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2003 칸 영화제 결산 - 정성일[8]
이다혜 2003-06-07

이마무라 쇼헤이가 뱀장어에서 인간성의 ‘보편적’ 회복을 본다면(<우나기>), 구로사와 기요시는 해파리에게서 무리를 지어다니는 ‘동시대 도쿄’ 젊은이들의 연대를 본다. 전공투세대가 뱀장어에서 왕성한 생식과 집요한 고향 회귀의 본능을 본다면, 버블경제 세대는 해파리에게서 즉물적인 생존본능과 무조건적인 행진만을 희망한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사인만이 있을 뿐이다. 가거나, 기다리거나! 계속 기다리라고 말했던 마모루는 죽어가면서 유지에게 둘만이 약속한 사인을 보낸다. “가라!”

이제 유지의 행진이 시작된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 한 마리의 해파리는 유지의 모이를 먹고 수백 마리가 되어서 도쿄 시내를 가로지른다. 그걸 환희에 차서 바라보는 유지의 얼굴 다음 숏은 체 게바라의 얼굴을 담은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 직장도 없고 목표도 없는 젊은이들, 그들이 좀비처럼 도쿄 시내를 활보하는 롱테이크이다. 그러면 (그렇게 기다려도 알 수 없던, 그래서 거의 지쳐버린 다음에) 이제야 비로소 영화 제목이 뜬다. (가다카나로 쓴) <아카루이 미라이>(‘밝은 미래’). 그것이 정말 ‘밝은 미래’일까?

아, 심금을 울리는구나!

<천년에 한번 오는 달>(Mille Mois), 감독 파우지 벤사이디, 주목할 만한 시선

<메마른 눈동자들>(Al Ouyoune al Jaffa) 감독 나르지스 네자르, 감독주간

이 두편의 영화의 공통점 세 가지. 두편 모두 데뷔작이며, 모로코영화이며(좀더 정확하게 <메마른 눈동자들>은 탕헤르 지역영화이다), 두편 모두 심금을 울린다. 그리고나면 두편 사이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파우지 벤사이디의 영화는 동화에 가까우며, 매우 소란스럽고, 인물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미지와 사운드가 불러일으키는 감흥이 있다. 반면 <메마른 눈동자들>은 조용하고, 아주 슬픈 리듬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미장센은 때로 군무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두편을 한자리에 부른 이유는 좀 다른 데 있다. 중동지역 영화들이 칸에 오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자기 스스로를 낯설게 만드는) 이국성(異國性)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영화를 서구영화의 전통 안으로 끌어들이는 고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을 (칸에 가고 싶은 한국영화 신인감독들께서는) 주의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의 정서에 기대면서, 그들 자신의 원시성을 본다. 영화 안의 삶은 누추하고, 비루하며, 봉건적이고, 미신에 차 있으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의 영화는 (서구적인 의미에서) 매우 세련된 포스트 모던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 신기한 낯섦과 친숙함 사이의 이중장부의 (서구의 비평담론과의) 거래는 신중하게 토의되어야 한다.

<천년에 한번 오는 달>은 모로코의 한 마을 이야기이다. 무대는 1981년. 이 마을에는 천년에 한번 오는 달을 맞이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날 마을 사람들은 달을 맞이하러 산에 오른다. 할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년 마흐디는 아버지가 프랑스에 돈을 벌러 갔다고 굳게 믿는다(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 가 있다). 소년 마흐디는 개구쟁이라서 사고도 많이 생기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사건은 계속 벌어지고, 결국 할아버지가 몰래 마흐디 학교 선생님의 의자를 내다 팔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동네를 떠나야 한다(회교권 국가에서는 도둑질을 하면 손목을 자른다!). 마흐디에게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말하지만, 이제 ‘철든’ 마흐디는 그냥 엄마 말을 믿는 척한다. 결국 동네를 떠나는 그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파우지 벤사이디는 시종일관 쿵쾅거리는 음악과 요란벅적한 소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소년 마흐디의 시선으로 끌고 나간다. 물론 이것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상황(<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과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정서(<하얀 고양이, 검은 고양이>)이다.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그 두개의 세계를 벤사이디는 아주 느슨하게 연결시키면서도 끝내 그 어느 쪽의 고리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모로코 마을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들의 생활을 낯설게 지켜본다. 거기에는 자기 영토의 삶을 ‘발견’하는 것 같은 인류학자의 시선이 있다. 그는 자기의 영토에서 살아가는 대신 그 안에서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천년에 한번 오는 달>에서의 주인공들인 하위계층(subaltern)은 자기의 삶을 받아들이는 준비론적 패배주의의 비극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생활을 담아내는 방식을 통해서 서구영화의 미학을 이용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르지스 네자르의 <메마른 눈동자>는 그것을 좀더 밀고 나아가서 변방국가의 하위계층의 문제틀과 페미니즘을 서로 뒤섞는다. 산골 깊숙이 자리잡은 베르베르는 창녀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이 마을에는 “돈 없는 남자는 들어올 수 없다”. 이 마을의 큰언니이자 포주인 하라의 어머니가 감옥에서 풀려나서 25년 만에 돌아온다. 잊고 살았던 어머니가 고향에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한 남자와 돌아온다. 마을에는 소동이 일어나고, 그들 사이에서 대립과 갈등이 벌어진다.

나르지스 네자르는 그 소동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그려낸다. 녹색 들판에 붉은 깃발을 세운 화면 위로 온갖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군무를 추듯이 달려가는 스펙터클(마치 구로사와의 영화처럼!). 그리스 무대극을 보는 것 같은 증오와 분노의 제스처들과 비명에 가까운 외침들(마치 앙겔로풀로스의 <방랑극단>을 연상케 하는 상황). 이상할 정도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화면 구도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와 딸을 위하여 지붕 위에서 남자가 벌이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방불케 하는 슬랩스틱을 통해서 비로소 그녀들의 화해는 이루어진다. 그런데 모로코와 채플린은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인가? <메마른 눈동자>는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의 상호의존성이 삶을 ‘신비롭고’ (하지만) ‘불완전하게’ 화해시킨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제3세계 ‘변방’영화들의 경향은 1970년대의 ‘적극적인’ 정치적 실천을 버린 대신 ‘소극적’ 미학의 실천을 자기의 전술로 삼는다. 이들은 저항하는 대신 세계화의 질서 안에서 이미 주어진 삶을 동화, 혹은 신화, 또는 상징이거나 알레고리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우지 벤사이디의 <천년에 한번 오는 달>과 나르지스 네자르의 <메마른 눈동자>는 정말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더니티의 기계장치인 영화의 서구적 수사학으로 담아낸 ‘영원한 미완성의 근대’에 대한 변방의 탄식이 있다. 그들은 원치 않는 일이지만, 자기 영토에서의 패배자들이다. (내 생각에) 그것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로 시작된 이란영화의 르네상스가 (그들에게, 혹은 우리에게) 넘겨준 유산이다. 서구의 배급구조와 만나야 하는 변방의 영화들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이것이 칸에 온 남한 영화평론가의 어쩔 수 없는 근심이다(이 글은 아래 글과 함께 읽혀야 한다).

사유의 힘

<새끼 사자들>(Les Lionceaux), 감독 클레르 도이옹, 감독주간

<투쟁> (Struggle), 감독 루드 마데르, 주목할 만한 시선

<삶의 입맞춤> (Kiss of Life) 감독 에밀리 영, 주목할 만한 시선

<수위표>(水位標, Watermark) 감독 조지아나 윌리스, 감독주간

(이 글은 위의 글과 함께 읽혀야 한다) 이 네편의 영화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데뷔작이며, 여성 영화감독의 영화이며, 네명 모두 칸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출신들이다(그중에서 에밀리 영은 ‘시네 퐁다시옹’에서 추천받고, 파리에서 그의 경쟁자들과 일정한 과정을 이수했으며, 그중에서 선택되어 장편영화를 찍었다. 텔레라마의 말에 의하면 그 경쟁자 중에는 한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언론들은 칸에 관심이 많으며, 96년 이후 ‘어찌되었건’ 단편영화 부문에 한국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초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올해 칸에서 신인감독상의 후보작들을 집중적으로 보았으며(비평가주간을 제외한 전 부문의 신인감독들의 영화를 ‘새벽까지’ 모두 보았다), 그중에서 이 네편의 영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우선 매우 침통하게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지금 한국영화의 (상업적인) 구조(와 이를 둘러싼 영화비평의 담론) 안에서는 칸영화제에 와서 신인감독상을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나는 이 말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잠시만 참고 읽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여기서와 저기서의 ‘좋은 영화’에 대한 기준 자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저기서는 너무 통속적이고, 드라마에 질질 끌려가고 있으며, 상투적이고, 이미 그런 장르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따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로 이 네편의 영화의 공통점은 보고나면 줄거리를 무슨 수를 써도 요약할 수 없다는데 있다.

(억지로라도 요약하자면) <새끼 사자들>은 섬에서 짐승처럼(말 그대로 새끼 암사자들처럼!) 살던 두 자매 앞에 한 소년이 실려오자 벌어지는 질투와 비극의 삼각관계이다.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보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장-마리 쉬트라우프와 다니엘 유이레 영화의 ‘소녀용’ 순정만화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투쟁>은 동구권에서 오스트리아로 불법이민 온 엄마와 딸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벌이는 생계의 투쟁이다. 이 이야기가 비엔나의 한 남자의 삶과 평행하게 펼쳐진다. 그 둘의 교차점은 매우 끔찍하다.

<삶의 입맞춤>은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가 아직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동구에 있는 그의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교통편을 이용하여 안간힘을 쓴다. 그 둘은 집에 올 수 있을까? <수위표>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부인은 남편의 과거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은 과거의 기억이 일으키는 충격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들의 기억은 서로 겹치지만, 때로 비어 있다. 그걸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들의 딸이다. 기억의 사다리, 혹은 퍼즐 맞추기.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대의 영화에 대한 생각이 갖고 있는 미적 좌표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와 저기 사이의 간격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같은 영화에서 보려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보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그 드라마 안의 인물, 인물들의 갈등, 인과관계, 세상에 대한 모방, 긴장과 이완, 그리고 대답을 얻으려고 한다. 물론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 대해서 ‘그런데’ 그것이 영화로 성립될 수 있느냐고 질문할 때 갑자기 사건은 (이야기) 관계의 결과로부터 결과의 (이미지) 관계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는 도덕적 규칙성이 이야기로부터 이미지에 대한 판단에로 옮겨올 때 입장은 뒤집히게 된다. 결국 영화는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화인 세상을 영화가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성립시키는 숏(들)의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 안에 사건이 아니라 사유가 있어야 한다.

칸에 (한국)영화가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의 세상의 영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곳에서 영화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구 위의 동시대성에 대한 사유의 한 가지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그 한 가지 견해이다. 사건으로부터 풀려나와서, 영화에 대해서 사유하는 영화. 결국 칸에 오기 위해서는 시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도깨비처럼 등장한 영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시장이 틀렸다고 호소할 생각은 없다. 또한 우리의 비평담론을 문제삼을 생각도 없다. 그것은 남한이라는 변경에서 영화를 사고하는 우리의 한계이자, 미덕이며, 전통이자, 역사의 귀결일 것이다. 그건 그대로 내버려두자. 그 대신 우리는 ‘지구를 자기의 국적으로 생각하는’ 도깨비를 기다려야 한다.

부정(父情)이라는 이름의 십자가

<아버지와 아들>(Otets I syn)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 경쟁부문

지난해 소쿠로프는 <러시아의 방주>로 에르미타쥬 성안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방을 따라가면서 타임머신과도 같은 한 숏의 영화를 만들었다. 어쩌면 그 영화는 디지털영화의 그 어떤 극단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영화가 정말 지루했다. 소쿠로프는 정신적인 영화를 만드는 시네아스트이지 결코 형식적인 불장난에 심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서 영화의 영혼을 보고 싶은 것이지 실험의 형식이라는 시험에 들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미장-타블로(mise-en-tableau)의 우주 안에서 이 모든 것 안을 순환하는 중이다. 하지만 <몰로흐>와 <타우르스>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지들뿐이다. 그러나 소쿠로프는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아들>은 5년 전에 만든 <어머니와 아들>의 속편이며, 앞으로 이어질 <두 형제와 누이>와 함께 완성될 삼부작의 가운데 이야기이다. 그러나 방심하면 안 된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선 <어머니와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의 ‘눈에 보이는’ 차이점. <어머니와 아들>은 롱테이크의 명상에 잠겨드는 영화이다. 1시간22분 동안 고작 54숏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다. 아들은 눈물이 흐르듯이 무너져내리는 세상의 형상을 본다. <아버지와 아들>은 1시간23분 동안 (내 복기가 틀리지 않는다면) 600숏이 넘는다. 두 번째 차이점, <어머니와 아들>이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장면들의 연속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은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카라바지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더 중요한 차이점인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스크린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소쿠로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는 반복보다는 차이에 방점을 두고 있다. 가장 의미심장한 첫 장면. 마치 피에타 상과도 같은 자세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근친상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의 환상이다. 혹은 아들의 향락이다. 그걸 소쿠로프는 일그러진 이미지를 통해서 찌그러진 거울에 비추듯이 외상을 일으켜 보여준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아들의 벌린 입의 시커먼 구멍. 그건 뭉크의 말없는 비명, 혹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뭉개진 얼굴의 블랙 홀이다.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다음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은 군사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는 아버지와 지나치게 친해서, 그를 사랑하는 연인조차 “아버지가 아니라 형제처럼 보인다”고 질투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연인은 결국 아들을 떠나간다. 그 사실이 아들은 괴롭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낼 때가 왔음을 안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는 너의 얼굴을 잊기 시작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