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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2]

<카시 삼부작> 감독 고드프리 레지오

자연을 노래하는 무언(無言)의 주술사

대사도 없다. 미모의 주인공도 없다. 짜릿한 유머도 액션도 없다. 그러나 지난해 개최된 부천영화제에서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몇몇 영화들을 특별히 흥미롭게 본 관객이라면, 올해 부천영화제가 마련한 고드프리 레지오의 <카시 삼부작>(Qatsi Trilogy)- 여기서 ‘카시’는 호피 인디언 말로 ‘삶’을 의미한다- 을 보기 위해 서둘러 상영관을 찾았을 수도 있겠다. 압도적인 비주얼과 주술적인 사운드로 우리의 넋을 빼놓는 레지오의 영화들은, <파타 모르가나>(1971)나 <어둠의 교훈>(1992) 같은 헤어초크 영화들에 매혹되었던 이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기에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로는 삶을 묘사할 수 없어”

부천에서 만난 고드프리 레지오는 자신이 만든 작품들에 딱 어울릴 법한 풍채를 지닌, 그리고 느긋하고 차분한 말투와 부드러운 미소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학자풍의 노신사였다. 가령 인터뷰 도중 헤어초크 영화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일단 헤어초크 영화들과 자신의 영화들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하면서 <카시 삼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코야니스카시>(1983)와 헤어초크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헤어초크는 <코야니스카시>를 처음 극장에서 보고 난 뒤에 주위 사람들에게 “저런 영화는 내가 <파타 모르가나>를 통해 이미 다 해놓은 것을 다시 시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레지오는 이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불쾌한 기색 따위는 전혀 내비치지 않고 오히려 재미나다는 듯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몇몇 헤어초크의 영화들을 매우 흥미롭게 보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1940년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고드프리 레지오는 14살에 가톨릭 수사(Brother)에 입문, 오랜 기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그 당시 아직 영화작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가져보지 않았던 그는 돈이 없어 학교를 떠난 아이들과 거리의 폭력배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공동체조직을 1963년부터 운영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불량소년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상급자와의 마찰로 인해 1968년에 그곳을 나오게 된다.

1970년대 초반에 비영리단체 활동 및 캠페인 등을 통해 미디어와 예술,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활용에 관해 고민하던 레지오는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내겐 천사와도 같았던”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비로소 그의 첫 영화 <코야니스카시> 작업에 착수한다. 1975년부터 1982년까지 무려 7년 동안의 오랜 작업기간을 거쳐 제작된 <코야니스카시>는 그의 말대로 전문적인 능력을 지닌 여러 스탭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영화다. 스탭 가운데 일부는 길고 지루한 작업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영화제에 초청받아 오게 된 것은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이지 결코 한 영화의 작가로서 오게 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호피 인디언 말로 ‘균형을 잃은 삶’을 의미하는 제목을 단 <코야니스카시>에서 레지오는 자연과 문명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별다른 내레이션이나 대사없이, 그저 필립 글래스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장엄하고 때론 묵시록적인 이미지들의 향연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비단 <코야니스카시>뿐만이 아니라 다른 ‘카시’ 연작들, “지구촌이라고 하는 주제를 다룬” <포와카시>(1988) 및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자연”을 묘사한 <나코이카시>(2002)에서도 레지오는 철저하게 언어의 사용을 억제한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말, “언어는 더이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묘사할 수 없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런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는 힘들다. 다만 파괴적인 테크놀로지들의 뿌리가 된다고도 볼 수 있는 일차적 테크놀로지로서의 언어에 대한 의심, 그리고 신의 ‘말씀’이 기록된 일종의 경건한 책으로서의 세계가 그러한 언어-테크놀로지에 의해 손상되고 있다는 판단 등을 그러한 진술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기에 레지오는 종종 숭고하고 장엄하며 신비스러운 자연, 즉 ‘말씀’ 자체의 현현에 이끌린다.

아마 이러한 레지오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는 70종이 넘는 각종 동물들이 등장하는 30여분짜리 단편 <아니마 문디>(1991)- ‘Anima Mundi’는 ‘세계의 영혼’을 의미- 일 것이다. 거기서 레지오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따온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이 세계는 진실로 영혼과 지성을 타고난 살아 있는 존재… 하나의 단일한 살아 있는 실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레지오의 작업에 대해 “언제나 전적으로 인간이 없는 세계 속에서만 발견되는 아름다움”(로저 에버트)이라고 말하며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코야니스카시>에서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패스트모션으로 보여지는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인간들의 움직임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장시간에 걸친 지루하고 반복적인 촬영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문명이 기반하고 있는 빠른 속도감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러한 촬영기법을 활용할 때 스스로가 모순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고 레지오는 술회한다.

묵시록의 예언자처럼

레지오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레지오의 영화에 관해 말할 때 작곡가 필립 글래스의 존재를 빠뜨릴 수 없다. 필립 글래스는 레지오의 영화에서 헤어초크 영화의 포폴 부와도 같기 때문이다. 레지오는 “그의 음악을 들을 때면 온 영혼이 고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사실 <코야니스카시> 작업 당시 필립 글래스와 협력하는 것에 관해서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쇼팽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삽입할 것을 권유했지만, 레지오는 “현재 살아 있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일을 해나가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의 귀를 사로잡았던 필립 글래스와의 작업을 고집했다. 결과적으로는 레지오의 판단이 옳았음이 밝혀졌고, 필립 글래스의 <코야니스카치> 음악이 담긴 음반은 지금까지도 영화음악 최고의 명반 목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삼부작의 두 번째 영화인 <포와카시>- ‘변화 중인 삶’을 의미- 는 <코야니스카시>에 비해서는 비교적 짧은 기간(1985∼88) 동안 작업이 이루어졌다. <코야니스카시>를 통해 얻은 명성으로 좀더 폭넓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예컨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 같은 감독들이 이 영화의 제작 및 배급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레지오는 <포와카시> 촬영을 위해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곳만 해도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케냐, 이집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홍콩, 중국, 독일, 프랑스, 인도 그리고 네팔 등 13개 국가에 이른다.

레지오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묵시적인 경고의 분위기는 <포와카시>에서 상당 부분 사라졌고 필립 글래스의 음악 또한 그에 걸맞게 주술적인 영역으로부터 멀찍이 빠져나온다. 고속촬영을 통해 얻어진 느린 움직임의 이미지들은 현대적 삶의 속도감을 비판적으로 응시하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및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라는 주제에 천착한다. 그러나 어딘지 <포와카시>는 그간 우리가 익숙히 보아온 환경 캠페인이나 베네통 광고 같은 느낌을 주며 나아가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긴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부작의 완결편이자 가장 최근작이기도 한 <나코이카시>- ‘전쟁으로서의 삶’- 에 대해 레지오는 간명하게 “낡은 자연을 대체한 새로운 자연”에 관해 다룬 영화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는데, 레지오 자신이 그러한 테크놀로지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는 <나코이카시>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 바로 그 자체의 도움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점에서 역시 모순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좀더 커다란 위험에 대한 일종의 백신”으로 생각해달라고 전한다. 그것은 흡사 스스로 묵시록의 예언자이기를 자처한 듯한 이 기이한 영화감독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자기규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부천에 온 그의 영화 <카시 삼부작>숭고한 자연이여!

고드프리 레지오가 지금까지 제작한 영화는 장·단편을 합쳐 여섯편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장편 길이를 지닌 것은 이번 부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이른바 <카시 삼부작>뿐이며, 나머지 세편은 30분 이내의 단편들이다. 단편들 가운데 <아니마 문디>는 베네통사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만일 이번 부천영화제에서 고드프리 레지오의 영화를 감상할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는 이가 있다면 올해 말 LG아트센터에서 필립 글래스 앙상블의 연주와 함께 상영될 <코야니스카시>와 <포와카시>를 기다려봄직도 하다. 오랜 기간의 작업 끝에 완성된 레지오의 대표작 <코야니스카시>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상파울루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레지오의 영화들을 특징짓는 주제들은 자연과 문명의 대립, 변화하는 환경, 생태계의 신비, 그리고 숭고한 자연에 대한 찬양 및 테크놀로지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의 영화와 뉴에이지와의 관련도 종종 언급된다.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1]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2]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감독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