체적인 사안 한 가지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CJS연합(한국 영화계의 양대 메이저인 CJ엔터테인먼트와 시네마서비스의 연합) 시도는 어떻게 보는가. 몇몇 시민단체는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공정거래위 제소까지 검토하고 있다.

→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몇개의 메이저가 서로 경쟁하는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방향으로 가진 않고 있어서 일단 염려는 된다. 효과에 대해선 좀더 지켜봐야 할 테고, 공정거래 위반 여부는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문제다.

느리고 의뭉스럽게 한 발자국씩 전진

------이창동 장관은 말이 느리다. 그건 여전하다. 약속된 한 시간은 어어 하는 동안에 가버렸다.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곧이어 저녁식사 겸 회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관 취임하면서 공익근무하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공익근무는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 2년은 안 넘었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밝힌 장관의 최소 임기가 2년이다.

잠은 충분히 자는가.

→ 못 잔다. 그게 제일 큰 고통이다. 아침 7시 전에 나오는 게 제일 적응하기 어렵다. 나도 새벽부터 영화 찍는 일은 몇번 해봤지만, 매일 7시 출근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역시 가장 단순한 게 가장 어렵다.

술도 못 마시겠다.

→ 출근시간이 부담돼서 못 마신다. 휴일에도 참가해야 하는 크고 작은 행사 때문에 못 자니까 힘들다.

당분간 인사동에서 마주칠 일은 없겠다.

→ 당장은 아니지만, 약간 틀이 잡히고 나면 현장엔 자주 나갈 생각이다. 큰 행사에 가겠다는 게 아니라 극장이나 공연장 다니는 건 틈나는 대로 할 생각이다.

(약속장소로 가려는 장관을 비서가 다시 붙들었다. 차관이 보고할 사항이 있다고 했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된 일과가 12시간이 지나도 끝날 줄 모른다. 거의 매일 그렇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게으른 사람이라고 몇번 말했었는데, 게으름의 즐거움은 이제 사라졌을 것이다. 게으름을 포기한 대가로 그가 얻는 게 뭘까? 영화만큼 감동적인 정책? 지금은 기다리는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글 허문영 moon8@hani.co.kr ·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 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이창동 장관의 첫 인사말

(아래 글은 별도의 취임식을 하지 않은 이창동 장관이 홈페이지에 직원들에게 띄운 첫 인사말 중 일부이다. 이창동 방식과 노선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보여 여기 옮겼다.)

제목:“문화의 비단옷으로 갈아입자”

(전략)

장관실 앞에만 깔려 있는 붉은 카펫, 장관이 나타나면 부동자세로 서 있는 직원들, 행정고시를 통과한 사무관 비서가 꼬박꼬박 장관의 차 문을 대신 열어주는 것, 장관에게 누구나 허리를 90도로 꺾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좀 실례되는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조폭문화’를 연상했습니다. ‘조폭’이란 조직의 특징은 그것이 일반사회와 격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격리되어 있으므로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그래서 곧잘 영화나 드라마에서 흥미롭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행정문화 속에 이런 권위주의적인 독특한 문화와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행정부와 일반국민과의 거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께 우리 문화관광부에서부터 과감히 이런 권위주의적 관습과 문화를 버리자고 권합니다. 장관이라는 직위에 걸맞은 권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자연스런 예의를 표시하는 것과 권위주의적인 형식을 통해 장관을 대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무원이므로 반드시 넥타이와 양복을 매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공무원으로서의 품위와 도덕적 엄격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 또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영화감독으로서 해외를 다니며 그 나라 문화부 공직자들을 더러 만나보았지만 그 누구도 복장에서부터 ‘공무원 냄새’를 피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복장이 자유로운 만큼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자유롭고 유연했습니다. 그런데도 21세기의 언필칭 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린 장관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느냐 어쩌냐가 신문 방송의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권위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진정한 토론,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지리라 믿을 수는 없습니다.문화예술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문화예술인이 되어야 합니다. 체육행정과 관광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직의 의무 속에 갇혀 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권위주의의 두꺼운 철갑옷을 벗어던지고 부드러운 문화의 비단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문화관광부가 국민들에게 ‘문화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꿈을 부여하는지’ 안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에 우리 문화관광부의 위상이 자리매김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함께, 감동이 살아 있는 문화행정을 펼쳐나갈 것을 약속하면서 두서없는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3월13일 오후 이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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