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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4]

<사랑은 트럭을 타고>(Because There’s You)

감독 조이스 버날/ 필리핀/ 1999년/ 117분/ 아시아 특별전

프로그래머 추천사 _

달라진 필리핀 여성들의 사랑, 결혼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영화

주로 ‘내수용’으로 제작되고 유통됐던 이방의 영화들을 만나는 건 낯설지만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특징들이 만들어낸 여성 이슈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영화화해내고 있으며 대중적 성공도 거두고 있다”는 필리핀 여성영화라면, 그 의미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중 로맨틱코미디 <사랑은 트럭을 타고>는 만듦새와 이야기 자체의 새로움은 거의 없으나, 스테레오타입화된 여성 이미지와 가족의 개념을 뒤집어 보이려는 시도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필리핀 여성영화계의 기대주라는 조이스 버날 감독의 작품.

누군가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고 했다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선 그 표현이 은유가 아니라 직설이다. 명문가 규수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성공한 청년 사업가 앤드류는 출근길에서 접촉사고를 낸 뒤로, 피해 차량의 운전자인 왈가닥 처녀 안야의 협박에 시달린다. 스크루볼코미디의 리듬으로, 밀고 당기고 치고 받는 사이 둘 사이엔 야릇한 감정이 싹튼다. 배경도 성격도 취향도 판이하게 다른 남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함께하길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날 뭘 보고 좋아하는 거예요?” “당신의 어떤 점이 좋냐구? 그 손톱. 더러운 손톱. 함부로 내 음식을 덜어가는 버르장머리. 그리고 당신의 가족. 완전 비정상인 당신 가족을 좋아해.”

백마 탄 왕자 앤드류를 사로잡았듯, 관객에게도 가장 흥미롭게 다가갈 부분은 안야가 나고 자란 ‘여인 천하’ 집안. 저마다 자유 연애주의자들인 이들은 안야에게 ‘가슴의 소리를 들으라’고 가르친다. 평생 5명(!)의 진실한 사랑이 있었음을 두고두고 추억하는 할머니, 아버지가 다른 두딸을 낳고도 새 애인과의 사이에서 아기를 기대하고 있는 어머니는, “남자들은 우리 가족을 버렸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안야와 달리,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아시아 여성의 좀더 개방적이고 유연해진 사고를 반영하는 작품이다.

가솔린(Gasoline)

감독 모니카 스탬브리니/ 이탈리아/ 2002년/ 90분/ 새로운 물결

프로그래머 추천사 _

<델마와 루이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레즈비언스릴러

레니와 스텔라는 주유소에서 함께 일하는 연인이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레니의 엄마가 집나간 딸을 찾으러 온 날, 스텔라는 실수로 그녀를 살해한다. 황급히 주유소 문을 닫아건 두 소녀는 시체를 실은 자동차를 몰고 도주를 시작한다. 그들은 엄마 지갑에서 찾아낸 200만리라로 새 인생을 꿈꾸지만, 스텔라에게 모욕당한 난폭한 젊은이들이 복수와 돈을 노리고 소녀들을 뒤쫓는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 처음으로 극영화 <가솔린>을 찍은 모니카 스탬브리니는 “처음 원작을 읽었을 때, 플롯을 가진 이야기라기보단 여성이 사물에 반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죽은 뒤에도 레니를 괴롭히는 엄마의 권위적인 목소리나 레니와 스텔라 사이에 오고가는 섬세한 사랑의 기운은 감독이 가졌던 첫인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감정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가솔린>은 여성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스펙트럼 속에선 보기 드물게 액션과 스릴러를 배합한 상업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블러드 심플>처럼 되기를 원했다는 스탬브리니는 의도하지 않은 살인에 휘말린 인물들의 당혹과 그들이 치닫는 파국을 원형의 짧은 여정 위에 탄탄하게 누벼냈다.

<가솔린>의 프로듀서는 이 영화에 좀더 과격한 섹스신을 넣기를 원했다고 한다. 아마도 동성애를 담았기 때문에 논란과 저항을 부를 수밖에 없을 이 영화가 약간의 관객이라도 더 모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놀랍게도 <가솔린>은 무법자 같은 남성들의 폭력과 스스로를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여성들의 굳건한 의지가 충돌한다는 인상이 더 컸던 탓인지, 이탈리아에서 전체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애정성시(Let’s Love Hong Kong)

감독 야우칭/ 홍콩/ 2002년/ 87분/ 새로운 물결

프로그래머 추천사 _

가상공간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 된 홍콩에서 펼쳐지는 여성들간의 욕망의 추격전

<애정성시>는 레즈비언이 연출한 홍콩의 첫 번째 레즈비언영화다. 중국 어느 도시보다도 게이바와 사우나가 많다는 홍콩이지만, <해피투게더> <란위> 같은 게이영화와 달리 레즈비언영화는 단 한번도 메인스트림 부근에 다가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애정성시>는 제작됐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주목받은 영화였다. 무보수로 자원한 배우와 스탭들과 함께 3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영화의 원제는 ‘움직이는’(好郁). 가까운 미래 홍콩에서 한없이 헤매는 세 여자를 기록하고 있는 탓이다.

뉴욕과 런던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비디오 아티스트 야우칭은 집 한칸 장만하기가 너무 어려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돌 수밖에 없는 홍콩에서 서로를 원하는 세 여자의 모습을 잡아냈다. 챈 곽 챈, 영어로 풀면 MADE IN CHINA 챈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포르노 사이트 ‘Let’s Love’ 댄서로 일한다. 광고회사 중역 니콜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지만 진정한 쾌락을 얻는 순간은 챈의 동영상을 보며 자위할 때뿐이다. 극장 비슷한 공간에서 웅크리고 사는 제로는 노점과 휴대폰 세일즈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한다.

야우칭은 차이밍량을 모범으로 삼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주위를 맴돌지만 소통하진 못하는 여인들과 알지 못하는 사이 스쳐가는 인연은 차이밍량의 영화와 닮은 부분. 그러나 챈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애정성시>는 97년 중국의 일부가 된 홍콩의 이야기다. 이국적인 매력을 잃고 퇴락해가는 이 도시가 자꾸 밀려나기만 하는 레즈비언들의 고독과 겹치는 것이다. 이렇게 성(性)과 공간의 정체성을 한꺼번에 녹여낸 <애정성시>는 영어제목 그대로 홍콩이라는 도시 자체의 문제와 접점을 찾는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그녀들만의 것(It’s a She-Thing)

감독 수잔 오프터링거/ 독일/ 2000년/ 54분20초/ 딥포커스

프로그래머 추천사 _

동시대의 가장 전복적이고 도전적인 여성 예술이란 이런 것

“나쁜 여자(Bad Girl) 소리를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많은 용기가 필요하죠.” 각자 독일어와 영어, 불어로 말하는 이 여자들의 입술은 ‘Bad Girl’을 말하는 순간 똑같은 모양으로 겹쳐진다. 자기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혹은 남자들이 금지하는 주제를 함부로 영상으로 남기기 때문에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자유로운 예술가들. <그녀들만의 것>은 다른 국적과 다른 매체를 가진 여성 아티스트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작품을 삽입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독일 출신의 팝스타이자 앤디 워홀 그룹의 일원이었던 슈퍼모델 니코의 삶을 다룬 <니코 아이콘>으로 명성을 얻은 수잔 오프터링거는 다시 한번 몰이해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카메라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번엔 파멸보다 연대로 나아간다.

펑크 록 공연으로 시작하는 <그녀들만의 것>은 여성의 신체에 휘갈긴 오프닝 크레딧을 거쳐 곧바로 이번 여성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픽켈포르노>의 영상으로 이어진다. 흑백 신체 위에 찬란한 원색 사물을 아로새기는 이 영화의 감독 피필로티 리스트는 “다들 포르노가 옳지 못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에로틱한 이미지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뒤를 잇는 아티스트들은 모두 짧은 인생을 불평과 자괴감으로 낭비하기보다 욕먹더라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길을 택한 여성들이다. 역시 여성영화제 상영작 목록에 올라 있는 젊은 비디오 아티스트 사디 베닝, 아홉 차례 성형수술을 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신체의 조건에 반역을 시도한 성형수술 아티스트 오를랑, 스스로의 삶을 성취한 오노 요코 등이 그들. 뮤지션 캐슬린 한나가 오노 요코를 향한 애정을 고백하는 마지막, 각기 다른 대륙에 떨어져 있던 이 여자들은 하나의 끈으로 묶여진다. 감독이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녀들만의 것>은 결국 하나의 목소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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