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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포럼 2003에서 발견한 감독들 [1]
문석 2003-06-05

인디포럼의 어처구니들 새로운 길을 걷다.

확실히, 우린 수식어에 약하다. ‘영화’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고 숭배해 마지않는 시네필조차도 그 앞에 ‘독립’이란 수사가 붙으면 표정이 일그러지곤 한다. 그런 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닌 것이, 그동안 독립영화는 뭔가 비어 있고, 어딘가 부실하고, 왠지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을 심어준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6월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인디포럼 2003은 그런 고정관념을 일거에 불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더라도 저마다의 색깔을 다채롭게 입어가고 알맞게 숙성돼가는 독립영화의 싱싱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올해 <씨네21>이 발견한 인디포럼의 감독들은 오늘의 독립영화라는 지형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3명의 감독이 모두 인디포럼에 처음 얼굴을 선보이며, 그중 두명은 독립영화로서도 ‘데뷔작’을 내놓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충무로의 비주류인 독립영화계에서도 비주류인 셈이다. 물론 그들의 ‘비주류 속 비주류성’을 주목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이 만든 영화가 그동안 충무로는 물론이고, 독립영화계에서도 흔치 않았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진짜 이유다. 즉, 이들이 만든 작품들은 다소 치기(稚氣)와 무모함에 휩싸였을지언정, ‘독립영화스러운 독립영화’라는 상투성에 구속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사랑이라는 관계를 섬세하게 고찰하는 이하 감독의 , 언어와 폭력의 문제를 독특한 유머감각으로 보여주는 박명랑 감독의 <미안합니다>, 가짜 역사를 통해 내러티브의 교란을 꾀하는 김진곤 감독의 <제목없는 이야기>, 한편의 심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다큐멘터리 박경태 감독의 <나와 부엉이>까지, 진일보한 한국 독립영화의 면모를 보여줌에 부족한 점이 없을 것이다. 또, 운전학원비를 ‘삥치’려다 소재를 발견했다거나, 역사책은 한줄도 읽지 않고 역사문제에 접근했다든가, 기지촌의 한 여성과의 눈물겨운 우정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다는 등, 숨은 이야기도 영화를 볼 때 향신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착잡하고 골때리며 어처구니없고 가슴저린 영화를 만든 젊은 감독들과 만나보자. - 편집자

서정적인 홍상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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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하 감독

홍상수 영화에 서정성을 가미한다면? 은 그 불가능과 논리모순의 영역으로 향하는 듯 보인다. 서울 외곽의 불법 운전교습소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사장과 여직원의 사랑, 그러니까 ‘불륜’이라는 관계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정밀한 확대경을 들이댄다. 그리곤 미세하게 떨리는 내면의 아주 작은 부위만을 교묘하게 도려낸다. 그뿐이다. 그런데도 에는 알 수 없는 흥분과 카타르시스와 긴장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 메스를 든 것 외과의가 아니라 시인인지도 모른다. 당신, 마음이 휑하다면 이 영화의 수술대 위로 사뿐히 올라 마음의 환부를 제거하라.

‘야메’ 운전연습장에서 생긴 일 잔고가 바닥을 치던 언젠가, 이하 감독은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운전면허를 딴다는 명분을 내세워 집에서 학원비를 받은 뒤, 정작 교습은 불법 운전학원에서 받기로 한 것이다. 가뜩이나 정식 학원의 수강료가 급등했을 때라 그 차액은 짭짤했다. 그럼에도 운전면허를 따서 집에 증거물로 ‘제출’해야 했으므로 그는 꽤 열심히 불법 학원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그곳을 운영하는 부부를 보고 있자니, “남 얘기 같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그의 마음속을 맴돌았고, 그들의 일상을 보면서 상상력을 첨가해 이야기를 만들었다. 결국 촬영 또한 이곳에서 이뤄졌고, 그 외의 협조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이른바 불륜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에는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게 아니다. “다만, 요즘엔 뜨겁게 사귀다가 쿨하게 헤어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미적지근하게 사귀었다가 헤어질 때 아쉬워서 끈을 못 놓는, 그런.” 이 영화는 사회의 도덕률에 반기를 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그전보다 훨씬 괴로워하니 오히려 도덕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대 이름은 루저, 정서적 패배자 그는 이들의 ‘불륜’이 애잔해 보이는 또 다른 이유가 주인공들, 특히 남자가 부유하지 못하다는 점일 거라고 나름의 사회학적 분석을 곁들인다. 남들처럼 러브호텔에도 갈 수 없어 추레한 컨테이너 사무실 안에서 뜨뜻한 맥주와 소주를 마시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이를 착잡하게 만든다.

아무리 잘못된 관계가 표면에 드러난다 해도, 이 영화가 정말 보여주려는 건 재경의 흔들리는 감정과 상처다. 사장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뜻하지 않은 외상(外傷)까지 입는다. 재경이 자신에게 전선뭉치를 떨어뜨린 전기수리공과 술자리를 갖는 장면에서 또 다른 상처가 예감된다. 어딘가 깃들지 못한 채 거듭 상처를 입는 재경의 내면은 핸드헬드 카메라의 미세한 움직임에 의해 제대로 뒷받침된다.

은 이하 감독의 전작 <용산탕>과 여러모로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전작의 다소 넉넉하고 낙관적인 시선에 비해 신작의 시선은 시종 불안정스럽고, 전작이 롱테이크로 일상의 내면을 드러내려 한 반면 신작은 ‘고정 핸드헬드’로 하늘거리는 심리의 흐름을 좇는다. 하지만 때밀이 청년의 이야기 <용산탕>과 ‘못 나가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 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루저’에 대한 관심이다. “실제로 루저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루저는 사회계층적 개념이 아니라 정서적인 느낌의 루저랄까, 그런 쪽이다.” 즉, 그는 감정표현이 적은, 또는 억제되는 사람들의 표현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라면 끓이며 봐도 이해 가능한 영화, 그 경지로 연극이든 영화든 무언가를 연출하고 싶은 심정에 ‘소신있는 재수’를 거쳐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던 그는 졸업작품 <용산탕>으로 주목받았음에도 ‘굳이’ 영화아카데미에 18기로 입학했다. “어디선가 하기에 따라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한데 큰 오해였다.” 어찌됐건, 졸업작품인 이 영화로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으니 2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한 셈.

앞으로 극단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하고 싶다는 이하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아낀다. 그런데 이유가 특이하다. “그 영화가 좋은 점은 보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라면을 끓여서 가져와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점이다. 보면 뭔가 있고 안 봐도 상관없는, 그렇기 때문에 잘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이하 감독이 장편영화를 만들면, 비디오에 걸어놓고 꼭 한번 라면을 끓여볼지어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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