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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댑테이션>,찰리 카우프만 [4]

찰리: 변명을 좀 하자면, 클리셰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봐. 클리셰란 클리셰를 클리셰로 보지 않기 때문이야. 이 영화는 클리셰를 클리셰로 보니까 그 클리셰는 더이상 클리셰가 아닌 게 되는 거지.

해영: 간장공장공장장이 간공장공장장이란 소리네.

해준: 하긴, 이 영화는 ‘익숙한 것들의 낯선 조합’에 매력이 있어. 하지만 그런 반면에 여전히 이 영화는 지나치게 자기변명적이야.

해영: 또 자폐적이고. 그런데 그게 매력이라니까. 한 가지 아쉬운 건, 자폐적이다보니 대사와 내레이션이 넘치고, 그에 따라서 자막의 생략이 심해졌다는 거지. 그런 ‘지나치게 함축된 자막’을 볼 때면, 꼭 자막이 나를 ‘쌩까는’ 것 같애.

찰리: <존 말코비치 되기>나 <휴먼 네이처>를 봤다면 알겠지만, 나는 캐릭터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펼쳐가는 걸 그저 바라보는 스타일이거든. 그러려면 무엇보다 내가 철저하게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한데, 그때 그 상황에서 ‘나’만큼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는 없겠더라고. 그렇게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면 분명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법이잖아. 그런 믿음에서 출발한 거야.

해준: 두 전작들의 놀라운 점은 황당한 설정과 밑도 끝도 없는 내러티브로도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거야.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국엔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진정성으로 귀결되잖아. 결국 그 작품들을 빛낸 건 반짝이는 설정이 아닌 진득한 캐릭터였다고나 할까.

찰리: 뭐, 그런 얘기는 하도 들어서 감흥이 하나 없네…. 어쨌건 난 이번 영화에서 ‘나’를 훌딱 까발려서 속이 다 후련해. 자, 이제 당신들 차례야. 어디 좀 까보지?

해준: 당신 같은 작가도 그렇다는데, 우리 같은 애송이 작가야 어떻겠어. 몇편 못 해봤지만, 그래도 같은 일 몇번 하면 조금이라도 노하우가 생겨야 하는데, 이건 뭔가 ‘쌓이는’ 게 없고 매번 처음 같애. 그래서 늘 불안해.

해영: 예전에 선배작가 한분이 그러시더라.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예기치 못한 때에, 이를테면 사우나에서 땀 빼고 나와 바나나우유 빨던 중이랄지, 해질 무렵 슬리퍼 끌고 담배 사러 편의점 가는 길이랄지, 아무튼 그런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갑자기 휘리릭 하고 내재돼 있던 뭔가가 날아가버리는 때가 올 거라고. 그뒤론 단 한줄도 쓰지 못하게 되고야 말 거라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추측건대 ‘영감’이란 언제라도 쉽게 증발해버릴 수 있을 만큼 얄팍한 무게에 불과하다는 뜻 아닐까.

해준: 찰리, 당신이 타자기 앞에서 한줄도 못 쓰는 장면 있잖아. 나 그 장면에서 오싹했어. 지난해에 새 작업 시작하는데 갑자기 그동안 내가 어떻게 시나리오를 썼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더라고. 방법을 모르겠는 거야. 거짓말이 아니라 빈 모니터에 껌벅이는 커서가 자꾸만 ‘커서 뭐 될래?’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커서 뭐 될래… 커서 뭐 될래….’

해영: 혼자 노트북 앞에 딱, 앉으면 일 시작하기 전에 일단 나 자신하고 한판 붙어야 돼. 평소엔 나 잘난 맛에 살다가도 한번 모니터 앞에만 앉았다 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끝없이 나를 의심하고, 부정하고, 기만하게 되거든. 자칫하면 자기 안으로 매몰될 공산이 크지. 경계해야 돼, 거기엔 약도 없어.

해준: 만에 하나 내가 자살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노트북 앞이 되지 않을까 싶어. 거기만큼 내가 싫어지는 곳도 없으니까.

찰: 그래서 필요한 건, 철저한 자기최면인 것 같애. ‘난 60킬로다… 내 머리털은 600만개다… 이 시나리오는 6천만달러다….’

해영: 이제 와서 실토하면 사실 나, 맥기의 책 갖고 있어. 어쩌면 그런 식의 매뉴얼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건 ‘그 매뉴얼대로 쓰라’가 아니라 ‘그 매뉴얼을 보고 느껴라’인지도 몰라. 매뉴얼과 자신의 생각의 고리가 맞물린, 일종의 화학반응을 통해 생겨나는 수만 가지의 변종들. 길 잃었을 땐 그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당신도 <어댑테이션>에서 또 한 가지의 변종을 만들어낸 거 아니야? ‘간장공장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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