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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영화인 25명에게 듣는다.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The Best Moment‥)

“마음 같아선 계속 찍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는 끝이 있어야 했고 결국 칸영화제에 맞춰 촬영을 끝냈다.” <화양연화>의 DVD에 들어 있는 인터뷰에서 왕가위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그가 <화양연화>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왕가위는 “영화를 찍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덧붙인다.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는 사라진 사람들, 잃어버린 시간들, 잊었던 감정들이 탄생하는 그곳을 영영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막 해가 떠서 대지의 이슬이 상쾌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아침, 지평선이 펼쳐진 초원에 100명이 넘는 스탭과 연기자들이 촬영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꿈이 이뤄지고 있는 걸 실감했다.” 중국에서 <무사>를 찍고 있을 때 김성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과 살을 에는 대륙의 한파와 싸우면서도 그때 그는 행복해 보였다. 평생 한번도 찍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질 때 감독이라면 누구나 맥박이 빨라지는 걸 느낄 것이다. 촬영현장의 그런 흥분이 아니라면 육체의 한계를 돌파하는 에너지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 조명기로 환히 밝혀진 현장을 보면 빛이 나를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빛에 끌려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 거 같다.” <나쁜 남자> <광복절특사> 등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박민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빛의 마력이 무엇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했지만 그를 매혹시킨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나방을 유혹하는 불빛처럼 현장의 조명기는 밤을 낮으로 뒤바꾸고 인물의 표정을 조각상처럼 빚어내는 마술을 부리면서 그의 몸을 전율케 했을 것이다.

영화를 찍는 현장은 묘한 곳이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에 홀려 여기 도착한다. 처음엔 관객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일단 이곳에 도착하면 또 다른 무언가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건 내가 나오는 혹은 내가 참여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열망만은 아니다. 또는 빨리 조수를 그만두고 감독이나 기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현장의 불빛에 이끌리고, 누군가는 그날의 고된 노동에서 성취감을 느끼며, 누군가는 어깨를 다독여준 그 사람을 잊지 못해 다시 이곳에 온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성토하다가도 찍던 영화가 중간에 무산되면 내 아이를 잃은 것처럼 가슴아파하는 사람들,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요구에도 군말없이 일단 한번 해보는 사람들, 단지 영화 한편을 찍기 위한 한시적 만남인데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들, 촬영현장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헌신성과 자발성을 다른 직장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 그들은 마조히스트처럼 더 많은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피로와 아픔을 참을 수 없던 순간, 심지어 죽음을 넘나든 경험이 별안간 희열과 환희로 돌변해 전설처럼 회자된다. 무엇이 그들에게 자발적 희생을 부추기는 것일까?

<씨네21>은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영화인들에게 ‘나를 매혹시킨 영화현장의 기억’을 떠올려달라고 했다. 사각 프레임의 바깥에 존재하는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을 엿보고자 함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를 보여주는 그 기억들은 교과서나 이론서에 나오지 않는 생생한 체험의 산물이다.글 남동철 namdong@hani.co.kr·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송강호

/ 영화배우

<반칙왕> 레슬링 장면 위해 고통 속에서 보낸 열흘

<반칙왕>을 찍을 때 일이다. 열흘간 성남실내체육관에서 레슬링 장면만 집중적으로 찍었는데 (전화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변하면서) 아, 잠깐만요, 저기, 아,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가는 거 같은데, 아, 아∼, 에이, 별거 아니네요. 하하하. (송강호다운 농담!). 그때 낮에는 자고 밤에 찍었다. 체육관에 햇빛이 들어오니까 낮에는 못 찍고 밤마다 시작해서 동틀 때까지 찍는 식이었다. 낮밤이 바뀌어서 열흘간 찍는데 격렬한 레슬링 장면이다 보니 7일쯤 지났을 때는 옷을 벗어보면 온몸에 멍이 들어서 얼룩덜룩했다. 그러면서도 현장에서 “힘들다”는 소리는 못하던 때였는데 그날 옆방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내게 레슬링을 가르쳤고 스턴트맨으로 상대역을 맡았던 이인섭씨가 그 방을 썼는데 혼자 우는 거였다. 여관방이라 벽이 얇아서 그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날은 정말 힘든 장면을 찍었는데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현장에선 표현을 못하면서 혼자 울고 있었던 거다. 사실 그때는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반칙왕>이 개봉하고나서 술자리에서 물어봤더니 정말 너무 아파서 울었다고 말하더라. 그날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배우를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스턴트맨이라는 프로의식 때문에 현장에선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신음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거다. 그 울음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진정 영화현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프로다운 열정을 느꼈다고 할까. 엄청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보낸 그 열흘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인섭씨는 지금 성룡의 영화에서 스턴트맨으로 일하는데 언젠가 캐나다에서 전화를 해온 적도 있다. 사람들은 촬영현장이 화려하고 평온하고 화기애애한 줄 알거나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남 모르는 고통을 속으로 삼키는 스탭과 연기자가 있다. <반칙왕>의 레슬링 장면을 찍었던 그 열흘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공기가 감싸고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현장이 어떤 것인지, 그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그날의 울음소리엔, 그날의 공기엔 그것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박찬욱

/ 영화감독

연출부 시절 D 카메라 맡고 처음 `레디 액션` 외쳤을대

처음 연출부를 한 작품이 이장호 감독이 제작하고 유영진 감독이 연출한 <깜동>이었는데 그때 기억이 많이 난다. 당시로선 하늘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장호 감독이 어느 날 현장에서 날 보더니 “그놈 얼굴 좋다. 감독되겠다” 하시는데 무슨 근거로 말한 건지 모르지만 기분이 아주 좋았다. <깜동>은 사극이라 산골에서 많이 찍었는데 낮 촬영을 끝내고 철수할 때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내려와서 다른 사람들이 짐을 들고 철수하는 걸 봤는데 막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을 때였다. 산의 능선에 해가 반쯤 걸린 채 노을이 졌는데 스탭들이 장비를 들고 내려오는 실루엣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카메라를 멘 사람, 조명기를 짊어진 사람, 배터리를 들고 있는 사람 등 일군의 스탭이 내려오는 모습이 그림처럼 예뻤다. 연출부 막내를 하면서 고된 일이 많았지만 그 순간만은 환희를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예전처럼 심하지 않지만 <깜동> 때만 해도 연출부 막내는 밥도 빨리 먹어야 했다. 내가 양손잡이라 한손에 숟가락, 다른 손에 젓가락을 들고 밥을 무척 빨리 먹어서 귀여움을 받았던 생각도 난다.

한번은 군중신을 찍느라 카메라 4대를 돌린 적이 있다. 감독이 혼자 카메라 4대를 관장할 수는 없으니까 연출부가 1대씩 책임을 졌는데 내게 D카메라가 맡겨졌다. 엑스트라만 나오는 인서트 장면이고 카메라 앵글이나 연기가 다 정해진 것이었지만 그때 처음 “레디 액션”을 불렀다. 내가 “레디 액션”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감동스러웠던 순간이다. 요즘 내 영화 연출부하는 친구들 보면 옛날 생각이 날 때가 많다. 막내부터 조감독까지 하면서 그때 나는 형편없는 연출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연출부들은 옛날 나보다 훨씬 잘하는데 그래도 야단을 칠 때가 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옛날 나보다는 훨씬 나은데….’

정두홍

/ 무술감독

뒤통수로 차 앞유리창 깨고도 두발로 병원 걸어갈 때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를 찍을 때였다. 무술감독이라는 직함을 단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맞은 영화였고, (지금이야 가장 좋아하는 영화계 선배지만) 감독이라는 자의 기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에 부딪쳐 앞유리창이 깨지고, 내가 튕겨져 나가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자동차 유리창이란 게 보통 힘으론 깨지지 않는다. 해서 나는 어깨와 몸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충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튀어올랐다. 웬걸, 유리창은 보란 듯 멀쩡하다. NG다. 다시 한번. 유리창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몸이 솟구쳤다. 유리는 여전하다. 몸을 추스르는데 휘청한다. 어딘가에 있는 뼈 몇개가 부러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도 발동해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퉁, 퉁…. 감독은 난감한 표정이다. 거듭되는 NG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미친 것 아닌가, 하고 고민하는 것 같다. 다섯 번째던가. 다시 몸뚱이로 받으려고 유리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충돌의 극히 짧은 순간, ‘불길하다’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쿵. 머리가 유리창에 부딪친 것이다. 그것도 뒤통수로. 그런데 난 죽거나 혼수상태가 되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졌기 때문이다. 단단한 몸통으로도 안 깨졌던 유리가 말랑말랑한 머리로 바스라지다니. 이건 분명 내 힘으로 한 것일 리가 없었다. 내 발로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액션의 신(神)’, 또는 ‘영화의 신’의 존재를 믿게 됐다. 그리고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물론 그때만이 아니었다. 이 정체모를 강력한 힘은 차에 받혀 고꾸라질 때 도로와 인도 사이에 튀어나온 경계석쪽으로 떨어지던 머리를 끌어당겨줬고, 난간에서 난간으로 붕 뛸 때 내 힘이 모자라는 만큼을 비행하게 해줬고, 잡히지 않던 브레이크를 결정적인 순간 작동하게 해줬다. 스턴트는 자기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니, 항상 자만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다 그 거대한 힘을 믿기 때문이다.

박흥식

/ 영화감독

내 실수를 껴안아주었던 문성근 선배님과의 술자리

93년 여름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찍을 때 우리는 전라도에 있는 자개도라는 작은 섬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그곳은 아름다운 섬이었다. 돈은 못 벌지만 그래도 한 낭만하는 영화스탭들은 밤이 되면 파도 소리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유독 아름다운 밤하늘, 쏟아져내릴 듯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박혀 있는 밤하늘의 별을 안주 삼아 거의 매일 술판을 벌이곤 했다. 문제의 그 전날 밤도 나는 함께 연출부를 했던 허진호 감독, 오승욱 감독 등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영화를 논하다가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배우 담당이었던 나는 촬영 내용을 배우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마을회관으로 갔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안내방송을 해서 촬영장소로 모이게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숙취 때문인가 좀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마이크를 들었다.

“연출부에서 알립니다. 오늘 촬영은 운동장에서 하는 인민재판신인데요 출연하실 배우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호명하는 분들은 00시까지 학교 운동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저기…(머뭇) 시간관계상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안성기 선배님, 김용만 선생님, 허준호씨, 문성근.한번 더 안성기 선배님, 김용만 선배님, 허준호씨. 문성근.”

부랴부랴 안내방송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더니 연출부들이 웃고 난리였다.

“존칭은 생략한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선배님, 선생님 붙여주고 왜 문 선배만 빼요?” “내가?”

“그것도 두번씩이나.”

정말 몰랐다. 가뜩이나 얼굴이 잘 빨개지는 나는 내가 한 실수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얼마 뒤 학교 운동장에 촬영팀이 전부 모였다. 저쪽에서 안성기 선배님, 문 선배님 등과 이창동 감독님(당시 조감독) 그리고 박광수 감독님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창동 감독님이 나를 보더니 “니 문 선배한테 감정있나?”

그리고 누군가는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안성기 선배님, 허준호씨, 문성근” 하고 되뇌고….

그 말에 한바탕 왁자하게 웃고 나는 얼굴이 더 빨개지고…. 그날 촬영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쭈뼛쭈뼛 문성근 선배님 앞으로 갔다. 사과를 드렸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는 상태라서 그랬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드렸다.

문 선배님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를 껴안아주셨다.

“자식 소심하긴, 임마 농담이지. 너 놀리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진짜 웃겼어.”

그때 나는 28살. 작은 실수에 전전긍긍하고 농담도 이해 못하는 순진한 나이였다.

그날 밤, 문 선배님과 함께 술을 마신 것 같다. 하늘에선 여전히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을 잘 껴안는 문성근 선배님, 작은 일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나를 껴안아줬던 문 선배님이 정말 따뜻하고 고맙다. 지금 준비하는 영화의 헌팅 때문에 섬에 갈 때면 그때 일과 문성근 선배님이 생각난다.

조재현

/ 영화배우

물에 빠져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갔던 순간

<섬>을 찍을 때 죽을 뻔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드라마도 찍고 변혁 감독의 <인터뷰>에도 출연하고 있던 때라 정신없이 바빴는데 ‘의리 출연’이라는 명목으로 <섬>을 찍으러 갔다. 전날 밤샘 촬영을 하고 도착해서 몸이 좋지 않았는데 물속에 들어가서 죽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저수지 물이 얕은 곳에서 찍었는데 몸이 자꾸 물에 뜨는 바람에 허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게 됐다. 모래주머니를 두르고 물밑에선 스킨스쿠버 한명이 날 붙잡고 있는 식으로. 물에 빠진 다음 세번 허우적대다가 물속으로 들어가서 속으로 천천히 열을 세고 나오기로 약속했는데 몸이 피곤해서 그랬는지 금방 숨이 차올랐다. 간신히 속으로 10초를 세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스킨스쿠버가 허리를 잡은 채 놓지를 않았다. 급한 마음에 그 친구를 발로 찼는데 발로 차고 나오려고 하는 순간 발밑에 디디고 있던 땅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아차 싶더라. 단 몇 cm 차이로 저수지의 얕은 지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허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상태라 수영을 해도 물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밖을 쳐다보니 감독과 스탭이 모두 웃으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저렇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싶더라. 자존심은 있어서 그래도 “살려달라”는 말은 안 나왔다. 겨우 나온 소리가 “씨발”이라는 한마디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튜브를 던졌고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뒤론 물이 너무 무섭다. 죽음이 정말 눈앞에 보이는 걸 경험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조민환

/ 나비픽처스 대표

<무사> 촬영 끝나자마자 스탭들이 와락 끌어안을 때

“스탭들이 우릴 가만 안 두겠지?” <무사>의 마지막 촬영이 있었던 2000년 12월22일 중국 싱청(興城), 지프를 몰아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김성수 감독에게 말을 건넸다. 장장 5개월 동안 중국 대륙을 누벼가며 그토록 고생을 시켰으니 ‘해방의 날’을 맞은 스탭들이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앙갚음을 하리라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촬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악에 받친 스탭들이 공공연히 ‘촬영 쫑날’을 벼르고 있다는 소문 또한 익히 듣고 있었던 터였다. “아, 뭐 각오해야지. 야, 차라리 얻어맞고 병원에 누워 있는 게 편하기도 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김성수 감독에게 나는 말했다. “형, 난 다 좋은데, 만약 바닷물에 빠뜨리면 어떡하지?”

사실, 이 경사스런 날 스탭들에게 고초를 당한들 어떠하리,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한겨울의 차가운 바닷속에 몸을 담근다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 어차피 맞을 매, 할 수 없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각오로 촬영장을 찾은 나는 싱청 토성 앞 이름 모를 이의 무덤 5구와 지신과 천신, 4방위신 등에게 정성들여 제례를 올렸다. 여기에 와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큰 사고없이 무사히 촬영을 마치게 된 데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의 도움이 있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1월이면 눈이 쏟아진다는 이곳에 그때까지 눈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눈이 내리게 되면 촬영이 무기한 연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은 낮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촬영은 곧 끝날 분위기였고, 우리에 대한 ‘처단’의 순간 또한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기껏 각오를 했건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그런지 점점 맞고 싶지도 않고 물에 빠지고 싶지도 않다는 본능이 울컥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포자기의 심정과 도망칠 구석을 찾는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정우성이 전날 찍은 장면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며 다시 찍어야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야호!’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밤장면 촬영을 독려했다. 밤이 되면 최소한 어두운 바닷물에는 안 빠지는 거니까. 결국 여차저차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고 이제 우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서울행 비행기에 탈 수는 있을까, 아님 중국의 병원 입원실을 예약해야 하나,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기념촬영을 한단다. 경계를 풀지 않고 ‘찰칵’ 포즈를 취했다. 그때 스탭들이 나와 감독에게로 달려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찬 함성과 함께 그들이 나를, 허리가 흐드러지게 끌어안았다. 스탭들은 나에 대한 사소한 감정보다 이 어마어마한 작업을 끝냈다는, 그것도 우리 힘으로 돌파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선 하염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다음날 싱청을 떠나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도착한 뒤 중국 스탭들에게 전화를 하니 폭설이 세트장을 하얗게 뒤덮었단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하루를 기다려준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