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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소설은 어떻게 한국영화를 사로잡았나 [1]
이영진 2003-06-26

영화사 옥탑방에는 동갑내기 백조와 백수가 산다인터넷 소설은 어떻게 한국영화를 사로잡았나

충무로는 변화할 것인가? 조폭들은 이제 사라지는가? 최근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중심에 들어선 인터넷 소설. 그리고 그 소재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충무로. 현재 충무로에는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움직임이 신생, 유력 영화사를 막론하고 막강하다. 인터넷 소설 영화화의 홍수 속에서 그 문화사회적인 배경과 맥락을 가늠해보고, 산업적 현황을 진단해본다. - 편집자

제작자 A씨. 그는 요즘 심심찮게 신생제작사들로부터 ‘SOS’ 요청을 받는다. 네티즌 조회 수가 어마어마한 인터넷 소설이 있는데 이걸 창립작 아이템으로 삼으면 어떻겠느냐며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최근엔 친한 선배까지도 “3천만원을 들여 인터넷 소설 판권을 구입할 계획”이라면서 그에게 사전 모니터를 부탁했다. “캐릭터가 별로 신선하지 않고 드라마 트루기도 엉망이다”라는 그의 만류에 선배가 결정을 망설이는 동안 그 인터넷 소설은 흥정을 거쳐 다른 제작사에 낙찰됐다. 평소 인터넷 소설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는 선배가 못내 아쉬워하는 걸 보고서야 “인터넷 소설 붐이구나” 실감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충무로에 인터넷 소설 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귀여니’라는 아이디로 네티즌들을 흥분시킨 한 10대 소녀의 인터넷 소설 <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 등을 비롯, <백조와 백수> <삼수생 사랑 이야기> <옥탑방 고양이> <키애누리브스 꼬시기> <내사랑 싸가지> <색마전설> <내 사랑 일진녀> <미혼모 이야기> <나는 악녀일 수밖에 없었다> 등 이미 판권 구입을 끝내고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인터넷 소설만 해도 10여개에 이른다. 한 제작자에 따르면 심지어 감독 데뷔를 준비하는 이들 중 직접 인터넷 소설의 판권을 사들인 다음 이를 시나리오로 완성해서 영화사에 제의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인터넷 소설을 향한 충무로 제작사들의 이같은 ‘러브콜’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론 <엽기적인 그녀>(2001)에 이어 올해 <동갑내기 과외하기>까지 대박을 터뜨린 탓이 크다.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모두 나우누리 유머 게시판에 올려져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면서 인터넷망을 통해 급속도로 유포됐던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청년필름이 개발 중인 <백조와 백수>에 투자한 아이픽쳐스의 최재원 대표는 “온라인상에서 소재나 캐릭터에 대한 검증이 한 차례 이뤄진데다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 등의 흥행 선례가 투자자들의 관심을 촉발하게 만드는 요소다”라고 말한다.

특히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일쑤인 신생제작사로선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할 경우 얻게 되는 이익을 놓칠 수 없다. 한 제작자는 “인기있는 인터넷 소설 판권을 구입하려고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신생제작사투성이다”라고 말한다. 기관 및 개인투자자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 “인터넷 소설이라는 포장이 어느 정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외에 어떤 장점이 있는 것일까. <나는 악녀일 수밖에 없었다>를 제작 준비 중인 지오엔터테인먼트의 김영대 이사는 “아이템을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을 든다. 투자가 얼어붙어 시나리오를 자체 개발할 여력을 갖춘 신생제작사가 많지 않은 현실을 감안할 때 그는 “완성된 시나리오의 경우 대부분 메이저 제작사를 먼저 거치는데다 작가와 작품 컨셉을 공유하기가 힘들다”면서 “이에 비해 인터넷 소설을 각색할 경우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고 작업 기간과 비용 또한 줄일 수 있다”고 덧붙인다.

과거에 비해 시나리오 작가라 불리는 이들은 많아졌지만, 검증된 작가층이 엷어진 점도 이유다. 특히 믿을 만한 작가라 하더라도 현재 충무로에서 각광받는 특정 장르와 유행에 민감한 탓에 한쪽으로 몰리는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한 제작자는 “시나리오 공모를 해도 이러한 결과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며, “이에 비해 인터넷 소설은 서툴긴 하지만 자신들의 경험에 기반한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들”이라는 점이 인기를 끄는 이유라고 분석한다. 싸이더스의 노종윤 본부장도 “전에는 양식을 모르면 시나리오를 쓸 수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누구나 인터넷에 올릴 수 있고, 그 형식 또한 자유롭다. 예전 같으면 사장됐을 아이디어들을 취합할 수 있는 툴이 마련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현재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곳은 신생제작사들만은 아니다. 싸이더스, 좋은영화, 튜브픽쳐스 등 유력제작사들 또한 인터넷 소설을 원재료로 시나리오 각색 작업에 돌입하고 있다. 지난해 말 <키애누리브스 꼬시기>의 판권을 사들인 좋은영화의 김미희 대표는 “인터넷 소설을 즐겨 읽는 10∼20대 초반 무리가 현재 극장가를 찾는 주요 관객층과 일치한다는 점이 영화사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청년필름의 김광수 대표도 “특정 타깃을 설정해야 하는 상업영화의 입장에서 자전적인 인터넷 소설의 캐릭터나 소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 큰힘이 된다”고 설명한다.

싸이더스의 노종윤 본부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인터넷 소설을 보면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생활패턴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면서 “타깃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인터넷 소설은 그 자체로 관객의 욕구와 맞닿아 있는 데이터”라는 것이 그의 주장. 성별, 연령, 거주지, 좋아하는 장르 등을 파악하는 수준에 그치는 1차원적 리서치를 뛰어넘어 주요 관객으로 추정되는 수요 집단이 선호하는 트렌드를 읽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자료라는 것이다. 드라마로 방영 중이기도 한 <옥탑방 고양이>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 중인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는 “인터넷 소설이 기존 베스트셀러 소설들을 영화화하려는 시도들을 한동안 대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당분간 인터넷 소설은 호황을 누리겠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지에 대해선 미지수라는 게 충무로의 관측. 신생제작사 와프와 함께 인터넷 소설 <삼수생의 사랑 이야기>를 제작 중인 튜브픽쳐스의 황우현 대표는 “일정한 퀄리티를 담보하지 못하면 인터넷 소설이 지니고 있는 잠재파워 또한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코웰창투의 이세형 이사도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모든 영화가 저절로 관객을 불러모을 것이라는 기대는 오산”이라며 “관객의 욕구를 얼마나 세련된 방식으로 자극할 것인가 하는 점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인터넷 소설이 계속해서 아이디어의 보고(寶庫)로 남을지는 전적으로 충무로의 몫이다. 이영진 ant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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