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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3]

<안느 트리스테>(Anne Trister)

감독 레아 풀/ 캐나다/ 1986년/ 103분/ 감독 특별전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이미지로 말한다. 어머니와의 유대를 통한 새로운 여성의 역사 쓰기

침대에 모로 누워 훌쩍이는 여자의 등. 모래 바람이 이는 황량한 사막. 침묵하는 이 두 가지 이미지가 <안느 트리스테>를 열고 닫는다. 다시 침대에서 눈물을 삼키기까지, 다시 사막을 보기까지, 안느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스위스에서 캐나다로 떠나온 안느는 우연히 아동심리학자인 알릭스를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지혜롭고 여유로운 알릭스에게 의지하게 된 안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느낀다. 알릭스는 ‘그런 식의 사랑’은 줄 수 없다면서도 안느를 변함없이 아끼고 보살핀다. 안느 또한 “날 사랑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며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충직한 남자친구를 떠나 보내고, 알릭스의 남자친구에게 모욕을 당하고, 오래 공들인 설치미술 작품이 철거당하지만, 그렇게 많은 소중한 것들과 이별을 하지만, 안느의 곁엔 알릭스가 남았고, 안느는 비로소 홀로 서게 된다.

심리적, 물리적 망명의 길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년 여인의 성장기 <안느 트리스테>는 단순히 늦깎이 레즈비언의 ‘커밍아웃’ 스토리가 아니다. 안느의 혼란과 고민 속에 성 정체성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탐문은 ‘완료’가 아닌 ‘진행형’ 시제를 취하고 있다. 안느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어딘가를 배회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게 한다. 알릭스에 대한 안느의 사랑도, 연인을 향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복잡하고 심오하다. 알릭스는 안느에게도, 알릭스의 고객 사라에게도, 모성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고 또 채워준 존재다. “나는 가족이 없어요. 그래서 모든 일을 망쳐요. 내 엄마가 돼줄래요?” 사라는 이렇게 말했고, 안느는 이렇게 행동했다. 그들 모두에게 이상적인 어머니였던 알릭스가 기꺼이 꾸려간 ‘유사 가족’은, ‘여성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디 베닝 특별전

<단조로운 삶>/ Flat is Beautiful/ 1998년/ 50분

<쥬디 이야기>/ The Judy Spots/ 1995년/ 15분

<걸 파워>/ Girlpower/ 1992년/ 15분

<소녀 마케팅>/ Aerobidide/ 1999년/ 4분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이상한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언젠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13살 시골 소녀가 영화를 만드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도래를 환영한 바 있다. 그 예언을 실현해 보이겠다는 듯 사디 베닝이 나타났다. 사디 베닝은 열다섯살에 선물받은 어린이용 홈비디오 카메라로 일기 쓰듯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기록했다. 비디오아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리라는 야심이나 기대를 품고 시작한 일은, 물론 아니었다.

북미 인디영화계에 ‘픽셀 비전’ 붐을 일으켰던 사디 베닝의 최근작 <단조로운 삶>은 미학적 실험과 초저예산 여성주의 영화제작의 모범이 될 만한 작품. 밀워키 노동계급 가정의 소녀 타일러는 예술에 빠져 사는 아빠와 헤어져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와 강퍅하게 살고 있다. 타일러는 커서 멋진 남자가 되는 게 소원인 양성 소녀로, 무료하게 텔레비젼을 보거나 게이인 위층 아저씨와 어울리는 게 낙이다. 종이에 이목구비를 쓱쓱 그려넣은 커다란 가면을 쓴 배우들은 어색하게 과장된 연기로 일관하고, 거친 화소의 흑백화면은 작은 박스처럼 포맷팅돼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이 형식적 실험은 영화스토리는 물론 주제와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정상적이라는 것, 아름답다는 것에 ‘절대 기준’이 존재하는 한, 이들- 양성 소녀, 싱글 맘, 게이- 의 일상은 소외와 고독과 좌절과 밀실 공포의 ‘단조로운’ 반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디 베닝 특별전은 이 밖에도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성찰을 글과 그림과 독백에 실어낸 단편 실험영화 <걸파워>와 5개 주제로 사회와 여성의 관계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 단편애니메이션 <쥬디 이야기>,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전략에 대한 비판을 담은 뮤직비디오 <소녀 마케팅> 등으로 사디 베닝의 활동 궤적을 훑고 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태동과 함께 카메라를 잡았던 소녀는 이제 서른살의 여인이 됐고,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되는 테크놀로지에 종속되고 싶지 않다”며 잠시 영화를 떠나 있다. 기이한 아이러니다.

<분노를 터뜨려라!: 트라이브 8밴드에 관한 다큐멘터리>(Rise Above: The Tribe 8 Documentary)

감독 트레이스 플레니건/ 미국/ 2002년/ 80분/ 여성영상공동체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여성 록가수로 살아남기 위해,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 밴드 이야기

“무서워요. 적응이 안 되네요. 그들에게도 도덕 관념이란 게 있는지, 의문이네요.” 남자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모아 말한다. 여자 관객도 크게 즐긴 기색은 아니다. “음악은 정말 형편없어요. 그런데 공연이 흥미롭긴 하네요.” 여성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펑크록 밴드 ‘트라이브 8’의 공연 관람 소감이다. 이들의 공연엔 일정한 레퍼토리가 있다. 우선 멤버 대부분이 토플리스로 무대에 등장한다. 남성용 트렁크 차림의 리드 싱어는 그 속에서 거대한 인조 남성 성기를 꺼내 보인다. 그리고 스트레이트한 남성 관객을 무대로 끌어올려 머리채를 잡고 무릎을 꿇려 그 물건에 대고 오럴섹스를 하게 한다. 사도마조히즘적 성행위를 연상케하는 퍼포먼스가 줄줄이 곁들여진다. 노래 가사와 무대 매너도 이와 다르지 않아, 노골적이고 무례하며 폭력적이다. 보통 상식과 취향을 가진 이들이 불편해하고 불쾌해할 만하다.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이들의 퍼포먼스에 대한 저항이 우세하다. 엄연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과도한 성폭력의 재현”이라는 이유에서다. <분노를 터뜨려라>는 트라이브 8 밴드의 공연에 크게 ‘충격’을 받은 한 여성 영상작가가 “에스트로겐의 노예가 되길 거부한” 그들의 신념을 캐내기 위해 무려 4년 동안 카메라를 돌린 결과물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트라이브 8 밴드의 공연 실황과 이에 대한 반응들, 그리고 멤버 개개인을 따라붙은 밀착 인터뷰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신념이 어떤 맥락에서 싹트게 됐는지를 차분히 따져 묻는 것. 그리고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들은 여성 뮤지션이 정형화된 성적 이미지로 어필해야 한다는, 그리고 활동 장르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자, 단지 노동계급의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비정하게 배척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임을 역설한다. “행실이 바른 여자는 역사를 만들 수 없다”는 선언과 극단적 실천에 대한 논쟁을 부추길 만한 작품.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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