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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7]
2003-05-09

추천자 : 김봉석 영화평론가

그는 공포를 안다

<링반데룽>의 박종영 감독

암흑 속에서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머리 위의 푸른 등불. 도연이 깨어나자 친구들이 반긴다. 벼랑에서 굴렀다가 이틀 만에 깨어난 것이라고 두 친구가 말해준다. 절대 흩어지지 말자고 손목에 끈을 묶어두어, 모두 함께 굴렀다는 것이다. 날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친구들의 말. 다정한 친구들은 발가락 탈골을 맞춰주고, 무릎의 고름을 빨아낸다. 고통을 느끼며 다시 잠든 도연.

그런데 모든 것이 반복된다. 깨어난 도연에게 친구들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 이틀이나 혼수상태였어, 헤어지지 말자고 손목에 끈도 묶고, 밤등산은 위험하다고 했지 않니. 어리둥절해 하고, 화도 내는 도연의 말을 무시하고 친구들은 여전히 지난번과 같은 말을 한다. 화가 난 도연은, 눈감고 누워보라는 친구의 얼굴을 본 순간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 발가락을 맞추고, 고름을 빨아대는 친구들을 피해 도망치려는 도연.

‘링반데룽’은 안개, 폭우, 폭설, 피로 등으로 산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같은 지역을 맴도는 현상을 말하는 등산 용어다. <링반데룽>은 똑같은 상황을 두번 반복한다. 도연의 대사만 달라지고, 두 친구의 대사는 똑같다. 하지만 두 친구가 하는 대사의 어감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어떤 시점에 등장하고, 어떤 투로 말하는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그 반복을 보면서도 그리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기교로, ‘처녀 귀신’의 얼굴을 발간 조명과 함께 잡아내면 조금 섬뜩해지는 정도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거기서 끝났다면, <링반데룽>은 그냥 <전설의 고향> 수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대담하게도 첫 반복이 끝난 뒤 크레딧을 올린다. 도연과 두 친구의 이름이 검은 화면 위에 하얗게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친구들이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해도, 도연은 아무 말이 없다. 네가 발을 헛디뎠잖아,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니, 함께 굴렀다는 것 아니냐, 미안해. 이제 도연은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정말 미안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니. 그러나 모든 것은 똑같이, 변함없이 반복된다. 친구들이 귀신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공포는 가중된다. 깨어날 때마다, 도연은 똑같은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박종영 감독은 <링반데룽>의 연출 의도를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은 옷만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대화만 나누며 산다면 어떨까? 그렇게 날마다 반복생활을 한다면 권태를 넘어

공포감마저 들것이다. 링반데룽에 걸린 주인공은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는, 바로 우리 자신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사실 <링반데룽>이 그 연출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그건 내 관심이 아니다. <링반데룽>을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공포는, 권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갇힌 인간의 절망이었다. 친구들은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고, 어쩌면 나 자신도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서 그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가 아닌 자신의 실수 때문에, 그들은 함께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링반데룽에 갇힌 것이다.

<링반데룽>은 단 하나의 공간인 좁은 텐트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상황조차 반복된다. 하지만 박종영 감독은 세련된 연출로, 한계를 장점으로 바꾸어낸다. 세번이 반복되지만, 상황을 잡아내는 구도와 앵글은 조금씩 바뀐다. 대사도 그렇다. 친구의 ‘나도 그러고 싶어’라는 대사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별 울림이 없지만, 세 번째에서 도연의 ‘차라리 죽여줘’란 탄식에 이어질 때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링반데룽>은 모든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앞뒤가 꽉 짜맞춰진 공포영화다.

나는 박종영 감독의 장편영화를 보고 싶다. 주제가 현대인의 권태이건 불안이건 상관없다. 공포영화이기만 하면 된다. <링반데룽>은 공포가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괜히 폼을 잡으면서 분위기에 갇혀버리거나, 지나치게 장르를 의식하여 틀에 갇히거나, 공연히 상황을 꼬면서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정공법으로, 가장 빠른 길로 공포를 만들어낸다. 단편 안에, 단편이 담을 수 있는 공포를 딱 그만큼만 담았다. 그렇게 딱 들어맞는 공포를, 장편의 틀 속에서 만나고 싶다. 그렇다면 <링반데룽>의 앞뒤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일어나’와 마지막의 ‘계속’이라는 자막도 충실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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