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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생태학 <질투는 나의 힘> 論 [4]

특집/질투는 나의 힘-메인

허문영 여기 오기 전에 김혜리 기자한테 박찬옥 감독에게 궁금한 점이 있는가 물어봤다. 그랬더니, 왠지 그 감독은 영화적 신념과 열정으로 충만한 쪽이라기보다 자기 영화를 자기가 보고 신기해할 사람 같다, 이런 사람은 영화를 만드는 이유도 좀 특별할 것 같다, 고 그러더라. 박 감독님 얘기를 들으니 딱 들어맞는 말이어서 신기하다. 영화를 시작한 동기가 궁금하다.

박찬옥 정말 우연히 시작했다. 20대 후반에 뭔가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른 걸 전공하려고 수능시험을 준비했다. 결국 학사 편입시험을 봤는데, 재밌을 법한 과 중에 영화과가 있었고, 공부하면서 계속 재미있었다. 컷과 컷이 붙는 것도 신기하고, 그런 게 모여 이야기가 되는 것도 신기하고…. 지금도 여전히 신기하다. 뭐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시작했다.

허문영 자기 재미를 위해서 남의 돈 20억원씩 쓰고 그래도 되나. (웃음)

박찬옥 사실, 혼자서도 이 영화가 찍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고민했는데, 아무리 해도 답이 안 나왔다. 결국 투자가 안 되면 찍을 만한 영화가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허문영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봤을 때 느낌은… 투자자가 용감하다. (웃음)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고, 섬세하지 않으면 만들겠다고 나서기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마찬가지 말인데, 참 이상한 이야기다, 라는 거였다. 사건은 별로 없고 사건의 폭은 아주 좁았다. 그 좁은 사건의 폭 안에서 감정의 섬세한 진동으로 극을 끌고 가는데 그 감정은 이상한 것이었다. 감정의 긴장은 끝까지 살아 있는데 그 감정의 정체는 아주 모호한 이야기였다. 애인을 뺏긴 청년 원상이 애인을 뺏은 중년 남자 윤식 곁에 다가가 그의 곁에 머무른다는 이야기. 얼핏 에릭 로메르 영화가 생각났지만, 로메르보다는 좀더 냉소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떠올렸나.

박찬옥 나는 통속적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윤식이 딴 여자를 끼고 호텔에 갔는데 장인한테 발견되고, 두 여자가 한꺼번에 원상을 찾아왔는데, 그날 딱 윤식의 장인은 죽고…. 그런 건 지어낸 이야기라는 티가 많이 난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 분명한테 그렇게 안 느끼시는 게 나는 좀 의아하다.

허문영 작위적인 장치가 있다 해도, 주인공은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인물 같아서 그럴 거다. 문성근 선배는 시나리오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문성근 나는 그 시나리오 보면서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다. <오! 수정> 찍을 때 (박찬옥 감독은 <오! 수정> 조감독이었다) 봉고 운전사에게서 따귀맞는 장면 찍는데, 죽는 줄 알았다. 이 사람이 대사가 많은데 화난 상태에서 때리기까지 해야 하니 연습할 때 단 한번도 오케이가 안 났다. 홍상수 감독도 노력을 했는데 안 되니까 결국 그냥 갑시다, 했다. 하늘에 맡기자며 촬영에 들어갔는데 테이크가 열몇번이 넘게 가는 거야. 결국 볼이 시뻘겋게 부어서 오케이가 났다. 분위기 아주 안 좋았지. 그때 박찬옥 감독이, 아니 조감독이 다가오더니 조그만한 목소리로 묻더라. “저… 이럴 때 어떤 느낌인지 시간나면 이야기해주세요.”나도 꽤 나이먹은 배우인데, 새파란 조감독이 그런 상황에서 그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다니. (웃음) 그때 이 사람은 연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이란 감성의 안테나가 있어서 그걸 채취해 영화로 만드는 건데, 사람의 감성이나 정서에 이만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 남다른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본 읽었을 때는 나한테 그런 걸 물었던 박찬옥이란 사람이 이렇게 쓴다면 이거 영화되겠다고 생각했다.

허문영 이상한 질문을 해서 대답은 들었나.

박찬옥 나중에 시간 나면 대답해주신다고….

문성근 참 겁없는 사람이지. (웃음)

인간 문성근, 배우 문성근

허문영 주변적인 얘기 하나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보거나 영화를 보고, 한윤식은 특정 인물이 모델이라고 말하는데, 사람마다 다른 모델을 떠올린다고 한다.

박찬옥 나도 그런 이야기 들었다. 한윤식이 문성근 선배와 닮았다는. (웃음)

문성근 그래? 나는 그런 생각 못했는데…. 그동안 영화계를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 그런가.

허문영 너무 딱이다. 문성근 아니면 저 역할을 절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만큼.

문성근 그런가? <오! 수정> 하면서 사람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게 많이 해소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질투는 나의 힘>의 한윤식에 대해 딱이라는 느낌이 그래서 온 거 아닌가. 강박관념 없이 지금까지 했던 역할 중에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했거든. 지금쯤 <경마장 가는 길>을 하면 제일 잘할 것 같다. 그땐 압박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 하라고 하면 정말 재밌게 할 것 같다.

허문영 <경마장 가는 길>의 R과 <오! 수정>의 초라한 감독과 <질투는 나의 힘>의 한윤식은 모종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배역을 연기한 배우의 속에서 나오는 거라는 짐작이 드는 것이다.

문성근 그런 역을 많이 하긴 했다. 두 가지가 작용했다. 하나는 외부환경이다. 87년에 민주화가 되면서 표현의 자유가 조금씩 보장되기 시작했고, 70, 80년대에 당연히 다루어져야 했던 것들이 다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90년을 맞았다. 진지한 역할뿐만 아니라 이중적 욕망을 감춘 현대인의 모습이 영화에 종종 등장해야 했다. 거기에 나라는 배우가 있었다. 또 하나는 나 스스로가 분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다. 마음속에선 모순된 것들이 늘 양립하고, 늘 쟁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역에 맞다는 인상을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살기가 피곤하고 괴로워서 그렇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선 좋은 점일 수 있다. 아휴 괴로워, 나도~. (웃음)

박찬옥 보통 배우들이 모니터를 확인할 때 자기 연기가 좋았나, 나빴나, 저거 어땠나, 뭐 이런 걸 보는데 문성근 선배는 바로 관객이 된다. 모니터 속의 자기를 보면서, 어이구 인간아, 인간아…, 그러는 게 너무 재밌있었다.

허문영 <질투는 나의 힘> 촬영 초기에, 연기가 잘 안 잡힌다는 고민을 문 선배가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문성근 당시에 너무 집중해서 노 전 후보를 돕고 있는 상태여서 머릿속이 그걸로만 가득 차 있으니까 첫날에는 집중이 안 됐다. 하루 정도 쉬고 가면 괜찮았을 텐데, 그땐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옛날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서울대 데모장면을 찍고 곧바로 연극 연습하러 갔는데 전혀 안 되더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선 아주 이성적인 연기를 하는데 연극에서는 사람을 너무 죽여 망가진 백인 용병 역을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야. <질투는 나의 힘> 찍을 때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거다. 둘쨋날부터는 괜찮았다. 라디오에선가 들은 이야기 하나가 있다. 최불암씨가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를 동시에 할 때 얘긴데, 출근할 때 수위 아저씨가 “안녕하세요 김 반장님” 하는 날이 있고 “안녕하세요 김 회장님“하는 날이 있더라는 거다. 나중에 깨달았다고 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수위 아저씨가 느낄 만큼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는 얘기다. 배우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연기할 인물이 돼서 나간다는 거다.

박찬옥 문 선배님한테는 늘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문성근 또 최불암씨 이야기 하나 더 하자면, 그 분은 작품이 끝나면 만취가 된다. 그래야지 인물을 털어내고, 자기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거다. <레옹> 찍을 때 얘긴데, 그 어린 배우한테는 정신분석학의를 붙여줬다고 한다. 캐릭터 만들 때도 정신분석의하고 같이 접근하고 그날 연기 끝나면 풀어주는 것까지 맡는다. 우리는 그런 역할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최불암씨 경우는 술로 하는 거겠지. 가끔 젊은 친구들 중에 촬영 끝나고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안 풀려서 그런 거다. 내가 출연했던 영화는 보기 싫은데, 영화 찍었을 때의 감정상태를 다시 느끼기 싫고, 그때 괴로웠던 것, 잘 안 되는데 그냥 넘어갔던 것, 그런 게 영화에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보고 있기가 괴롭지. 연기자들에겐 대부분 이런 구조들이 있을 거다. 몰입하고 벗어나고 몰입하고 빨리 벗어나고.

허문영 아까 묻고 싶었던 건데 문 선배가 따귀 맞았을 때 기분은 왜 물어봤나.

박찬옥 음, 그냥 문 선배님 처음 봤을 때 외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허문영 매력적이란 말인가.

박찬옥 그게, 그러니까, <나이트메어>에 나오는….

허문영 악몽 같았다는 말인가.

박찬옥 그게 아니고. 그 영화에서 아름답게 나오는 신부의 얼굴 같았다. 그래서 많은 게 늘 궁금했다. 그 장면 찍을 때는 두려울 것 같았다. 정말 두려움을 느낄 것 같았다. 한 테이크, 두 테이크 계속 갈 때 세게 때려! 라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 두려움은 점점 커지고 있는 게 아닐까 궁금했다. 사실 그때 그 자리에서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미숙했던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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