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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5]
2003-05-09

추천자 : 김소영 영상원 교수

전복적 동화의 빛나는 상상력

<연분>의 이애림 감독

어린아이들의 게임과 판타지. 그것을 성년의 동화로 옮기는 작업은 도착적이다. 이때 유년의 가장된 순진함은 성년의 과장된 타락 혹은 무위로 바뀐다. 그리고 바로 이 도착의 과정에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그리고 심술맞은 유머가 가면을 쓰고 태연히 끼어든다. 이애림의 <연분>의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러한 도착성에 기반한다. 기화요초 만발한 궁정에 살고 있던 왕과 왕비. 화려한 궁전에 다정히 함께 앉아 하릴없이 낮잠을 자며 날들을 보낸다. 그러나 왕이야 잘 테면 실컷 자라지. 왕비는 자신의 연분이 찾아오자 그만 야반도주해버린다. 그러나 아뿔싸! 왕비만 훔치면 족했을 것을. 그녀의 연분 상대는 기화요초 중, 귀하디 귀한 꽃도 함께 훔친다. 이제 꽃의 주인이 큰 새를 타고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 도주하던 연인들은 큰 새에게 꿀꺽 먹혀버리고. 아내를 빼앗긴 왕이 그녀를 찾으러 나선다. 왕비와 그녀의 연분을 먹어버린 큰 새의 주인은 왕에게 왕비를 찾아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왕비를 삼켜버린 큰 새를 타고 왕은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왕은 그만 큰 새의 주인과 정분이 나버린다. 블론드 전형 미인, 왕비와는 달리 새 연분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얼굴을 감싸고 있는 저 검은 털은 여자의 긴 머리일까, 짐승의 털일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이제 화려한 궁전에서 그 둘이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왕과 새 연분은 하릴없이 그러나 평화롭게 둘만의 낮잠을 즐긴다. 기화요초 만발한 궁전에서….

스토리텔링상으로 보아도 이애림이 다시 쓰는 동화는 몇개의 특이점들로 이뤄져 있다. 우선 가장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 모호한 성적 정체성이다. 여성, 남성이라는 범주는 어느 사이 인간/비인간이라는 또 다른 형상으로 바뀐다. 그래서 왕이 자신의 새 연분에게 당신은 여자요, 남자요? 물었을 때 검은 털의 형상은 무섭지만 정감어린 큰 눈을 뜨고 대답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람? 왕비를 잃어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왕은, 눈물을 멈추고 사랑에 빠진다.

또 다른 특이점은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동화적 ‘그들은 그뒤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를 뒤집는 잔혹한 역설이다. 특히나, 이애림의 세계에서 이 배열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강렬하고 밀도있는 색채들과 형상들이다. 붉고 푸른 원색들은, 그녀의 <연분> 속 괴물, 구불구불 날아가는 새, 성적 경계가 모호한 인물들을 쉽게 잊을 수 없는 환상적, 신화적 형상들로 색칠한다. 그들이 모여 키치적이며 동시에 말 그대로 무지갯빛 현란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애림 세계의 특이성은 미술사의 야수파와 초현실주의의 전통을 애니메이션으로 활성화하는 것이다.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옮겨올 때 기 전통은 환골탈태하게 마련. 환골탈태가 무엇인가? 뼈를 바꾸고 태를 빼앗는 것. 자기 나름의 새로움을 보태어 자기 작품으로 삼는 일. 야수파와 초현실주의 화폭은 2D애니메이션이 가질 수 있는 움직임과 활력, 시간의 지속에 힘입어 <연분>에 와 다른 그 무엇이 된다. 야수파로 알려진 마티스의 순수 색깔, 특히 <붉은 화실> <> <harmony in red>에 나타나는 어두운 열정 같은 붉은색이나 블라맹크의 <빨간 나무가 있는 풍경>은 이제 <연분>에 와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스토리텔링 속에서 활성화되고 도착적 동화의 세계와 만나면서 성 정체성을 문제삼는다. 야수파의 순수 색깔, 무지개 빛깔이 이애림에게 와선 동성애와 양성애를 연행하는 상징적 무지개 빛깔로 바뀐다. 그런가 하면 초현실주의 유파의 막스 에른스트의 <The Whole City>와 같은 꽃과 공간의 배치도 보인다.

이애림이 앞으로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녀가 오히려 소수 애니메이션의 ‘드랙킹’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조력자들- 동화 속 세계라면 그녀에게 마법의 물건들을 건네줄- 을 많이 만나길 바란다. 동일한 초현실주의 유파 중에서도 막스 에른스트만이 아니라 클로드 카훈 그리고 도로테 태닝이나 레오노르 피니와 같은 여성 초현실주의 작가의 주변적 전통도 들여다보길 바란다. 그리고 한국의 동화와 신화의 세계에 더 가까이 가길 바란다. 작가 김지원의 전복적 동화를 읽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기화요초를 훔쳐 도주하는 <연분>의 주인공처럼, 그러나 먹히지 말고 많은 것을 주류로부터 ‘훔쳐’ 멀리멀리 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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