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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의 공포,김지운 vs 윤종찬 [1]
김혜리 2003-06-20

Spoiler Warning : 대담을 읽음으로서 영화의 결말을 알게되어, 관람시 흥미가 반감될 수 있음.

" 꽃으로 한번 맞아 볼텨? "

윤종찬 감독이 김지운 감독에게, <장화, 홍련>의 공포에 대해 몹시 캐묻다.

대낮에도 어둠이 고여 있는 카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실패한 두명의 감독이 마주 앉아 각성을 부르는 카페인이 잔뜩 든 질척한 음료를 연신 들이켜고 있다. <소름>의 윤종찬 감독과 <장화, 홍련>의 김지운 감독. 한 사람은 더러운 철제 캐비닛에, 다른 한 사람은 아름다운 꽃무늬 장롱에 기억의 저주를 구겨넣고 봉인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결국 두 사람이 마주친 원혼은 한편의 영화로 완성될 때까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 김지운 감독과 윤종찬 감독은 4, 5년 전 서로 알지 못한 채 같은 방에서 새 영화 구상에 머리를 싸맨 적이 있다. <소름> 이전에 <수호전> 시나리오로 장편 입봉을 준비 중이던 윤종찬 감독은 연출부 회의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마침 PD 겸 배우인 백종학씨를 통해 영화사 봄의 방 하나를 일주일쯤 쓸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박한 용도에 양보해 이때 주섬주섬 방을 ‘뺀’ 사람은 바로 <반칙왕>에 착수할 무렵의 김지운 감독이었다. 두 감독의 번민을 연달아 지켜본 그 방의 벽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퍽 흥미로운 목격담을 들을 수 있었을 터다. 방 한칸 다음으로, 윤종찬 감독과 김지운 감독이 포함된 ‘삼각관계’를 형성한 것은 <반칙왕>과 <소름>에 출연한 배우 장진영이었다. 소개팅에 나선 생면부지 남녀의 첫 화제가 대개 공동의 지인에 관한 잡담이듯, 두 감독의 대화는 그녀에 대한 추억으로 허두를 뗐다.

● 김지운: <반칙왕>을 찍을 때 진영씨가 <소름> 시나리오를 읽어봐달라고 했다. 공포가 장르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인물과 관계 안에 녹아 있어서 쉽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배우 몫이 될 테니까 연기력을 검증받는 기회가 될 거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소름>의 촬영현장을 찾았는데 망가진 그녀를 못 알아보고 “누구세요?” 그랬다. 얼굴은 멍들고 입술은 터지고. 예사롭지 않은 감독님이라고 생각했다. (웃음) <소름>을 보고 장진영이 이렇게 뜨거움을 간직한 배우였구나, 하면서 그 뜨거움을 다칠까봐, 또 그러다 내가 다칠까봐(웃음) 좋은 배우를 활용 못한 나의 불철저함을 반성했다. 나는 배우에게 연기를 요구해서 처음에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으면 끈질기게 요구하지 못하고, 영화적으로 처리할 다른 방법을 궁리하는 경향이 있다. 돌아보면 <커밍아웃> <장화, 홍련>이 다 당시의 반성에서 나왔다.

■ 윤종찬: <장화, 홍련>을 어젯밤에 보았다. 영화가 무척 오래된 기억이나 죄의식 같은 느낌을 주었다. 보고 나니 감독 개인이 궁금해졌다. 연극하는 누님을 언젠가 만나 권투하는 동생이 있고 그 밑에 영화감독 동생이 있다고 들었던 것이 영화에 오버랩됐다. <조용한 가족>이나 <반칙왕>의 부자관계도 떠오르고. 가족에 대해 재미있거나 몸서리쳐지는 기억이 있는지?

● 김지운: 영화의 중심이건 주변이건 공교롭게 가족을 다뤄왔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다. 형제들의 개성은 강했지만 여느 가족 같은 희로애락이 있는 평범한 집안이었다. 로맨티스트 한량이던 아버지와 경제권을 가진 어머니가 말다툼이라도 하시면, 형제도 많은데 초등학교 입학 전 막내인 내가 나서서 중재를 한 기억은 있다. 이건 뭐가 잘못됐고 이건 아버지가 오버했다고 정리하면서. (웃음)

■ 윤종찬: 나쁜 의미가 아니라 침묵하지만 알 건 다 아는 무심한 가족 아니었을까 싶었다. 누님은 방에서 무심히 연극 대본 외우고, 형은 샌드백 치고, 영화적으로 컷까지 상상이 되더라. (웃음)

● 김지운: 그런 면도 없지 않다. 어머니가 현실적이고 냉정한 편이고 형제들 성격도 쿨하다.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대학 졸업하고 10년 넘게 백수생활을 하다보니 가족과 부딪치는 시간이 길었고 그래서 영화에 가족이 자주 비치는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공포와 슬픔, 또는 죄의식

■ 윤종찬: <장화, 홍련>은 전작들에 비해 호흡이 길고 진지하며 색감도 다채롭다. 어찌보면 두편의 장편에서 시도한 결과를 토대로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 김지운: 데뷔작 <조용한 가족>은 코믹잔혹극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규정했지만 코미디에 재능이 있다거나 계속 만들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조용한 가족>도 엽기적 상황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호한 것들이 유머의 한 방식으로 독특하게 사용된 경우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이 성공하면서 코미디 감독이 돼버렸는데 사실 좋아하는 장르는 누아르처럼 어두운 영화다. 앞서 만든 코미디들도 명랑하거나 스피디한 건 아니고 일부를 추출해보면 <커밍아웃>이나 <쓰리> <장화, 홍련>까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장화, 홍련>은 영화를 하기 전부터 나를 사로잡은 영화들-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면서도 떨치기 힘든 강한 인상을 주는 영화들- 과 근접한 나의 첫 영화다. 원래 내 영화적 성향이 뭔가 점검하는 기회도 된 거 같다.

■ 윤종찬: 솔직히 극소수를 제외하면 원하는 영화로 데뷔하는 경우가 드물다. 어떻게든 장르화한 다음 자기 색채를 집어넣게 된다. 그렇게 대중적 인지도가 쌓이고 제작자에게 한소리할 만한 위치가 되면 그때야 자기 스타일에 욕심을 부릴 수 있는데 <장화, 홍련>은 이런 출발점에 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예컨대 <반칙왕>에서도 관객은 골목에서 휴대폰 받는 도중에 벨이 울리는 신처럼 웃기는 장면만 오래 기억하지만, 사실 감독의 정서적 성향이나 그가 앞으로 100% 원하는 영화를 찍는 여건이 되면 어떻게 갈 거라는 상을 보여주는 건 <반칙왕>으로 치면 오래된 레슬링 도장, 걸어가는 데 날아오는 신문지, 화면을 지배하는 색조 같은 거다. <장화홍련전>은 조명부터 전작과 굉장히 다른데….

● 김지운: (조심스럽게) <장화홍련전> 아닌데….

■ 윤종찬: 김 감독의 전작들은 충무로에서 상업적으로 검증된 잘 찍는다는 촬영감독의 작품이었는데 <장화, 홍련>은 인디 성향이 진했다. <반칙왕>의 화면은 정갈하지만 <장화, 홍련>은 수연이 비명을 지를 때 핸드헬드로 흔들리는 카메라에서 보듯 균형이 깨진 스타일이다. 사운드도 <반칙왕>이 장르 특성을 그대로 심어주는 사운드라면 <장화, 홍련>은 심리적 사운드다. 조명은 화사하진 않지만 깊이감을 강조한다. 오히려 관객은 처음부터 공포를 의식하고 놀랄 준비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감독은 귀신에 관심이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 김지운: 이야기하고픈 건 귀신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다른 존재의 공포, 계속 달라붙는 마음의 공포, 간과하고 무시했던 기억이 저주로 변해 튀어나오는 공포였다. 그것을 코드로 만들고 은유로 바꿔놓은 것이 귀신이다. 하지만 그것은 장르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귀신이 출몰하는 장면에는 관객의 장르적 기대를 만족시켜야겠다는 딜레마도 있다.

■ 윤종찬: 그렇다. 장르를 차용하면 그런 부담은 떨치기 힘들다. 그런데 <장화, 홍련>은 감독이 공포뿐 아니라 슬픔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귀신이 주는 경악도 있지만 동생을 그리워하는 수연의 마음이나 동생이 죽을 때 난 뭘 했던가라는 슬픔을 깊이 포착하면 보는 사람도 훨씬 전율스러울 것 같다. 계모를 단죄하지 않는 결론의 이중적 앵글에서도 너그러움이나 용서의 정신이 느껴진다.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보면 감독이 전하려는 원죄의식, 슬픔도 전염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지운: 수미가 계모에게 갖는 혐의는, 그녀가 집에 들어오면 원죄를 끌고 들어왔다는 적대감, 그리고 생모의 병세가 악화될수록 간병인이던 계모가 가족 중심으로 침투하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 잊고 싶은 참혹한 운명의 날에 그녀에게 퍼부은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아이러니가 혼합된 것이다. 자기 때문에 비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을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대체 인물을 만들어 혐의를 전가하면서 안심하려드는 복잡한 심리상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순간들

■ 윤종찬: 바닥은 붉고 벽은 푸른 주방의 인테리어처럼 <장화, 홍련>에는 여러 가지 색감이 내재해 있다. 보색 대비를 맞추지 않은 이상한 색채, 현실과 과거가 어우러지는 느낌, 호흡이 짧은 기존 공포영화와 달리 시종 상황을 응시하다 엇박자로 충격을 가하는 리듬이, 뭐랄까 감독이 모든 요소를 하나로 관통한다기보다 불도저 식으로 밀고 간다는 인상이다.

● 김지운: <장화, 홍련>은 서사와 내러티브가 아니라 주제에 해당하는 낱낱의 인상들이 초래하는 비극으로 영화를 전개시키려 했다. 웰 메이드 호러가 아니라 기이한 기운에 의해 영화가 굴러가야 이 영화가 전하려는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미국판 <링>은 논리적으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장르영화지만, 원작이 가진 불가해한 느낌은 희박하다. 뒤로 갈수록 인과가 해체되고 이상한 기운으로 영화를 몰고 가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처럼 비현실적 공간과 난해한 내러티브로 구성되지만, 어느 순간 아주 섬뜩한 자연주의 영화보다 무시무시할 수 있는 리얼리티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윤종찬: 확실히 동양적 기운이 진하게 느껴졌다. 디지털적인 방식으로 스타일을 빚었다면 그런 아우라를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카메라와 컷 전환, 사운드를 통해 아날로그적으로 영화의 공기를 조성한 것은 성공적인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김지운: 처음에는 디지털 색 보정을 계획했지만 앰비언스 조명(여러 색의 천을 조명기에 씌워서 빛의 층을 쌓아나가는 조명)을 써본 결과 실제 세트 안에서 곧바로 색감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기성의 촬영, 조명감독이 앰비언스 조명의 장점을 알면서도 실행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한다. <장화, 홍련>이 보여주는 결과는 젊은 촬영, 조명, 미술 스탭의 의욕과 고전 취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 윤종찬: 시사회 가서 표정을 보니, 적잖은 관객이 귀신 나오기만 기다리고 무서운 장면이 얼마나 무서운지 채점하는 듯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정서적 교감이나 죄의식, 색감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면 두배, 세배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김지운: 사실 그런 시도를 먼저 한 것은 <소름>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공포영화를 돌아보면서 <소름>을 만들었을 때의 고민이 <장화, 홍련>과 가장 흡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저주받은 숙명, 거기서 발버둥쳐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하는 참혹함, 한때 사랑한 여자와의 관계가 결국 도달하는 끔찍한 결과가 정말 섬뜩했다. 관객은 살인 묘사의 잔인함에 시선을 뺏기겠지만,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자기가 선물한 머플러로 여자를 목조르고 또 죽인 뒤에 지갑을 뒤지는 인간의 모습 아닌가. 그런 면에서 윤종찬 감독도 분명히 딜레마가 있었을 것 같다.

■ 윤종찬: 무엇이 공포인가는 시각차가 있다. 나라면 자다가 헛것을 보는 것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굉장히 친한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배반당할 때다. <장화, 홍련>에서 수미는 헛것을 볼 정도의 그리움과 자책 때문에 병을 얻었고 그것이 큰 공포가 된다. 또, 자기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방관을 선택하는 계모의 행동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공포를 보여준다. 카드빚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아이를 유괴하고 사업이 망하면 30, 40년 부양한 공을 백지화하고 남편을 박대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가.

● 김지운: 나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는 내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기억을 돌이키고 싶지 않고 결과를 돌이킬 수 없어 사람을 옭아매는 순간들 말이다. <장화, 홍련>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서사적 영화가 아니라 사실 우리 삶은 찰나적인 인상으로 구성되고 규정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쓰리>에서 정보석과 김혜수가 식탁에 앉아 있는데 아내가 애인인 것이 분명한 전화를 받기 위해 서둘러 일어나는 장면을 보자. 남편은 아마 애인의 전화를 받으러 간다는 사실의 큰 덩어리보다 서두르다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남편의 커피잔을 치고 가는 여자의 부주의함 때문에 살인을 결심하는지도 모른다.

■ 윤종찬: <장화, 홍련>을 보면 인물이 합리적인 판단으로 나락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몇번 온다. 그런데 사람이란 그런 순간에 묘하게 엇나간다. <소름>에서 자기의 구원이 될 수도 있는 여인을 죽이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다혈질이다보니 누구를 찔러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 다음 순간 비슷한 뉴스를 보면서 “대학까지 나온 놈이 어떻게, 말세야!” 했던 내가 그들과 멀리 있지 않구나 깨닫는다. 그럴 때 사람이 삐끗하면 파괴가 오고 죽음이 오고 비극이 펼쳐진다. <장화, 홍련>에서는 결국 성한 사람이 없고 다 파괴된다. 오직 두 가지만 남는다. 내가 죄의식을 걸머지고 살거나 속죄양을 만들거나. 하지만 수미의 명징한 자각증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예전에는 투신하고 음독하고 스토킹을 했는데 이제는 연애하다 헤어져도 어떻게든 잊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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