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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이영진 2003-07-10

심재명

/ 명필름 대표

움직이는 차를 몸으로 막으며 프로듀서의 삶 시작할 때

93년 초여름, 잠실 롯데월드 앞 광장. 밤늦은 시각, 김의석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그여자, 그남자>의 마지막신 촬영이 한창이었다.

그 여자, 강수연과 그 남자, 이경영이 서로를 찾아 서울 도심을 헤매다가 그 광장에서 드디어 만나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 광장엔 반드시 꼭 있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요즘 흔히 보게 되는 ‘영상이동차량’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 힘겹게 빌려놓은(아마도 당시 최초이자, 유일하게 시험운영되던 차량으로 기억된다) 영상차량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애초의 약속시간을 어겼다며 운전기사와 시스템 운영자가 막무가내로 그냥 가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앞의 진행이 좀 늦어져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으나, 실은 사용료를 더 벌어보겠다는 심산이었을 터. 이미, 30m 높이의 대형 조명크레인과 대형 촬영용크레인이 와 있고, 수십명의 보조출연자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건너편 아파트 주민들은 어두운 밤을 훤히 밝힌 조명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아우성 중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신이었는데, 정작 영상차량 문제가 눈앞을 막막하게 했다. ‘부고담당 보도기자’인 이경영이 오드리 헵번의 사망소식을 알리면서, 그가 미리 편집해놓은 그녀의 일생이 뉴스에 담기는 모습을 배경으로(영상차량에) 이 청춘남녀가 만나는 ‘결정적’ 신인데, 기사들의 협박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시간이 더 흐르자, 올려주겠다고 약속한 사용료도 싫다며 드디어 막무가내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그들…. 순간, 나와 제작부장은 움직이는 차의 앞과 뒤를 가로막았다. 온몸으로.

그래도 그들은 움직이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차량의 앞뒤를 남녀 한 사람씩 껌처럼 달라붙어 막고 있는 아니, 매달려 있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그 승강이가 한참 지난 뒤에 ‘질렸다’며 차에서 내려온 그 사람들은, 마침내 현장에 달려오신 당시 영화사 대표님의 설득으로 잠잠해졌다. 나와 제작부장은 그 신을 그날 밤 찍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그들을 ‘온몸으로’ 막았던 것이었다. 그때, 신출내기 프로듀서인 나와 함께 뛰었던 송창용, 김근철씨, 잘 지내고 있는지요? 보고 싶습니다. 프로듀서의 삶은,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또는 처절하게 ‘온몸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정완

/ 영화사 봄 대표

동네 떡대들이 횡포 부리다가 나를 보고 그냥 갈때

8년 전 <정사> 찍을 때였다. 성수동의 굉장히 좁은 오락실에서 둘(이미숙과 이정재)의 정사장면을 찍고 있었다. 오락실 밖에는 구경나온 주민들이 한 무리였고, 지나는 차량도 적지 않았다. 그 소음을 막느라 제작부가 무진 애를 쓸 수밖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걸 보고 깍두기처럼 생긴 구형 그랜저 한대가 그 구경 대열에 합류하느라 멈춰 섰다. 제작부 막내가 “지나가십쇼” 하고 차를 툭툭 쳤는데, 갑자기 차문 4개가 동시에 열리더니 덩치 큰 남자들(보통 ‘깎두기’라고 하는)이 ‘연장’을 들고 우르르 내리는 게 아닌가.

“어떤 새끼가 내 차를 쳤어?”

“죄송합니다. 촬영 중이라서 그랬습니다. 그냥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퍽! 그들은 연장 대신 주먹을 날렸다. 갑자기 얼어붙은 촬영장. 주민들은 멍하니 보고 있고, 그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동네에서 누구한테 허락받고 찍고 있는 거야. 책임자 나와!” 그들은 인상을 ‘빡’ 쓰고 있었다. “책임자 나오란 말야!”

“제가 책임자입니다.”

“아가씨말고 책임자 나오란 말야.”

“제가 책임자라니까요.”

물론 다리는 후들후들거리고 있었다. 마침 막내가 맞는 걸 보고 분개한 스탭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자칫 한판 크게 붙을 일촉즉발의 상황이 됐다. 몰려든 스탭들을 추스르는 걸 보고 그들은 내가 책임자가 맞나보다 판단한 듯싶었다.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에이, X발” 하고 한마디하더니 쓱 가버리는 게 아닌가. 현장책임자는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맞장 뜰 상대는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촬영은 계속됐다.

문소리

/ 영화배우

열심히 춤연습했는데 청소로 바뀌었을 때

감독: 마지막엔 제대로 된 춤을 춰보지?

소리: 시나리오에는 마지막에 이삿짐 싸는 거 아닌가요?

감독: 장소 바꿨어요. 무용실로.

소리: 그럼, 어떤 춤을…?

감독: 그냥 뭐… 멋진 거….

너무나 갑작스런 주문, 게다가 연습할 시간도 며칠밖에 없고 애타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굴러가며, 무용 선생님 붙잡고 도와달라고 통 사정해가며 정말 피땀흘려가며 연습했는데…. 멋진 거 한번 해보려고 이번엔 진짜 멋진 거 보여주려고, 그런데… 흑….

소리: (비굴하게) 감독님 오늘은 제발 무용 연습한 거 한번 봐주세요. 촬영이 내일이잖아요, 멋진지 안 멋진지 뭐라고 말씀을 해주셔야….

감독님: (딴곳 쳐다보며) 네. 한번 춰보세요.

소리: (조금 뻘쭘하다 그러나 힘차게 첫 동작을 시작하려 하는데….)

감독님: (갑자기 구석에서 마대자루를 들고 나타나며) 소리씨. 청소는 어때?

소리: (춤추려다 갑자기 기운 확 빠져서) 네?

감독님: 그래. 우리 마지막에 청소하자.

소리: (펄쩍펄쩍 지랄 발광하며) 악….

며칠 동안 나 혼자 뭔 짓거리를 한 건지…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선생님은 계속 안무 바꾸시고 나는 계속 연습하고… 얼마나 얼마나 공들여 만든 춤인데…. 춤추지 말라니요. 갑자기 청소를 하라니요 멋진 거 하라고 했으면서… 뭐? 청소? 감독은 변덕쟁이야. 너무해. 진짜 허무해.

두 시간 뒤 삼겹살 집에서….

소리: (소주를 입 안에 털어넣으며) 감독님 <오아시스>도 마지막에 청소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겠죠?

감독님: (고기를 마구 먹으며) 네.

소리: (또 털어넣으며) 감독님 청소를 신나게 할까요? 그래야겠죠? 씩씩하게 해야겠죠?

감독님: (또 마구 먹으며) 네. 털어넣는 소주맛. 진짜 짜릿하다.

차승재

/ 싸이더스 대표

갈비뼈 부러지고도 `레디고` 외친 유영길 감독님 지켜보면서

쿵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갔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농수로 바닥에는 유영길 촬영감독님께서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다. 내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촬영하던 1994년 어느 날 벌어진 일이었다. 양수리 인근에서 야외신을 찍던 유영길 감독님이 앵글을 잡는다며 뒤로 물러서다가 부감대 위에서 굴러떨어진 것이다. 환갑을 1년 남겨놓은 연세에 낙상을 하셨으니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앰뷸런스를 부른다, 차로 병원에 모신다 하면서 우리가 부산을 떠는 와중, 잠시 옆구리를 붙잡고 있던 유 감독님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 다시 카메라를 붙잡았다. “붕대라도 감으셔야죠.” 간청을 했지만, 당신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 빨리 찍읍시다” 하고 재촉했다. 여러모로 여건이 안 좋은 현장이었기에 우리는 촬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 감독님의 갈비뼈가, 그것도 2대나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얼마 뒤였다. 감독님의 프로 정신은 놀라운 것이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영화를 마무리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4년 뒤 유영길 감독님은 영면하셨고, 장례식장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리지 못할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았다. <나는 소망한다…>에서의 기억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유작이 된 에서 보여주신 모습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기획할 때, 유 감독님을 촬영감독으로 기용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롱테이크 위주로 가는 게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영길 감독님이 우노필름(현 싸이더스) 사무실로 찾아와 “이건 내가 찍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뜻을 저버릴 수 있는 제작자는 아마도 없었으리라. 그렇게 촬영이 시작됐고 잘 마무리되나 싶었다. 그런데 크랭크업 직후 유 감독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첫 번째 수술을 마친 뒤 유 감독님은 놀랍게도 기운을 차리고 기술시사에도 참석하셨다. 기자시사회에도 참석하셨으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틀 뒤 그는 이승으로 차분히 떠나셨다. 2차 수술을 얼마 안 남긴 상황이었기에 아쉬움은 더했다.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이 작품을 하면서 유난히 고심하셨던 감독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작품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던들 아니 최소한 시사회만이라도 참석하지 못하게 거세게 말렸던들 하며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도 를 볼 때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올곧게 보여준 거장의 기적을 목도한 탓이리라.

정지영

/ 영화감독

<낙동강은 흐른다>로 임권택 감독님과 일할 때

76년 여름이었던가. 16mm 단편을 함께 찍기로 했던 동료가 말도 없이 김수용 감독님의 영화에 촬영부 스탭으로 참여하는 바람에 난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마 안 되어 지인의 권유로 임권택 감독님의 <낙동강은 흐른다>에 연출부 세컨드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연출부라고 해봤자 조감독과 나, 그리고 감독님 옆에서 땡볕을 가리기 위해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꼬마가 전부였다. 진유영이 소년병으로 나와 탱크로 무장한 인민군과 맞선다는 내용의 반공영화였는데, 경기도 운천의 한 야산 입구에서 촬영이 진행됐던 그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소년병 분장을 하고 나선 진유영이 인민군의 탱크를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었는데, 탱크가 뒤쫓아오면 진유영이 푹 팬 웅덩이에 숨었다가 반대방향으로 도망치면 탱크가 후진(後進)해서 다시 위협하는 설정이었다. 전진과 달리 후진시에 탱크는 시야가 제한되어 있어 탱크의 후진 시점은 배우와 시간약속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번의 테스트 끝에 드디어 촬영에 돌입했다.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까진 좋았는데, 아뿔싸. 진유영은 몇 걸음 달리다 이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탱크의 캐터필더가 되말리면서 모두들 사색이 됐다. 스탭들과 배우들 모두 이 광경 앞에 “어, 어…” 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저러다 죽겠구나.” 돌연, 누군가가 앞으로 뛰쳐나가 진유영의 허리를 낚아채서 길 건너편으로 던져냈다. 임 감독님이었다. 언변은 어눌했지만, 판단은 누구보다 빨랐다(보진 못했지만, 촬영을 끝내고 군 인사들과 피로연을 여는 날도 케이크 점화 도중 갑자기 불이 옮겨붙어 우왕좌왕하는 동안 임 감독님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발화물을 들고 연회장 바깥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서른이 넘어서야 충무로에 발을 내디뎠던 늦깎이 내가, 데뷔한 다음 베트남에서 <하얀 전쟁>을 찍는 동안 배우들을 설득하기 위해 수리가 완전치 않은 헬리콥터에 오르는 호기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독이 오를 대로 올라 난동을 부렸던 연기자에게 주눅들지 않고 다가갔던 것도, 돌이켜보면 그날, 바로 그날 촬영현장에서 홀로 번뜩이던 임 감독님의 반짝반짝한 눈빛 덕이 아닌가 싶다.

배창호

/ 영화감독

흐린 날씨 고집하다가 맑은 날 고독한 뒷모습 담았을 때

<황진이>를 찍을 때였다. 벽계수에게 자신은 소유욕에서 비롯된 순간의 열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진이가 텅 빈 들판을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의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았다는 슬픔과 허무. 이런 감정을 살려내기 위해 우리는 흐린 날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2월은 좀처럼 하늘이 개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이 촬영을 앞두곤 날이 계속 맑았다. 정일성 촬영감독님이랑 반나절 정도 기다리다 결국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장비를 접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의상부 막내 스탭이 황진이의 동선을 따라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 들꽃을 따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맑은 하늘을 마주하고 걷고 있는 그 뒷모습이 그렇게 고독해보일 수가 없었다. 슬픈 감정은 맑은 날의 고요와 평화 속에서 훨씬 더 잘 살아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서둘러 촬영을 재개했고, 썩 마음에 드는 장면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날씨를 고집하지 않게 됐다. 영화 촬영에 따르는 여러 가지 악재와 변수들은, 때로 영화와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선물들이다.

명계남

/ 영화배우·이스트필름 대표

<박하사탕> 마지막 촬영 앞두고 공사 벌어졌을 때

<박하사탕>을 제작할 때였다. 영화의 시간구성이 역순인데 이창동 감독은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는 영화순서 그대로 촬영을 했다. 여느 촬영 스케줄과 다른 방식이었는데, 설경구가 특히 고통스러워했다. 처음에 철교에서 죽는 것부터 찍고, 20년을 거슬러올라가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1979년 야유회 장면은 마지막 촬영으로 미뤄뒀다. 군부대 장면을 어렵게 찍었고 드디어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충북 제천 백운면 진소천의 그 강가는 지금 관광지 비슷하게 됐지만 그걸 찾느라 연출부가 전국의 교량은 다 뒤져야 했던 곳이다. 쌍철교여야 하고 굴이 있어야 하는 조건을 딱 맞춘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연출부가 준비하러 갔는데 철교에서 한창 공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철교 밑으로 조그만 강이 흐르는데 그 물길도 돌려놓고 길도 다 엉망이 됐고…. 완전 공사판이 됐으니 난리가 난 거였다. 그 연락을 밤에 받고 새벽에 달려가보니 아찔했다. 감독과 연출부가 넋을 빼놓고 바라보고 있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 장면인가. 수미쌍관으로 영화를 시작하고 끝내는 건데.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있었고, 각종 해외영화제 일정도 있어서 촬영을 늦출 수도 없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공사현장 담당자에게 공사를 중단하고 촬영하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공사 발주처를 찾아 사정한 끝에야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그걸로 다 끝나는 건 아니었다. 물길도 다시 돌리고, 공사용 비계도 다 뜯어내고, 자갈밭도 옛날 모습으로 만들고…. 촬영하고 그 모든 걸 다시 공사판으로 원상복귀했다. 그 비용과 시간이라니….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보강공사도 아닌 공사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 귀띔해줬다. 남은 예산을 소진하느라 치른 돈쓰는 공사였다고. 그러고 보니 연말이었다.

최민식

/ 영화배우

스탭이 손가락 인대 끊어지고도 촬영준비 하는거 봤을때

<올드보이>에서 주인공이 모교를 찾아가는 장면을 찍을 때 일이다. 진주 상록고등학교에서 찍었는데 학교 계단이 아주 가팔라서 얼핏 보기에도 위험했다. 밤에 미술부인 이청미씨가 그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가 났는데 손가락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무척 아프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촬영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배우로서 힘들고 짜증나고 귀찮고 그럴 때 함께 영화를 찍는 스탭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내게 힘이 된다.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싶고. 그건 새벽에 촬영장에 도착해서 스탭들을 볼 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목장갑 끼고 부지런히 조명기를 옮기고 세트에 칠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 이게 진짜 영화 속 장면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문성근

/ 영화배우

거센 파도, 배멀미도 모른 채 촬영 끝났을 때

전라남도 완도에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촬영 때의 일이다. 유영길 촬영감독이 그림이 안 나온다며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야겠다고 선주(船主)에게 요구했다. 선주는 ‘지들이 나가면 얼마나 나가겠어’ 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제작진을 태운 배가 점점 부두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파도는 점점 거세졌고, 선주의 얼굴은 이내 사색이 되어갔지만, 유 감독은 그래도 성이 안 차는지 뱃머리를 돌리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카메라를 잡는 데만 그는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유 감독뿐이 아니었다. 박광수 감독과 다른 스탭들 모두 앵글에 걸리지 않기 위해 때론 모두 갑판에 누워 배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성난 물세례를 맞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불평이 없었다. 파도에 몸을 맡긴 배가 요동을 치는데도 심지어 주변에 배멀미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래 다들 미쳤구나, 영화에 미쳤구나. 촬영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집단적인 광기에 휘말려 취해 있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열정을 토하던 그때가 몹시 그리워진다.

이미연

/ 영화배우

정광석 감독님이 꾀부리는 나를 혼냈을 때

오래된 얘기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벼락스타가 된 뒤에 만난 첫 영화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였다. 그때 많이 어렸기 때문에 강우석 감독님이나 이춘연 상무님이나 모두 날 굉장히 예뻐해줬다. 현장에서 주연배우는 예나 지금이나 다들 유리그릇 다루듯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그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무용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풀숏 촬영이라는 걸 알고 꾀가 났다. 그래서 대충 해버렸다. 이 많은 아이들 중에 내가 보이겠느냐 싶어서. 그때 어디선가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너 열심히 안 할 거야?” 정광석 촬영감독님이었다. 나의 불성실한 태도를 참을 수 없으셨던 거다. 울었던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 자존심에 그 자리에선 의연한 척했을 거고, 아마도 엄마 앞에서 울거나 하소연하거나 했던 것 같다. 현장에서 누군가에게 호되게 야단 맞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기억 때문에 아무리 작은 신이라도 언제나 나의 100%를 다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곤 한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정광석 감독님이랑 작품을 같이한 적이 없었는데, 그분에 대한 고마운 마음만은 늘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