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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정성일의 2003년 칸으로 부터 온 편지 [1]
이다혜 2003-05-23

칸이여, 대가들의 파티장에여, 왜 새로운 발견을 두려워하는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2002년 칸 리포트에 대한 반성문, 또는 올해의 다짐

칸=정성일/ 영화평론가

우선 먼저 고백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지난해 칸에서 <씨네21> 독자들을 위하여 영화를 보았고, 그리고 새로운 영화를 알리기 위하여 잠을 설치고 남들보다 서둘러 줄을 섰으며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아마도 나의 올해 칸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해야 옳을 것이다.

반성1 - 내가 놓친, 혹은 과대평가한 영화들

무엇보다 먼저 지난해 칸에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친애하는 당신>을 놓친 것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주목할 만한 시선’). 타이에서 온 이 미지의 시네아스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지난해 가장 새로운 발견이다. 매우 느리며, 때로는 거의 정지된 듯한 순간을 발견하는 이 영화는 얼마나 느리냐 하면 영화가 시작한 지 55분 만에 영화제목이 뜬다! 카메라는 마치 장면 나누는 것을 잠시 잊어버린 듯이 그저 무심하게 인물들을 쳐다보고 있으며, 때로는 그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고장난 채 텅 빈 길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를 따라서 언제까지라도 끝나지 않을 듯한 이동이 이어진다. 그 안에서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또 한명의 나이 든 여자의 관계는 아무리 지켜보고 있어도 종잡을 수가 없다. 병원에 들렀다가 오전을 보내는 절반의 무료한 이야기와,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야유회를 떠난 오후 한나절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이 감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마지막 자막이 뜰 때까지 그저 남겨진다.

감정의 초(超)슬로모션이라고도 불릴 만한 이 기괴한 영화는 화사한 날씨와 산들거리는 바람의 느낌 속에서 피부 위를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듯한 스멀거림이 밀려오게 만든다. 마치 산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느껴지는 청아함과 온갖 벌레들이 몸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불쾌감이 진절머리치게 만든다. 물론 결국은 비극이다. 하지만 그 비극은 행복을 가장하고서, 현실 안에서 우리를 속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거의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 영화의 시사는 끝난 다음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파리에서였으며, 이미 칸발(發) 기사는 서울을 향해 날아간 다음이다. 나는 좀더 부지런해야만 했다!

그 다음. 지난해 칸에서 68편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뽑은 10편의 영화 중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와 지아장커의 <임소요>, 그리고 엘리아 슐레이만의 <신의 간섭>에 대한 나의 지지는 철회할 생각이 없다. 그 반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의 방주>에 대한 나의 실망은 여전히 숨길 수 없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나도 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들이 위대한 시네아스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디지털영화와 위험한 불장난을 벌이는 중이다. (왕가위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영화들은 좀더 진지하게, 시간을 갖고, 몇번이고 거듭해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벌써 더이상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 끔찍한 소비의 가속도. 저 가공할 만한 시네필들의 흡혈귀 같은 탐욕은 쉴새없이 새로운 영화에 갈증을 일으키고, 그리고 새로운 영화 명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영화 저널들은 온갖 영화제를 뒤져야만 한다.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되어야만 하며, 물론 여기에 반성이나 성찰 혹은 사유는 없다. 현대의 예술이 점점 더 아방가르드해지는 것은 쉽게 소비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이지만, 자본주의는 그 아방가르드한 것을 물신화시키고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구경하게 만들어서 소비의 속도를 오히려 가속도 안으로 몰고 간다.

<친애하는 당신>

<돌이킬 수 없는>

무엇보다 먼저 지난해 칸에서 아팟차퐁 워라세타쿤의 <친애하는 당신>을 놓친 것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주목할 만한 시선'). 타이에서 온 이 미지의 시네아스트 아팟차퐁 위라세타쿤은 지난해 가장 새로운 발견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것을 이용하는 속임수도 벌어진다. 이를테면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칸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의 음란한 쇼이다. 여기서는 영화와 연애를 하기보다는 섹스를 하는 것 같은 즉각적이고, 무분별하며, 무언가 서둘러서 결판을 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여기서 이성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은 단 한번의 시사. 그것도 밤 12시. 그리고 영화제 시간표에는 “이 영화에는 당신을 심히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대목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유의하실 것”이라는 경고를 빙자한 유혹까지 담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내기가 된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달려가서, 소리치고, 흥분하고, 그 안에서 허망함을 느끼는 일만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10편의 목록에서 제외시킬 생각이 없다. 물론 나도 안다. 이 영화는 속임수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영화의 하나의 경향인 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돌이킬 수 없는>은 한마디로 뻔뻔한 영화이다. 이 말이 그저 단 한숏으로 정지한 채 강간하는 장면을 보여주거나, 혹은 나이트클럽에 뛰어든 채 사이키 조명 속에서 날뛰면서 달려가는 카메라의 비윤리적인 태도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진짜 가소로운 것은 그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순서를 뒤집고서 마지막 순간 거기서 마치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있다는 듯이 “시간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라고 말할 때 진짜 웃기는 일이 벌어진다. 또는 매우 역겨운 순간과 마주친다. 현대영화는 점점 더 영화가 사소한 주제를 다룰수록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로 정말 다루어야 할 주제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워하거나 무관심한 척한다. 그래서 영화의 영혼은 점점 더 유치해지고, 세상에 대한 통찰은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세상을 보는 영화의 시력이 떨어지는 것은 갈수록 인공조명이 휘황찬란해지고, 말이 많아지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만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스파 노에는 그것을 장엄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웃기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시간의 이미지? 또는 수정(水晶)화된 시간? 천만의 말씀. 그것은 영화의 늘어질 대로 늘어진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기 위해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시간이 뒤집힌 채 갈수록 점점 더 영화는 산문적이고 설명적이 되어간다. 앞의 장면이 뒤의 장면을 설명하는 대신, 뒤의 장면이 앞의 장면의 설명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거의 할말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모두 말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할말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난데없이 거창한 말이 나온다. 시간을 뒤집은 영화들이 대부분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 영화들의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들은 대부분 시간을 아주 진부하거나 도식적으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숨기려 하는데, 가스파 노에는 그 진부함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자해활극을 벌인다. 말하자면 가스파 노에는 영화에 매너리즘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이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그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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