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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생태학 <질투는 나의 힘> 論 [2]

<질투는 나의 힘>은 또한 시간과 변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관계 속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서히 삼투하면서 서로를 변화시킨다. 원상이 윤식의 오르간 앞에 서서 하나의 멜로디를 나란히 연주하는 장면은 예언적인 숏이다. 이들의 관계를 완성시키는 것은 정서적인 친밀감이다. 공감은 공동체의 기초다.

관계가 변화하자 이번에는 다시 캐릭터가 변화한다. 윤식과 친해진 원상은 혜옥이라는 거치적거리는 꼬리를 잘라버리고, 성연이라는 섬으로부터 빠져나온다. 그의 시선은 드디어 윤식의 딸 미림에게 꽂힌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순환이 완성된다. 원상이 윤식의 세계에 완벽하게 포섭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의 공동체가 재생산되는 방식을 드러내준다.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서서 점차 남성들의 영화로 변모한다. 여성들의 실종은 이 영화의 구조적 결함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혹은 남성적 사회화의 타락상을 여성의 눈으로 비판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데 지나치게 성별화된 해석을 제어하는 장치가 영화 안에 이미 존재한다. 원상의 첫 번째 애인인 내경은 성연을 맡은 배종옥이 1인2역으로 연기한다. 성연이 간 길을 내경이 뒤따르고 있고 이내 성연의 모습으로 변해가리라는 추측을 쉽사리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자나 여자나 거기서 거기인 거다. 혜옥은 강렬하기는 해도 이들만의 공동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물(異物)이다.

<질투는 나의 힘>의 전반적인 설정과 태도는 자연스럽게 홍상수의 영화들을 상기시킨다. 사실 주체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난 세기 이래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고 홍상수 이후 한국영화 안에서도 이미 기시감을 준다. 우연하게도 이 영화는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최고상을 받았던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같은 상을 받은 두 번째 한국영화가 되었다. 홍상수와 박찬옥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분별하는 일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평자들 사이에 공통된 질문이기도 하다. <질투는 나의 힘>을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발탁했던 프로그래머의 의견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된다. “홍상수와 박찬옥은 비슷한 세팅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홍상수가 이야기나 인물의 중심성, 균질성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해체주의자인데 반해, 박찬옥은 그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박찬옥은 또한 친밀한 관계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유독 특별한 방식으로 세련되게 제기한다. 그는 영화가 개인적인 질문이고 시선의 추구이면서 동시에 소통 가능한 매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질투는 나의 힘>은 감독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결정체다.”

조금 더 천착하자면, 두 사람이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자신이 속해 있는 어떤 유의 사회를 육안으로 보는 듯한 사실성을 가지고 묘사한다는 데 있다.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중간선 언저리에 걸쳐 있는 대신 교육 수준이 높고 문화적인 교양이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보헤미안적인 기질을 드러낸다. 예리함에도 불구하고 비판하거나 계몽하려는 태도 대신 정서적으로 환기시키는 즈음에서 멈추는 것이다.

홍상수와 박찬옥은 이같은 특정 계층의 속성을 핍진하게 묘사한다. 이들의 영화는 생태학적이다. 마치 특정 종류의 인간이 서식하는 군락지를 들여다보는 듯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정말 매혹적인 접근법이다.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유머적인 정신상태’다. 세상 사람들이 진짜 심각하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사실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고 미소짓는다. 이는 유한적인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인 동시에 그 일의 불가능성을 알리는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유머로서의 유물론>). 영화감독으로서 이같은 천품은 드물게만 발견되며, 보는 이에게 해방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비평가들이 환호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로 간주된다. 이런 태도는 한 사람의 심연을 파고들어가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에 도달한다는 믿음과 연결된다. ‘욕망’이 ‘인간’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인간관에서는 ‘관계’라는 항목이 사라지기 쉽다. 관계는 곧 타자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타자가 제거된 인간학은 생물학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세상과 인간이 지겹게도 안 바뀐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솜씨좋게 구성된 인간생물학인지도 모른다. 정치성이 소거된 듯한 이 세계는 사실 한국사회의 정치적 변화와 정확하게 조응한다. 90년대 이후 고도화된 자본주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커다란 이야기’가 끝난 이후 나타난 새로운 이야기 방식인 것이다.

주체성을 품고,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박찬옥의 출발점은 분명 이 같은 이야기 방식이다. 그것은 욕망의 생태학이다. 그러나 박찬옥은 여기에 ‘관계’의 문제를 도입한다. 이것은 박찬옥의 영화수업 방식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거의 모든 단편영화를 ‘영화제작소 청년’의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다. 김용균, 정지우 등 ‘청년’ 출신 감독들의 이름이 매번 스탭 리스트에서 발견된다. 박찬옥 감독이 데뷔작을 청년필름에서 만들기를 원한 것이나 명필름이라는 메이저 제작사로부터 투자를 끌어낸 경위도 ‘청년’ 특유의 관계의식과 실천성에서 비롯된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박찬옥의 인물들은 촘촘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움직이며 중심성과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계로부터 영향받고 변화한다. 그 변화는 도덕적 몰락으로 인한 부패이기도 하고 문화적인 교양이 효소 역할을 한 발효의 조짐도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박찬옥 덕분에 모호한 어떤 인간과 하나의 세계를 마치 잘 알게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제 예정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자신 혹은 주변에 대한 정직한 관찰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곧 박찬옥의 두 번째 영화에 대한 기다림이기도 하다.글 김소희 cwgo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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