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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 50대 청춘 ` 김유진 감독 [1]
문석 2003-05-23

포기는 노,도전은 오예∼

희귀 중견감독 김유진에게 듣는 ‘충무로에서 감독으로 살아남는 법’

충무로 감독의 조로(早老)현상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장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감독들의 대다수는 30대이고, 그 윗세대라고 해봐야 40대 초반이 고작이다. 50대 이상의 ‘현역감독’은 임권택 감독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이렇게 충무로의 인력구성이 젊은 세대 위주로 편성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는 1990년대 금융자본의 유입과 함께 젊은 제작자들이 대거 충무로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젊은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획 아이템을 현실화하기에는 상대하기 어려운 노장감독보다 신인급 감독이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관객층이 10대와 20대 중심으로 굳어져가고 그들 위주의 아이템만이 집중적으로 기획되는 요즘이라면 노장에 대한 푸대접은 더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

이런 상황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면, <와일드카드>의 김유진 감독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1950년생, 공자의 말대로라면 하늘의 뜻을 깨달은 나이에 젊은이들의 가슴을 쿵덕거리게 하는 ‘잘 빠진’ 상업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의 ‘청춘’ 유지 비결을 알아보자. - 편집자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20대 감독이 영화 잘 만드는 게 신기하지, 50대 감독이 영화 만든다는 게 뭐 신기해? 영화도 소설이나 시가 쓰는 이의 나이가 들면서 익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김유진 감독의 볼멘소리는 백번 타당한 말씀이다. 하나 충무로의 현실을 그야말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때 50대 감독이 ‘정규’ 영화자본으로부터 제작비를 조달받아 영화를 만들고, 이를 ‘정규’ 배급사를 통해 극장에 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지영, 배창호, 박광수, 장선우, 박철수 등 80년대 중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영화를 시작했던 비슷한 연배의 감독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획을 보류하거나 개인적인 방식으로 제작을 꾸려가고 있는 이 “웃기는 상황” 속에서 김유진 감독은 신작 <와일드카드>를 만들었다.

<와일드카드>가 신기한 것은 단지 시네마서비스와 씨앤필름이라는 메이저 투자·배급사, 중견 제작사와 함께 작업했다는 점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 자체가 감각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싱싱한 박동을 젊은 리듬 속에 담아냈다는 사실이 그를 주목하게 하는 진짜 이유다. 50대 감독인 그는 단순히 충무로에서 생존한 게 아니라 자존심까지 지켜낸 것이다. 우리 나이로 쉰넷의 김유진 감독은 어떻게 젊은이들로 득시글거리는 충무로에서 펄펄 살아남았으며, 충무로 경력 18년차의 김유진 감독은 어떻게 젊은 감각을 지속시켜온 것일까.

01

젊은 마음을 가지니 영화가, 사람이 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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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은 마음이 어린 사람이다. 마음속에 타락하지 않은 개구쟁이 같은 어린애가 살고 있다.” - 신씨네 신철 대표

<와일드카드>의 연출부들은 작업 초반 몸둘 바를 몰랐다. 자신과 20년 이상 나이 차가 나는 감독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고민했던 것. 가장 큰 문제는 니코틴의 유혹과 싸우는 일이었다. 시나리오를 만지느라 스트레스는 팍팍 쌓이지만, 어찌 이 삼촌 또는 아버지뻘 ‘감독님’ 앞에서 맞담배를 피울 수 있을까. 결국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회의실을 벗어나 시원하게 한 모금을 빨아대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뭐야!” 어느 날 김유진 감독이 호통을 쳤다. 잔뜩 어깨를 움츠린 연출부원들은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들락날락하면서 어떻게 시나리오를 쓰냐. 담배 마음대로 피워라. 맞담배면 어떠냐.” <와일드카드>의 연출부가 누린 ‘호강’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감독이 사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현장에서도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을 할 수 있었다.

<와일드 카드> 2003년 | 감독 김유진 | 제작 장윤현 | 출연 정진영, 양동근

“나는 비슷한 또래 사람들과 증권 얘기 따위 하는 건 하나도 재미없다. 제일 재밌는 건 영화 얘기다. 영화 얘기를 하려면 어린 사람들이 많은데 안 놀아주면 어떡하냐. 당연히 젊은이들과 이야기하고 노는 걸 좋아할 수밖에 없다. 내가 철이 없는 건지….” 그의 말처럼 김유진 감독은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젊은 제작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고, 술 사준다며 젊은 감독들을 꼬시기도 한다. 그가 <와일드카드>를 장윤현 감독의 씨앤필름과 함께 제작하게 된 사정도 <접속> 개봉 때 이 영화를 재밌게 본 김유진이 장 감독에게 술을 사줬고, 이게 인연이 돼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자기 이야기를 앞세우는 ‘꼰대’ 타입이었다면 젊은이들은 다 도망쳤을 거다. 김유진 감독이 남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사실은 현장에서 확인된다. 고민되는 장면이 있을 때, 그는 여러 스탭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한다. 어쩌면 그건 그가 영화 현장에 들어올 때 연극 연출 경험 외엔 아무런 경력이 없었던 데서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데뷔작인 <영웅연가>를 만들 때의 이야기. “내가 뭘 알았겠냐. 그러다보니 스탭끼리 카메라가 어떻게 돼서 못 찍는다, 뭐 이러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그럴 때마다 조감독을 조용히 불러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고 물어봤다.” “친구 (이)춘연이가 화천공사 다닐 때 어깨 너머로 영화 만드는 것 구경한 적이 있”을 정도였던 그가 지금의 장인급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는 분명 나이 어린 사람에게 질문하고, 조언받기를 겁내지 않았던 그의 넓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와일드카드>에서 쌩쌩한 젊음이 묻어났다면 그건 김유진 감독의 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02

항상 새로운 대륙을 향해 도전하고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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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본질은 딱 하나다. 그의 영화에선 그가 품고 있는 세상과 못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 신씨네 신철 대표

우락부락한 그의 인상을 고려한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와일드카드>는 김유진 감독이 처음 만든 본격 남성영화다. 따지고보면 그동안 그가 만들어온 영화는 모두 장르의 빛깔이 다른 영화였다. 데뷔작인 <영웅연가>는 풍자코미디이며,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법정드라마,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는 가족영화, <금홍아 금홍아>는 시대물이었다. <시로의 섬>과 <약속>만이 멜로라는 같은 범주 안에 들어가는 영화지만 <시로의 섬>이 정통 멜로라면, <약속>은 액션 요소를 가미한 변종 멜로였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데 대한 김유진 감독의 대답은 단순하다. “한번 했는데 어떻게 비슷한 걸 또 할 수 있겠냐.” 변덕이 심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뭔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와일드카드>를 만들기 전, 개발하던 다른 시나리오를 포기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당시 우연히도 <하루>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쿠앤필름은 그에게 영화화를 양보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만들던 김유진 감독은 “또다시 멜로영화를 하려니 머리가 안 돌 것 같고, 과연 그런 에너지가 나올까 의심이 들어” 접게 됐다. 새로움에 대한 의지는 <와일드카드> 때도 나타났다. 우여곡절 끝에 형사물을 만든다는 결론을 내린 그와 이만희 작가는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공의 적> 같은 다른 형사영화와 어떻게 다르게 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의 잠복근무에 대한 이야기는 강력반 형사들의 소외된 삶을 그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약속> 1998년 | 감독 김유진 | 제작 신철 | 출연 전도연, 박신양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는 김유진으로 하여금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장르를 옮겨간 뒤 그 장르를 철저히 뒤짐으로써 그는 힘있는 장르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는 법정영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참견은…>은 그에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안겨줬을 정도로 가족영화의 새 장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와일드카드>가 독특한 형사물로 만들어지게 된 것 또한 여기서 비롯됐다.

김유진 영화에서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회문제를 영화 안에 품고 있다는 점이다. <영웅연가>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단지…>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여성문제를, <참견은…>은 학원에 내몰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쫓겨나는 아이들을 다룬다. <와일드카드> 또한 강력반 형사들의 애환과 퍽치기에 대한 공분을 담아내고 있다. “애초 영화를 한 것도 사회적 발언을 위해서”라는 그의 말처럼 말이다. 다만 신철 대표의 말처럼 그의 발언은 항상 내몰린 이들에 대한 애정과 함께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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