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욕망의 생태학 <질투는 나의 힘> 論 [5]
이다혜 2003-04-11

여자 홍상수? 아니, 인간을 보는 눈이 달라

허문영 이 영화를 보면, 다른 인물들은 어떤 영화, 어느 소설에서라도 한번은 만났을법한 사람들이지만, 주인공인 원상은 정말 속을 알기 힘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음에 어떤 말과 행동을 하게 될지 거의 스릴러적인 긴장을 안긴다. 이런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냈는가 궁금하다.

박찬옥 나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해나가는 버릇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다 미스터리어스하게 느껴진다. 심지어는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모든 사람은 이상하다. 나부터 그런 편이고. 이상하게 엇나가고 돌출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꾸며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허문영 엇나감이나 돌출을 드러낸다 해도 어떤 기준이 작용한다. 원상의 설명하기 힘든 말과 행동은 어쨌든 감독에 의해 선택된 것들이다. 취사선택의 기준이 무언가. 홍상수 감독에게 그런 걸 물었을 때, 귀엽다, 아니다, 라는 용어를 써서 설명한 적이 있다.

박찬옥 음, 글쎄, 그냥 본능 같다. 이원상 같은 경우는 ‘저 사람 말은 이거라야 해’라고 생각했던 게 제일 많았던 것 같다.

허문영 원상에 대해 좀 다르게 말해보자. 다른 사람들에겐 가족이 있지만, 원상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족을 찾아 떠나는 여정’ 같다. 이를테면 윤식은 아버지상이고, 다른 인물들도 유사가족의 흔적 같은 게 느껴진다. 애초에 원상의 가족을 설정하지 않았던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나.

박찬옥 처음부터 가족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고 의식한 건 아니었다. 생각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더라. 나는 집을 나와서 혼자 살고 있다. 동거인이 있는데, 처음에 동거인과 나는 가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관계인 줄 알았다. 결국엔 유사가족 관계가 되더라. 혈육이 아니라도 그 사람의 상황이 나한테 정서적으로 영향을 주더라. 남자들의 관계를 보면,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애정과 신뢰와 충성의 출발은 모성결핍 혹은 부성결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딱 떨어지는건 아닌데 정말 그렇게 보여지는 대목이 이 영화에도 있을 것이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라는 대사 같은 것.

허문영 그 대사는 오히려 너무 노골적으로 부성을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대사 없이도 한윤식은 아버지상으로 느껴진다.

박찬옥 그런데 사람들이 뭘 보고 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는지 모르겠다. 나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영화에서 그렇게 느낄 거라고 예상 못했다.

허문영 남자들은 다 비슷할 텐데,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감정은 질투 혹은 공포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거나 그에게 굴종하는 길밖에 없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부인을 예비한 굴종의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느껴진다.

박찬옥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허문영 그것과 연관된 게 하나 있다. 이 영화에서 제일 충격적인 장면은 하숙집 딸 혜옥과 원상의 정사장면이다. 편집의 점핑 탓도 없진 않겠지만, 무엇보다 혜옥의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혜옥은 누이와 어머니를 바라볼 때 남자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했던 감정을 일게 한다. 늘 징징거리는 걸 보면 연민에 사로잡히면서도, 왜 더 영리하게 못살고 저렇게 못나게 바치고만 살까, 하는 답답한 느낌. 원상의 눈빛에도 그런 감정이 들어 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정사장면이 나오니까 근친상간 같은 느낌이 확 들었다. 보면서 속으로 그랬다. 저 두 사람은 저러면 안 되는데….

박찬옥 애초부터 혜옥 역은 가슴이 큰 여자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이 여자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 있는데, 편집에서 잘렸다. 유사가족이란 생각을 시나리오 쓰면서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이들의 정사를 근친상간이라고까지는 생각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내가 놀랐다. 어디서부터 그렇게 느끼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원상과 윤식의 관계도 그저 강하고 당당한자와 그렇지 못한자로 생각했지 부자관계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개념적으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허문영 그 장면에 대한 느낌은 개념적으로 이해한 뒤에 내린 분석적인 판단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박찬옥 내 옆에 앉은 관객도 그러지 마. 그러더라. (웃음)

허문영 그 장면이 충격적인 건 다른 이유도 있다. 원상은 육체적 욕망이 없는 사람 같다. 한윤식은 성연과 섹스만 하고 키스는 안 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원상은 성연과 키스만 하고 섹스를 하지 않는다. 원상의 주제는 욕망이 아니라 친밀함이다. 성적인 것과 무관한 친밀함. 그런데, 딱 이 장면에서만 육체를 드러낸다. 그래서 난데없다. 꼭 근친상간이 아니더라도 그런 느낌만으로도 충격일 수 있다. 원상을 성적 욕망이 없는 존재로 그린 건 의식적인 건가.

박찬옥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와 원상이란 인물 사이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상상이 메울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남자들을 보면 무성 같다. 억눌렸다가 곧 터질것 같은 상태의 남자들. 그런 남자들에 대한 느낌이 원상에게 스며 있을 것이다. 그게 한윤식과 다른 점이다.

허문영 이 영화에는 애매한 점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 영화는 네명의 이야기기도 한데. 결국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 끝난다는 점이다. 성연과 혜옥의 이야기는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마무리되고 원상과 윤식, 두 남자는 결합한다.

박찬옥 그게 내 예측과 달라진 점이다. 나는 원상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주변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보다. 처음 대본에는 한윤식이 끝까지 이원상의 옛 애인이 자기 애인이 된지 모르게 갔다. 그렇게 하니까 두 남자의 관계가 너무 얇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쳐서 지금처럼 됐다. 처음 구상대로 갔으면 좀 달라졌을 거다. 그리고 또 문 선배님이 연기한 폭이 큰 것도 그런 느낌을 주는 데 작용한 것 같다. 대본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져버렸다. 스타는 힘이 있지 않은가. 내가 생각했던 균형과는 다른 균형이 만들어진 것 같다.

허문영 그런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문성근 나는 이미 알려진 사람이고 해일이는 처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창동 감독이 <박하사탕> 만들 때, 명계남이나 나를 안 쓰고 모두 신인배우로 갔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우리가 튀어서 균형이 깨질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박찬옥 내 딜레마가 그거였다. 모두 신인일 경우엔 힘이 약하다. 특히 한윤식의 경우엔 연기력이 좋은 중견 연기자가 해야 하는데 무수히 많이 찾아봤지만 알려지지 않는 사람 중엔 그걸 해낼 만한 사람이 없더라.

허문영 누가 농담조로 이 영화는 집에 가면 <봄날은 간다>가 되고, 회사 가면 <생활의 발견>이 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문성근 자꾸 어떤 유형으로 묶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차이가 크든 작든 간에 예쁘게 소중하게 봐주는 게 좋은 거 아닌가.

허문영 기존의 것과 유사성을 찾아내는 게 저널리즘의 습관인 건 맞다. 특히 <질투는 나의 힘>의 경우에 그런 유혹을 많이 받는다. 홍상수적인 세팅에서 출발하지만, 다른 길을 간다. 그래서 위치설정이 애매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하고 난 다음에 이 영화를 한 배우로선 그 차이를 어떻게 느끼나.

문성근 인간을 보는 눈이 다르다.

허문영 어떻게 다른가.

박찬옥 사람을 얼마나 믿느냐의 정도 차이인가. (웃음)

문성근 홍 감독은 사람을 헤집어놔야 되지, 그런데 이 양반은 그런 게 없다.

허문영 사실 그동안 홍상수 감독과 박찬옥 감독과의 미학적 사제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말들이 많았다. 심한 경우, 여자 홍상수 같다는. 그런 유의 코멘트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

박찬옥 처음에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강도가 높아서 좀 당황했다. 사실 남들이 뭐라든 간에 <질투는 나의 힘>는 내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단편영화의 요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면(웃음), 그런 말은 자연스럽게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생각해왔던 문제의식을 내가 아는 만큼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고, 그것이 현재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알게 됐다. 지금은 홍상수 감독의 연출부였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허문영 어떤 점이 제일 감사한가.

박찬옥 홍상수 감독은 내가 미심쩍어하는 부분을, 하지만 사람들이 외면하는 부분을, 신기해하면서 포용해줬다. 예를 들어 “나는 영화의 반은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감독이 그러면 어떡해, 하는 눈빛을 보내는데, 홍상수 감독은 “나도 그래”라고 대답해주신다. 뭐 저런 이상한 말을 하나 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있게 들어주는 거다. 문성근 선배도 내가 이상한 말을 했는데, 그걸로 나를 기억해주셨듯이.

문성근 다음 구상은 없나? 단편 찍는다고 들었다.

박찬옥 찍을 수 있으면 찍고 싶다. 막상 하려고 하니까, 옛날에 어떻게 찍었나 싶다. 돈도 없었고, 사람도 부족했는데….

허문영 단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

박찬옥 언제 다시 찍어보겠냐는 생각이 든다. 상금을 써버리고 싶은 욕심이 있고.

허문영 상금 많이 받았나보다.

박찬옥 많진 않은데, 돈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스럽다. 돈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잘 없애는 방법을 찾고 있다. 사실은 규모도 크고 공적인 관계가 많은 장편을 만들고 나니까, 스탭들이 친구처럼 모여서 사적인 느낌으로 사적인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그립다.대담 허문영 moon8@hani.co.kr·정리 백은하 lucie@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