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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 The 75th Annual Academy Award [1]
김혜리 2003-04-04

반전(反戰)과 반전(反轉), 어두웠던 파티장

전쟁과 쇼 사이에서 갈등했던 75회 오스카, 작품상은 <시카고>

몇몇 스타들이 이라크 전쟁을 이유로 불참할 것을 밝혔을 때, 이번 오스카에서 반전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터져 나올 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지상 최대의 쇼'는, 세계 최고의 각본 없는 드라마답게 또 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75회 아카데미 영화상 주요 부문 수상 결과

작품상 <시카고>(미라맥스 제작) | 감독상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 여우주연상 니콜 키드먼 <디 아워스> | 남우주연상 에이드리언 브로디 <피아니스트> | 여우조연상 캐서린 제타 존스 <시카고> | 남우조연상 크리스 쿠퍼 <어댑테이션> | 각본상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 촬영상 콘래드 L. 홀 <로드 투 퍼디션> | 각색상 로널드 하우드 <피아니스트> | 의상상 콜린 애트우드 <시카고> | 미술상 존 마이어 외 <시카고> | 음악상 엘리엇 골든살 <프리다> | 주제가상 에미넴 외 <Lose Yourself>(<8마일>) | 장편애니메이션상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외국어영화상 <노웨어 인 아프리카>(독일) | 장편다큐멘터리상 <볼링 포 콜럼바인>

"이 상황에서 오스카에 참석하는 이유는, 예술과 우리일의 가치를 믿기 떄문입니다" 라고 울먹이며 수상소감을 밝힌 니콜 키드먼.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한 가장 기괴한 오스카 쇼였다. 입구의 주단길을 없애는 결단은 차마 내리지 못하고 레드 카펫 대신 깔아놓은 양탄자의 어정쩡한 자주색이, 더없이 불운한 해에 75주년 다이아몬드 기념식을 맞은 아카데미영화상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란함을 대변했다. TV 중계 화면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현지 언론은 코닥극장 앞에서 폭동진압용 무장을 한 경찰들과 “묵시록은 노!”(Apocalypse No!), “내겐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 등 영화를 인용한 반전 슬로건을 외치는 시위대가 신경전을 벌였다고 전했다. 수상소감에 주어진 시간을 현명하게 써달라고 스타들에게 호소하던 반전시위자 가운데 열두명은 결국 연행됐다.

지난 3월23일 일요일 저녁(현지시각) 제75회 오스카 시상식이 열린 LA 코닥극장에는 피투성이 유령이 보일 듯 말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고심 끝에 숙연한 검정 드레스로 갈아입은, 또는 애초의 화려한 가운을 고수한 스타들은 그 유령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할지 외면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했다.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의 봄과 축제를 망쳐놓은 탐욕의 전쟁은, 엔터테인먼트의 신이 허락한 자기도취의 향연 오스카 시상식에도 어김없이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이로써 부시 정부는 세상의 모든 잔치에 재를 뿌리는 데 성공했다). 오스카에 앞서 개최된 인디펜던트 스피릿 영화상에 참석한 한 영화인의 말은 대다수 할리우드 사람들의 심경을 요약한 코멘트로 들린다. “한쪽에서 폭격이 이루어지는데 나의 일상은 계속된다는 사실이 괴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위해 평생 일해왔다. 왜 내가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이 저지른 일로 내가 희생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올해의 오스카는, 스타다운 매혹적인 동시에 사려깊게 보일 수 있는 표정을 궁리하고 수백만달러짜리 보석을 천박하지 않게, 검은 의상을 섹시하게 걸칠 방법을 고민한 게스트들의 머릿속처럼 뒤숭숭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시상식 프로듀서 길 케이츠는 무대 위의 스펙터클을 최소화하고 오스카의 유구한 역사, 할리우드영화가 ‘미국 정신’에 끼친 영향을 브리핑하는 스타일로 행사를 간소화했다. 대부분의 게스트들이 전쟁에 대한 감정을 공식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긴장해 있는 가운데, 수상 결과마저 예상을 뒤엎는 경우가 속출하자 시상식은 흥분한 수상자들이 폭발시키는 감정이 예년보다 무미건조한 쇼를 이따금 뒤흔들어놓는 불규칙한 리듬으로 진행됐다.

서프라이즈 파티, 주인공은 <피아니스트>

남우주연상을 받은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예상치 못한 수상에 지나치게 감격한 듯.

한해 오스카의 결과에서 너무 깊은 의미나 장기적인 트렌드를 읽어내려고 하는 시도는 헛된 수고가 되기 일쑤다. 하지만 쇼 비즈니스와 예술은 어떤 환난이 있어도 면면히 계속된다고 웅변한 <시카고>와 <피아니스트>가 올해 아카데미의 승리자였다는 점은 저널리스트들을 심심치 않게 만든 절묘한 우연이다. 13개의 노미네이션을 따냈던 <시카고>는 작품, 여우조연, 편집, 미술, 사운드, 의상상 6개 부문을 석권해 5할의 타율을 올렸다. 뮤지컬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것도 1969년 <올리버!> 이후 34년 만의 희귀한 일. <가디언>의 평론가 존 브룩스는 도피적 쾌락의 장르를 부활시킨 <시카고>가 맨해튼의 신경증(<디 아워스>), 미국의 폭력적 기원(<갱스 오브 뉴욕>), 홀로코스트드라마(<피아니스트>), 선악의 대결(<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을 그린 경쟁자들을 누르고 작품상 트로피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총 40개의 노미네이션을 휩쓸어 ‘올해 오스카는 미라맥스 대 미라맥스의 싸움’이라는 말까지 퍼뜨렸던 미라맥스는 단독 제작한 영화로 9개, 공동제작한 <디 아워스>까지 포함하면 10개의 상을 수확했다. 하비 웨인스타인이 제작 지휘로 이름을 올린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도 시각효과와 사운드편집 2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올해 오스카를 서프라이즈 파티로 만든 주역은 <피아니스트>였다. 남우주연상 후보 다섯명 가운데 유일하게 수상 경력이 전무했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고 로널드 하우드가 <어댑테이션> <디 아워스> 같은 쟁쟁한 라이벌을 제치고 각색상을 차지했다. 로널드 하우드가 돌린 영예로 그 몫의 오스카 명예는 총족시킨 줄만 알았던 로만 폴란스키는 최대의 이변을 일으켰다. 아카데미영화상을 음모론적 입장으로 바라보지 않는 구경꾼들조차 오스카 감독상이 홍보는커녕 시상식에 참석도 못한 ‘지명수배자’(폴란스키는 1977년 연소자 강간혐의를 받고 유럽으로 도피했다)에게 돌아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미국 사법부의 입장이야 어떻건 적어도 미국 영화계는 로만 폴란스키에게 언제든지 포용할 뜻이 있다는 인사를 전달했다.

로만 폴란스키가 호명되자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기립박수를 주도한 <갱스 오브 뉴욕>의 마틴 스코시즈는 75회 오스카에서 가장 안타까운 패장이었다. 그는 네 번째 감독상 도전에 실패했지만 그보다 10개 부문에서 후보 지명을 따냈던 필생의 역작 <갱스 오브 뉴욕>이 단 한개의 트로피도 없이 빈손으로 퇴장한 사실이 상처에 소금을 뿌렸을 법하다. 이는 <칼라 퍼플>이 감독상을 뺀 거의 모든 부문에 후보로 올라 한 차례 상심하고, 결국 한개의 상도 못 받아서 또 한번 이를 악물었던 스필버그의 괴로운 추억에 비할 만한 재난이다. <갱스 오브 뉴욕>의 패퇴에 대해 가장 납득할 만한 설명은, 미라맥스의 게걸스러운 오스카 캠페인이 역효과를 냈다는 가설이다. 수년간 “마티에게 꼭 오스카 수상작을 만들어주겠다”고 별렀다며 공언했던 하비 웨인스타인의 미라맥스는 전 아카데미 회장 로버트 와이즈가 스코시즈를 예찬하는 칼럼을 다시 인용하는 무리한 광고를 냈다가 물의를 빚고 철회하는 소동까지 빚은 바 있다.

2003 오스카 무대 밖 목소리들낮은 목소리 혹은 침묵의 반전 메시지

마이크를 잡을 기회를 얻지 못한 게스트, 무대 뒤 프레스 룸으로 입장한 수상자, 초청장을 거절한 스타들은 TV 중계 카메라의 시야 밖에서 신중한 음성으로 또는 침묵으로 할리우드 최고의 축제일에도 그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발언했다. 항의 표시로 불참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미 정부가 철면피한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를 준비하고 있는 때에 오스카 잔치에 참가할 수 없다”고 아카데미에 단호한 서한을 보냈다. 논란의 주인공 마이클 무어는 기자들에게 “장내 분위기가 분열됐다고 기사쓰지 말라. 야유한 사람들은 다 내 친구와 가족이다. 할리우드에 결핍된 다양성을 보여주고 싶어 내가 일부러 시켰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의 골룸 연기를 한 앤디 서키스는 식장 입구에서 ‘석유를 위한 전쟁 반대’라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불참한 윌 스미스의 대변인은 “그는 현재 오스카 참석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어떤 선언이 아니라 그저 참석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고 애써 온건한 표현을 찾았다. 역대 수상자 무대에만 모습을 보인 톰 행크스의 행동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지고 있다.

평생공로상을 받은 배우 피터 오툴은 “민간인들이 일상을 계속할 수 없다면 군인들이 싸우는 목적이 어디 있나?”라고 반문해 오스카 시상식의 강행을 옹호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전쟁을 지지한 스페인 정부가 부끄럽다고 밝혔고, 주제가상 시상에 나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멘트를 수정해 “예술인을 포함한 모든 시민이 신념을 말하고 노래할 권리를 보장하는 나라에 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마틴 스트랜지-한센(실사 단편부문 수상자)은 “(전쟁을 지지한) 덴마크 정부를 비판하는 소감도 생각했지만, 내가 속한 부문과 내가 누구인지 돌이켜보고 포기했다. 내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소심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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