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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1]

판타스틱 열흘을 위한 불면의 5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지금 중반에 접어들었다. 관객(독자)의 최대 관심은 무슨 영화를 볼까 하는 선택의 문제일 것이고, 본 영화들과 볼 영화들로 화제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막 5일 전부터 개막 직전까지의 그 시간을 다시 헤아려보기로 한다. 객석과 스크린 사이의 충만한 교감의 시간이 아니라, 텅 빈 극장과 그 바깥에서의 분주함으로 이분되어 있는 노동의 시간에 대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무국을 들락거리며 같이 걸어본 개막 직전 5일간의 동행기. - 편집자

Prologue

장철의 황홀경에 넋이 나가고, <문 차일드>의 발칙함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영화의 신선이 되어 있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하는 영화제 개막 전 사무국 풍경으로의 ‘플래시백’. 190여개의 판타지를 위해 1분 1초도 쉬지 않고 땀흘려 준비하는 현장,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축제는, 기어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자막 삼매경에 빠져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자막 요원.

천줄의 대사, 빨간 눈의 자막요원

“아마 지금 가장 바쁜 건 기술팀일 거예요.” 영화제 방문 첫날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일러준 대로 찾아간 기술팀. 아니나 다를까, “지금 말 걸지 마세요. 바쁘거든요”. 큐타이틀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자막 스포팅 작업을 하는 황균민씨. 몰래 내다보다 잠깐 쉬는 듯해서 한발 내디디려 했더니만, 지금 무슨 짓이냐,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투로 싸늘하게 대한다. <내겐 너무 멋진 서쪽 나라>라고, 영화제목을 불러주는 것을 서둘러 받아 적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곧장 이어폰으로 귀를 봉하고 온 정신을 모니터에 쏟는 황씨에게 더이상 말을 걸래야 걸 수가 없다. 자막 감수 업무를 맡고 있는 이현정씨는 프리뷰 테이프와 프린트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대사를 끊고 지속 시간을 체크하는 스포팅 작업이 급하다고 설명해준다. 올해 상영작 규모는 지난해에 비해 50편 정도 늘었다.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진 것일까? “그거야 사전에 충분히 예상이 되죠. 자막 업무 인력과 기간을 늘렸기 때문에 밤샘작업은 오히려 줄었어요.” 이현정씨가 덧붙이지만, 영화제라면 언제든 속 썩이는 영화 한편쯤은 있게 마련이다. 전날 새벽까지 작업한 뒤 이날도 밤 10시가 되어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뗀 황씨는 “대사가 1천줄이 넘는 영화라 힘들었다”면서도 “적어도 꼬박 이틀을 투자해야 했던 처음보다는 많이 늘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상영관에서 프로그래밍된 자막을 운용하는 일만 남았다. 릴이 바뀌어 영사속도가 달라지거나 24프레임의 속도로 촬영되지 않은 장면의 경우, 순발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자막을 쏘지 못하면 관객이 당황해하는 건 당연한 일. 황씨의 불안이 영화제 폐막까지 계속되는 건 그런 이유다.

기술시사 일정이 잘못 전달되는 통에 안 그래도 바쁜 기술팀이 더 바빠졌다

이거 百畵百色이니 정신이 없죠

“감독도 안 돼, 프로그래머도 안 돼.” 기술팀에서 필름 담당 스탭으로 일하는 양희찬씨가 스크리닝 매니저인 조해원씨에게 영사실 출입은 누구도 안 된다고 다시 한번 일러준다. 기술팀의 업무를 총괄하는 송미선 팀장에게서 양씨가 국내에서 열리는 여타 국제영화제까지 석권한 일꾼이라는 사실을 듣고 있는 동안 낮지만 위협적인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이해는 하는데 체크할 시간 정말 부족하거든요.” 영사기사를 붙잡고 릴 앞에서 필름을 꺼내들고 있는 상황을 연출하려고 하는 사진기자에게 양씨는 협박에 가까운 양해를 구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개막식이 열리는 시민회관쪽에 기술시사 일정이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1시간 뒤면 리허설을 위해 무대 공사가 진행된다. 이 때문에 어떻게든 그 시간까지 개막작인 <원더풀 데이즈>를 비롯해서 이곳에서 상영될 각기 다른 화면비율(1.85:1, 1.66:1, 1.33:1 등 필름 사이즈뿐 아니라 사운드 녹음방식도 제각각이므로 기술팀은 해당 상영관에서 직접 프린트를 돌려 세팅해야만 한다)의 영화들을 직접 틀어봐야 한다. 그에 맞게 렌즈를 조정하지 않으면 화면의 일부가 잘려져 나가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사고가 벌어진다. 기술시사는 상영을 위한 최종 단계. 그 전에는 영화제를 도는 프린트들의 상태가 양호한지를 일일이 체크해야 한다(일부 국가에선 영화 프린트가 생선이라도 되는 듯 프린트를 종이에 둘둘 말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양씨가 수색병처럼 영사실 창에 눈을 바짝 대고 제대로 영사가 이뤄지는지 확인하는 동안 조해원씨는 1층과 2층을 부지런히 오가며 사운드를 체크한다. 1200석이나 되는 대규모 상영관이라 1층과 2층, 그리고 중앙과 주변의 사운드 크기가 달라도 뾰족한 수는 없다. 하지만 조씨는 송 팀장과 함께 조금이라도 균일한 사운드가 울려퍼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다.

개막식을 위한 마지막 작전회의가 진행 중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호천사들이 있잖아요

부천영화제를 수호하는 초록천사들이 모여 축제에 앞서 벌이는 또 하나의 내부 축제, 자원활동가 발대식. 총 216명의 자원활동가들은 6 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부천영화제의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여기 모인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71살의 나이에 올해 최고령 자원활동가로 일본어 통역을 맡고 있는 조연채씨, 올해부터 18살 미만 제한이 풀려 처음으로 고등학생 신분으로 참여하게 된 김가영, 김규석씨, 그리고 자원활동팀장 채홍필씨의 메일함에 무려 세번에 걸쳐 “왜 자신이 부천영화제의 자원활동가가 되어야 하는지를 10페이지 분량의 리포트로 작성하여 협박성 메일을 날렸다”는 김치영씨까지 모두가 즐거운 표정들. 기념촬영을 위해 300명쯤 올라서니 무대가 넘친다. 이해광 미디어콘텐츠팀장의 선창에 따라 울리는 소리. “파이팅!” 영화제 기간 동안 보지 못할 영화 갈증을 사부의 <드라이브> 한편으로 위안받으면서도 이들만큼 행복한 사람들은 여기 없어 보였다.

하지만, 웃고만 있다고 해서 축제가 되겠는가? 저녁 7시가 넘어서 40여명의 영화제 팀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개막 전 마지막 전체회의를 갖는다. 기획팀장 정범씨는 “원래는 하이테크를 이용해서 쏘려고 했지만, 장소가 안 돼서 3년 연속 그림을 그려 설명한다”는 농담으로 부드럽게 회의 시작을 알린다. 보드판에는 개막식 장소인 시민회관의 내부 조감도가 그려져 있고, 각 팀원들에게는 “개·폐막식 인원배치 및 역할”에 대한 일정들이 분배된다. 입장권 미소지자 문제에서부터, 개막식에 들어서는 게스트들의 동선, 그리고 그들을 안내하는 요원들의 자리배치, 개·폐막식의 변수인 취재진들 처리문제(물리적인 행사 이외에 이들을 정돈할 길은 좀처럼 없다고 한다), 셔틀버스 운행, 행사장 외곽 안내에까지 꼼꼼한 마지막 작전회의가 진행된다. 작전은 끝났으니, 능숙한 대처와 수습만이 남았다.

홍보팀의 불꺼지지 않는 밤

옆방에서 모든 스탭들이 참여하는 개·폐막식 시뮬레이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홍보팀 내의 ‘고급 인력’으로 추앙받는 석민내씨는 사무국에 홀로 남아 진땀을 흘리고 있다. “지금 이쯤이면 붙이고 있어야 하는데.” 지하철 역사를 비롯해 각 상영관에 배치될 예정이었던 안내 게시판 스티커 크기에 문제가 생겨서다. 오전에 인쇄작업이 이미 끝난 스티커의 경우, 너무 커서 문구를 잘라내지 않으면 부착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서류를 너무 믿은 게 탈이죠.” 안내판 실측을 꼼꼼히 챙기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그는 새 시안 디자인을 위해 꼼짝없이 밤을 새워야 하는 처지다.

그 개막식표는 거기 없었다?

자정이 다 되어간 시각. 사무국은 휑하다. 개·폐막식 시뮬레이션 회의가 끝난 뒤 스탭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다들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한 무리는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시내 거리로 나들이를 행한 듯하고, 또 한 무리는 기진맥진한 몸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보고자 숙소의 욕실로 향한 듯하다. ‘뭐, 별일 있겠어.’ 고단한 기자(기록하는 이라기보다 기생하는 자에 가까운)는 사무국이 마련해준 숙소로 향하기 위해 뒷걸음친다. 사무국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뒤편에서 ‘뚜걱뚜걱’ 낮지만 빠른 구두소리에 맞춰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모 팀장의 부산 사투리가 뒤섞여 들린다. 긴급상황인가. 그러나 게으른 기자는 숙소의 침대로 향한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채홍필 자원활동 팀장이 침대에 늘어진 기자가 한심해 보였는지 한마디 던진다. “10분 전에 정말 긴박했는데!” 축 늘어진 상태였던 눈꺼풀이 갑자기 팽팽해진다.

이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게시판에서 그런 긴박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서둘러 3층 아래 현장에 도착(?)하자, 발빠르기로 소문난 이해광 미디어 운영팀장(그는 영화제가 개막하면 온갖 사고를 도맡는 상황실장으로 변신한다)이 티켓 나눔터 게시판에 해명글을 올리기 직전이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재연하면 이렇다. 프로그램팀의 김지연씨는 우연히(처음에는 심심해서라고 했다가 스탭의 의무라고 말을 바꿨다) 영화제 홈페이지를 뒤지다 이상한 글을 보게 됐다. 개막식 좌석표를 팔고 싶으니 연락을 달라는 글이 올려져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 “이게 어찌 된 일인가.”(부천영화제는 올해부터 실명 좌석제를 운영하며, 초청 대상 인사들의 경우 일일이 참석 여부를 확인했다) 배우 방은진씨의 자리가 탈취당할 위기에 처한 것임을 알아차린 옆자리의 정민아 초청팀장은 김 위원장에게 보고한 뒤, 이 팀장과 함께 함정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표를 사고 싶은데요.” 도둑맞은 초대장의 경위를 알기 위해 메시지를 남겼으나, 범인은 천연덕스럽게 한마디만을 남겼다. “제가 졸리거든요. 내일 통화하죠.” 우편으로 보낸 초대장을 훔쳐 한몫 챙기고자 했던 범인은 이후 편히 잠을 청했겠지만, 그 사이 인터넷의 관련 글은 “선의의 피해자가 없길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글로 대체됐다.

조율은 피아노만 하는 게 아니죠

“이거 이렇게 나가면 안 돼지.” 큰 목소리는 홍보팀장 김래영씨에게서 먼저 들려왔다. 인터넷에 오른 기사내용에 오보의 여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내용에 협찬사와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당연히 동분서주하는 것은 기획팀 마케팅 담당 오승환씨. 기사를 하나 막으니, 다음에 등장하는 문제는 현수막 문구. 표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로고는 어디에 넣을 것인가 한참을 밀고 당긴다. 하루종일 누구보다도 전화통을 오래 붙잡고 있는 오승환씨는 협찬사들의 행사부스 설치 일정과 내용을 확인하는 동시에 영화제와 협찬사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느라 바쁘다. 때때로 협찬에서 한발 밀린 경쟁사에서 “돈 먹었냐”는 투로 비아냥거리거나, “잘 보여야 할 거”라는 식으로 윽박지를 때는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영화제 마케팅의 생명은 “영화제의 이미지와 그 협찬사의 요즘 사업성향을 비교분석하여 서로의 이익을 조율하는 것”이라고 일파한다. 연이어 담배 세대를 피운 그 ‘조율사’는 다시 전화를 받으로 성큼성큼 사무실로 향한다.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1]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