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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연속기획2 - 다시 만나는 청춘스타들 [2]
박은영 2003-08-01

"나는 네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열혈남아>의 유덕화

熱血男兒, 1988 | 감독 왕가위 | 출연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 출시사 라이브 DVD | 그외 출시작 <아비정전>,<천장지구>,<무간도>,<지존무상>,<결전> ,<파이터 블루>,<재전강호>,<용의 가족>

“왜 지금껏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죠?”

“나는 나를 잘 아니까. 나는 네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유덕화는 항상 가진 것 없는 남자였다. 그는 트렌치코트와 권총보다는 땀에 젖은 티셔츠와 식칼이 더 어울렸고, 조직의 보스라기보다는 그저 뒷골목 깡패에 가까워 보였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무거운 짐을 날라주는 것이 고작인 와. 연인 앞에 상처투성이 모습으로 굴러떨어지곤 하는 <열혈남아>의 한물간 깡패 와는, 그렇게 지독하게도 없어 보였던 십몇년 전 유덕화를 낯설고도 풍요로운 현재의 공기 속으로 불러낸다. 와는 한때는 잘 나갔다지만 이젠 돈이 없으면 보스 노릇도 하지 말라는 조소에 시달리는 중간보스다. 4년을 만난 애인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이를 지우고선 떠나버렸고, 하나 있는 똘마니 플라이는 사고를 치곤 수습도 하지 못하는 못난이다. 와는 새로 찾아든 연인에게도 감히 손을 내밀지 못한다. 안쓰러운, 내일이라고는 모르는 남자. 그러나 그가 야구방망이로 얻어맞으면서도 무릎을 굽히지 않을 때, 길바닥에 엎어진 플라이에게 “남들이 너를 무시하지 못하게 해”라고 속삭일 때, 그 얼굴을 더럽힌 진득한 핏줄기는, 마음을 울렸다. 유덕화는 남자였고, 초라한 영웅이었다.

많은 이들이 <열혈남아>를 와와 아오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누는 길고 애처로운 키스신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길지 않은 이 영화에서 언뜻 비치는 유덕화의 서글픈 웃음 역시 마음에 남겨둘 가치가 있다. 거칠게 살아온, 그 길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남자가, 한없이 착한 눈으로 스크린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의 연인이, 혹은 친구가 되고 싶을 수밖에 없다. 수없이 칼에 찔린 채 길바닥에서 파르르 떨며 죽어가던 <천장지구>나 독약을 마시고도 친구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 몰래 피를 쏟아내던 <지존무상>에서도, 유덕화는 그랬다. 너무 질기기 때문에 더욱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유덕화는 100편 넘는 영화를 찍은 스타고 자기 회사를 가진 제작자다. 평온해진 유덕화를 보면 이를 악물고 버티던 옛 시절의 그 청년이 보고 싶어진다. 그 청년이 가졌던 오기와 절망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진다.

"누가 내게 헤어컨디셔너에 관해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플래시 댄스>의 제니퍼 빌즈

Flashdance, 1983 | 감독 애드리안 라인 | 출연 제니퍼 빌즈, 마이클 누리 | 출시사 파라마운트 | 그외 출시작 <포룸>

제니퍼 빌즈는 “그 무렵 누가 내게 헤어컨디셔너 제품에 관해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푸념했다. 대충 손질한, 그 이상은 손질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자잘한 웨이브와 가슴 한쪽에서 찢어져 어깨가 드러나는 티셔츠. 마흔살 중년이 된 제니퍼 빌즈가 부끄러워할 만도 했다. 그러나 20년 전엔 <플래시 댄스>는 너도나도 티셔츠를 어깨 밑으로 끌어내리고 머리를 부풀리도록 만든 트렌디한 영화였다. 오직 한 사람 때문에,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춤추고, 번져나간 보라색 아이섀도 밑으로 천진한 갈색눈을 동그랗게 뜨던 제니퍼 빌즈 때문에, <플래시 댄스>는 생기가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변함없는 것도 역시 파닥거리듯 생기를 뿜던 열아홉살 제니퍼 빌즈뿐이다. 빨간 드레스와 광택나는 파란 레깅스를 같이 입고 있어 민망하지만, 그녀는 청춘의 한때란 유행과는 상관없는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플래시 댄스>에서 댄서를 꿈꾸는 용접공 알렉스를 연기한 이후, 제니퍼 빌즈는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에 거의 출연한 적이 없다. 그녀는 독립영화 감독 알렉산더 록웰과의 결혼과 이혼을 거쳤고, 출연한 영화 역시 <포룸> <미세스 파커> 등 주로 독립영화였다. 그러나 의처증 있는 남편이 의자에 꽁꽁 묶어둔 <포룸>의 중년 여인을 보면서, “아직 담배 피울 나이가 안 됐는데”도 너무 화가 나서 고운 입술 사이로 담배연기를 뿜던 소녀를 떠올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니퍼 빌즈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관능적이면서도 순진하고, 아저씨 같은 작업복을 입어도 귀엽게 보이던, 그녀는 열아홉살이었으니까. 그 나이에 제니퍼 빌즈를 보았던 이들 역시 그녀처럼 변해버렸다. 붙잡아둘 수는 없지만 영영 놓아버릴 수도 없는 순간. DVD라는 첨단의 매체를 통해 그 시절, 과장된 패션과 조명 안에서도 행복했던 1983년을 소유할 수 있다는 건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검은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던 창백한 눈동자

<천녀유혼>의 왕조현

천女幽魂, 1987 | 감독 정소동 | 출연 장국영, 왕조현 | 가을 재발매 예정 | 그외 출시작 <천녀유혼 2>,<천녀유혼 3>,<동방불패 2>,<화중선>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저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엷게 비치는 고대의 옷자락을 펄럭이던 섭소천.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꽃잎이 떠다니는 목욕물 위로 벗은 등을 깊게 숙이던 <천녀유혼>의 왕조현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만 같았다. 부유한 사업가와의 결혼과 이혼, 결혼하기 전부터 만났던 연인 제진과의 재결합 스캔들이 바다를 건너왔지만, 그녀는 그저 떠나버렸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였다. 아침햇살을 받으면 부서지는 귀신 섭소천처럼, 혹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기 위해 목숨을 버린 <청사>의 하얀 뱀처럼. 178cm의 큰 키를 하늘거리는 천으로 감싼 왕조현은 수묵화 속의 천녀가 그랬듯, 안타까운 욕망만 자극하고는 영원히 스크린 속으로 돌아갔다.

현대적인 체구를 지닌 왕조현에게 <천녀유혼>은 불행한 영화였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했고, 시원하게 육체를 드러내면 어색해 보일 뿐이었다. 감추고, 슬퍼하고, 연이 닿지 않는 저승에 머물러야 하는, 옛이야기 속의 귀신으로 못박혔다. 그러나 보는 이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등과 어깨만 드러내고도 <천녀유혼>의 왕조현은 소년들을 들뜨게 할 만큼 에로틱했다. 휘장 속에서 임청하와 뒹굴며 사랑을 나누던 <동방불패2>에서는 옷자락이 미끄러질까 위태로웠고, <천녀유혼>의 이미지를 우려먹은 <화중선>에서조차, 함께 그림이 되어버린 남자가 부러울 만큼 처연했다. 가수 제진을 5년이나 사랑했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또다시 연인이 되었다는 그녀의 러브 스토리도 환상을 완성하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동세대의 누구와도 다른 시대를 택했던 왕조현. 장만옥이 아직 경박했고 종초홍은 너무 현실적으로 보이던 시절, 왕조현은 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설화 속 환상의 여인은 될 만했다. 그러므로 왕조현이 일본에서 연예활동을 재개한다거나 캐나다에서 영어를 공부한다는 최근 소식은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왕조현은 죽음처럼 검은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던 창백한 눈동자, 그것만으로 기억될 것이다.

"명성, 돈, 당신이 최고라는 칭찬은 재앙을 부른다"

<세인트 엘모의 열정>의 로브 로

St. Elmo’s Fire, 1985 | 감독 조엘 슈마허 | 출연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로브 로, 앤드류 맥카시, 데미 무어 | 출시사 콜럼비아 | 그외 출시작 <오스틴 파워>, <클래스>, <아웃사이더>, <웨인즈 월드>

로브 로는 1980년대 소녀들의 환상을 채워 주던 핀업 보이였다. 까만 눈썹과 발그레한 뺨, 불량한 몸짓을 가진 그는 터프한 미소년이라는 보기 드문 조합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인트 엘모의 열정>은 야심과 패기, 명성과 함께 찾아든 오만이 전부였던 로브 로가 어떻게 전락할지 예고해주는 듯도 한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로브 로는 명문 대학을 졸업했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내 몰래 사귀는 여자에게 용돈이나 받아쓰는 건달 빌리를 연기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주먹을 휘두르고, 마약을 들이키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헛된 약속만 되풀이하는 한심한 젊은이. 1980년대 후반, 무명 시절에 두명의 십대 소녀와 함께 찍은 포르노비디오가 공개돼 절정에서 추락한 로브 로도 바로 그런 식으로 세월을 보냈을지 모르는 일이다.

80년대 일군의 청춘스타를 일컫는 ‘브랫 팩’의 일원이었던 로브 로는 뒷날 “명성, 돈, 당신이 최고라는 칭찬. 그건 재앙을 부르는 요소들이었다. 나는 젊었고, 미쳐 있었다”고 알코올과 마약으로 힘을 얻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러나 영영 사라진 몇몇 동료들과 달리 로브 로는 살아남았고, TV시리즈 <웨스트 윙>의 명석하고 정의로운 언론 담당 부수석 샘 시본으로 어느 정도 인기도 회복했다. 지금 그는 깔끔하고 성실해 보인다. 보기 좋은 재기이지만, <세인트 엘모의 열정>의 빌리 역시 나쁘지 않았다. 결혼과 실직, 무의미한 사랑, 중독 같은 위선 등으로 괴로워하는 스물두살 일곱명의 젊은이들은 쓰라리게 세상을 깨우쳤다. 그중에서도 빌리는 가장 비열했고, 가장 순수했고, 결국 명문대생답지 않게 색소폰 하나만을 들고 뉴욕으로 떠났다. 아마도 그 뒷이야기가 이어졌다면, 빌리는 여전히 뒷머리를 길게 기르고 귀고리를 달랑거리며 출세한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세인트 엘모의 열정>의 로브 로는 철들지 않을 것 같은 막무가내의 젊음을 간직한, 우리의 동생이었고 친구였다.

“때로는 너무 아이 같고, 때로는 너무 어른 같은"

<테스>의 나스타샤 킨스키

Tess, 1979 | 감독 로만 폴란스키 | 출연 나스타샤 킨스키, 피터 퍼스, 리 로슨 | 출시사 플레이스테이션 월드 코리아 | 그외 출시작 <파리 텍사스> ,<세이비어>,<원나잇 스탠드>, <마리아스 러버>, <파더스 데이>, <레드 레터>, <타운 앤 컨트리>, <터미널 스피드>, <에일리언 대학살>

<테스>에 출연할 무렵, 나스타샤 킨스키는 어린애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아버지 클라우스 킨스키에게 버림받고 삶을 포기한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어서 아버지가 가져왔을 법한 선물들을 훔쳐오곤 했다. 그녀를 가르치고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스타샤 킨스키는 어린아이가 가진 본능 하나만으로 세상을 헤쳐나갔고, 로만 폴란스키는 그런 킨스키를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 테스로 캐스팅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쉽게 겁을 먹으면서도 순진한 믿음을 따라 단호하게 행동하는 어두운 눈동자는 세상을 사로잡았다. 영화학자 데이비드 톰슨은 그런 나스타샤 킨스키를 “일종의 센세이션, 분노”라고 규정지었다.

2시간40분이 넘는 <테스>는 스무살 나스타샤 킨스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수 없는 영화다. 멈칫거리며 산딸기를 입으로만 받아먹는 테스, 죽은 아기에게 스스로 세례를 줬다며 검은 모자 밑으로 눈물을 비치는 테스, 막 살인을 하고는 백치 같은 표정으로 걸어나오는 테스. 아무 생각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여도 망설임과 혼란이 묻어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계절에 따라 색채가 변하는 영국 시골 풍경보다도 완벽한 그림 같았다. 폴란스키는 나스타샤 킨스키의 독일어 억양을 고치기 위해 2년을 보냈지만, 그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스타샤 킨스키의 누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테스>보다 <캣 피플>이 더 에로틱할 것이다.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가져오는, 흑표범의 피를 받은 여인. 그 강렬한 이미지에 비하면 온몸을 드레스로 꽉 조인 <테스>는 안타까울 정도다. 그러나 조그만 얼굴에 너무 크고 공허한 눈동자가 자리잡은 그녀의 얼굴은 <테스>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깊숙하게 각인되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아이 같고, 때로는 너무 어른 같은” 테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나스타샤 킨스키의 원형이다.

DVD 연속기획2 - 다시 만나는 청춘스타들 [1]

DVD 연속기획2 - 다시 만나는 청춘스타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