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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장화,홍련> 제작기 [1]
권은주 2003-06-07

아… 오늘도 악몽을 꾼다

김지운 감독이 쓴 <장화, 홍련>, 그 식은땀의 기록

"바로 이거야!" 무섭게 추웠던 지난해 어느 겨울날 신작 공포영화의 연출 제의를 덥석 받아든 김지운 감독은 참으로 용감무쌍했다. 부임하는 관리마다 영문 모를 시체가 되어 실려나가는 고장에 자청해서 뛰어든 <장화홍련전>의 철원 부사도 그만큼 담대하지는 못했으리라. 안 그래도 인간을 탈진시키기로는 '영혼 소환술' 못지않게 지독한 것이 영화 한편 만드는 작업일진대, <장화,홍련>은 내용마저 공포로 죽어간 원혼의 기억을 목놓아 부르고 있으니 김지운 감독을 기다리고 있는 고역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봄부터 김지운 감독은 악몽에 쫓기기 시작했다. 낮이면 촬영장에서 "피가 모자라"를 외치고 밤이면 "한을 풀려면 제대로 해‥"라고 따라다니는 장화,홍련 자매에게 쫓긴 지 어언 1년 반. 그러나 개봉을 코앞에 둔 김지운 감독의 가위눌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편집자권은주

김지운 / 영화감독

# 2002. 01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다. 1월이긴 하지만….

오늘은 나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이불 덮고 하루종일 지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오기민 PD의 전화다. 커피 한잔 하잔다. 추워죽겠는데….

오기민 PD가 <장화와 홍련>을 고딕호러 스타일로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듣는 순간 필이 딱 꽂혔다. 그렇지 않아도 장편 호러에 꼭 한번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어떠냐는 오 PD의 물음에,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흥분된 어조로 열변했다. 오기민 PD는 감탄스런 얼굴로 입을 연다.

“그건 <콩쥐팥쥐>인데….”

악몽을 꾼다.꿈에 네명의 소녀가 하얀 소복을 입고 누가 콩쥐, 팥쥐인지 장화, 홍련인지 맞혀보라며 나를 쫓아온다.

# 2002. 03

마술피리가 제작하고 봄이 마케팅하는 구도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인 <여고괴담2>와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작한 오기민 PD와 봄의 오정완 대표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게 여간 든든한 게 아니었다.

만만치 않은 두 오씨사이에서 김씨의 명예를 걸고 잘 버티어내야지.

# 2002. 04

깊은밤 책상에 앉아 시나리오를 쓴다.

극도의 공포스런 장면을 상상할 때면 항상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뒤를 휙하고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잠시 뒤 방쪽에서 나는 이상한 작은 소리들…. 조심스럽게 나사 돌리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는다.

천천히 방으로 가 문을 확 연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가 왜 이럴까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순간들이 수없이 되풀이된다.

하루종일 매 순간, 모든 일상을 공포스럽게 상상해야 하는 일이 고통스럽다.

내가 왜 호러를 한다고 했을까?

# 2002년 06

<조용한 가족> <반칙왕>의 연출부였고 <복수는 나의 것>을 조감독한 이소영을 불렀다.

영문도 모르고 놀러온 듯한 화사한 분위기로 들어온 소영에게 오늘부터 조감독을 해달라고 말했다.

소영이는 벌컥 화를 내며 “시나리오도 안 보고 무슨 조감독을 해요?” 하며 대들었다.

“ 그냥 해.”

“네.”

시나리오도 안 보고 일을 시작한 이소영은 시나리오를 뒤늦게 보고 여간 후회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볼까하다가 상처받을까봐 안 물어봤다.

악몽을 꾼다.

소영이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 시나리오를 북북 찢으며 이것도 시나리오냐고 나를 쫓아온다.

다행스러웠던 점은 소영이의 다리가 짧았다.

# 2002. 06. 15

조감독이 연출부들을 미팅한다. 조감독은 연출부 황동궁을 보자마자 바로 지방 헌팅을 보냈다. 난 보지도 못했다. 보지도 못한 내 연출부가 헌팅을 간 것이다. 나보다 더 지독한 조감독이었다.

이름이 어려워서 처음에는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다.

이어 들어온 연출부 공부성이란 이름도 만만치 않았다.

황동궁? 공부성? 다 한국 사람들 맞아?

가뜩이나 이름 잘 못 외우는 나는 덜컥 공포스러웠다.

PD는 김영, 제작부에 이근욱, 고미희의 이름도 겁을 주기에 충분한 이름이었다.

여기서 촬영감독의 이름은 일단 제외하기로 한다.

팀 버튼이 나온 학교로 유명한 칼아츠에서 공부하다가 온 이지행이 스크립을 맡기로 했다.

광란의 월드컵기간.

온 거리가 온 나라가 승리에 취해 있었다.

해방 이후 이렇게 온 국민이 미치듯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춤추고 얼싸안고 어깨를 두르며 팔짝팔짝 뛰어다닐 때가 있었던가?

몇통의 통화를 한다.

류승완, “지금 난리났어요. 완전 집단 다찌마리라니까요”.

임필성, “이건 완전히 아시아의 남미 아니에요?”

박찬욱, “왜들 그래?”

# 2002. 06.23 ∼ 24

양일간에 걸쳐 공개오디션을 실시했다.

박찬욱 감독, 박희정 아트디렉터, 오형근 사진작가, 김영 PD와 함께 심사를 보았다.

요즘 조금씩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는 신인 여자연기자들을 거의 다 본 것 같았다.

한 친구가 들어왔다.

“살면서 치떨리는 적개심이나 죄의식을 느껴본 적 있어요? ”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유일하게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을 한 친구였다.

바로 임수정이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있다.

벌써 세상을 알아버린 것 같은 대답이 슬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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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07. 25

문근영을 만나다.

다른 차원을 갖고 있는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근영이의 눈을 보다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이 아인 이렇게 깊은 눈을 가진 거지?”

아이의 눈이 깊으면 슬퍼 보인다.

연예인 오락프로에 나가 주먹쥐고 흔들면서 “파이팅!” 하고 외치거나 손가락 두 개를 펼쳐 V자를 그리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거나 학예회 촌극 수준의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개인기를 부리며 인기를 쌓아나가거나 아무튼 또래의 다른 연예인과는 문화가 다른 수정이와 근영이가 장화, 홍련 역을 맡게 된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아무쪼록 그들이 연예인이 아닌 연기자의 훌륭한 모습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 2002. 08. 08

무조건 음산하고 부지 주위에 저수지가 있는 곳을 찾아라.

헌팅할 때 제작부 연출부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후보가 된 장수의 논개 사당과 진천의 성대 저수지 등을 보았으나 논개 사당은 저수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진천저수지가 끝까지 후보로 있었으나 부지가 협소하고 서울과 가깝다는 이점은 있으나 근처에 비행장이 있다는 이유로 동시녹음에 장애가 있어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전라남도쪽 팀 김정화 실장과 연출부 황동궁(이 이름 맞나?)이 헌팅한 금곡마을과 율어저수지가 후보로 올랐다. 강력한 후보지는 금곡마을 장성군에 위치한 휴양림이었는데 저수지와는 멀지만 영화의 분위를 한층 살릴 수 있는 곳으로 최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제작·연출부가 답사한 헌팅지를 보며 수없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몇 개월에 걸쳐 지친 제작부와 연출부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뜻에서 이곳으로 결정하자고 시원스럽게 결정했는데, 모든 드라마에는 반전이 있듯이 국유림이라는 이유로 산림청에서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서 모든 노력을 보였지만 공무원 아저씨들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음.

그리하여 지금도 땅을 파면 뼈가 나온다는 무서운 설이 남아 있는 보성의 율어저수지로 결정.

악몽을 꾼다.

내가 공무원 시험을 보고 있다.

# 2002. 08. 10

작품을 할 때 난 주연을 결정하는 것과 똑같은 고민과 정성을 들여 촬영감독을 결정한다.

한 단편영화제의 심사를 하게 되었고 수십편을 보면서 딱 세편만 촬영감독의 이름을 보았다.

놀랍게도 한 사람이 촬영한 거였다. 그 이름하여 이모개.

일찍부터 나와 말과 감각을 맞춰온 조근현 미술감독과 더불어 이모개 촬영감독, 오승철 조명감독이 합류하게 되었다.

촬영감독과 미술감독이 파트너십이 되는, 가장 이상적 형태의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부터 촬영, 조명, 미술감독은 거의 매일 모여서 영화의 미학적, 공간적 컨셉을 위한 회를 끊임없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직접 가서 보지는 못함. 이야기만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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