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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새로운 가족윤리를 꿈꾼다 [3]

영화 속 자살, 영화밖 자살

새로운 가족윤리를 꿈꾼다 [3]

이 말하는 '체험, 삶의 공포!'

변성찬/ 영화평론가

‘감성 미스터리’. 이것은 이 영화가 스스로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그 이름에는 공포영화 horror movie라는 장르의 문법 안에 자신을 가두어두지 않겠다고 하는 자의식, 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오해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 강한 고집이 배어 있다. 그 선한 의도와 그것의 영화적 성취라는 측면 모두에서, 그 이름은 우리를 ‘가짜 여우굴’로 유인하는 ‘거짓 문패’가 아니다. 은 ‘공포의 체험’을 제공하려 하기보다는 ‘체험(삶)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영화에는 새로운 ‘감성’(感性)은 있지만, 낡은 ‘감상’(感傷)은 없다. 일상 속의 어떤 사물을 통해 삶 속의 어떤 순간의 의미를 포착해내고 형상화시키는 ‘감성’. 그 감성의 새로움은 감독(이수연)의 단편들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던 것이기도 하다.

감독은 자신의 단편들(<라 La>(1998), <물안경>(2000))을 통해, 주체가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해야 하는 순간,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통과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통과제의 속에서 주체가 감당해야 하는 혼란과 어려움은, 일상 속의 어떤 사물들을 통해 드러나고 형상화된다. 주체가 스스로 찾아내야 할 ‘인생의 기준음’을 ‘전화의 착신음’(‘라’라는 음정) 또는 ‘물안경’이라는 사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형상화시키는 감독의 어법은 신선하고 감각적이다. 그러나 정작 새로움은 그 ‘감각성’에 있지 않다. 진정 새로웠던 것은, 그 순간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 또는 시선이었다. 사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객관적으로 그 순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충분히 ‘냉철’하지만 결코 ‘냉소’적이지 않다(사실, 제스처로서의 ‘냉소주의’는 언제나 공허한 ‘감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담담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성인식을 치르는 주체의 고통과 공명할 수 있도록 하는 화법. 그 화법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의 태도와 시선에서 비롯된다. 삶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삶을 부정하지는 않는, 그 고통에 다가가려 하지만 넋두리하듯 호소하려 하지 않는 그 시선과 화법은 한국영화에서 진정 새로운 것이었다. 첫 장편 에서 감독은 그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고집스럽게 유지하고자 애쓰며 또한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선한 화법, 긍정의 태도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은 상징적 사물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제목이기도 한 ‘4인용 식탁’이 그 상징으로서의 사물이라는 것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영화에는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물이 있다. 바로 주인공 ‘정연’(전지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강정원’(박신양)만을 그 유일한 주인공(인물)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가 “한 남자의 실패한 성장담”이라는 감독 자신의 말은 그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4인용 식탁’은 근대화, 도시화의 산물이자 상징이다. 그 ‘4인용 식탁’이 막연한 동경의 대상에 불과했을 법한 시대와 공간(80년대 달동네)에서 정원은 ‘가족’에 대해서 감당할 수 없는 외상적 체험을 겪었다. 이제 결혼을 앞두고 그 ‘4인용 식탁’을 갖게 되었지만 그는 아직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애인이 마련해준 그 식탁을 본 정원의 첫 소감은 “너무 차갑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 식탁은 온전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심지어 일산 본가에 있는 또 다른 ‘4인용 식탁’조차 한번도 꽉 채워지는 법이 없다.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애인이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순간, 정원이 앉아 있어야 할 그 자리는 텅 빈 채로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며 ‘부재’를 과시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비로소 ‘4인용 식탁’은 온전하게 채워지지만, 그것은 결국 아직은 채워질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반어법에 불과하다.

채워지지 않는 식탁

언제나 그렇듯이 억압된 것은 늘 귀환한다. 정원에게 그 귀환의 기표는 ‘(살해당한) 소녀(들)’과 ‘아버지’이다(정원은 아버지와 마주치는 순간 늘 흠칫 놀란다). 그날 이후 ‘악몽’을 통해서만 되돌아오던 그 외상은, 이제 ‘현실’ 속에 침입해온다. 그러나 정원은 그것과의 대면을 기피하고 지연시킨다(식탁에서 소녀들을 본 뒤 정원이 한 행동은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가 그것들과 대면하는 데는 또 하나의 사물이 필요했다. 바로 무당의 딸이자 스스로 ‘영매’이기도 한 ‘연’(전지현)이다. 영매는 늘 주체의 마음속에 있는 것, 주체가 회피하려 하지만 보아야만 하는 어떤 진실을 주체에게 되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 또는 그녀는 ‘거울’이자 사물이다. 영화 속에서 연은 바로 그 거울로서의 역할을 한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지만 그 추락의 찰나적 순간에 어쩔 수 없이 주체가 품게 될 두려움과 원망의 감정을 클로즈업으로 비추기도 하고, ‘모성신화’에 짓눌려 꿈틀대는 여성 주체의 무의식적 공포/욕망을 환상의 형식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연’은 그 영매로서의 역할을 행하는 순간 말 그대로 나무토막 쓰러지듯 쓰러지며 사물화된다(기면증). 정원과 문정숙(김여진)은 ‘연’을 통해 마음속의 진실과 대면하게 되지만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대한 연의 대응은 스스로의 ‘거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4인용 식탁’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특별한’ 외상적 체험을 겪은 정원만의 모습일까? 자신의 딸을 살해하는 것이 ‘특별히’ 병적이고 범죄적인 주체인 정숙(김여진)만의 행위일까? 사실 안락하고 따듯한 가족의 공간으로서의 ‘4인용 식탁’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의 상징이고 욕망의 기표이다. 그러나 문제는 물리적으로 ‘4인용 식탁’을 갖추는 것도 아니고, 그 공간을 꽉 채울 구성원의 숫자를 확보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채워져야 할 것은 새로운 ‘가족 윤리’일지도 모른다. 80년대 달동네의 가난이 강제한 아버지의 폭력과, 힘들게 얻은 ‘안정’의 재생산(또는 자신이 얻지 못한 ‘안정’의 확보)을 욕망하는 오늘날 많은 부모들의 병적인 교육열은 과연 얼마큼 다른 것인가? 병적인 부모에 의해서 던져지는 아이들과, 가족의 기대와 관심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청소년들(이른바 ‘성적 비관 자살’)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감독의 중편 <물안개>에서 이 투신자살은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였다)?

미학적 사운드의 공포

영화 의 육신(화면/사운드/편집/상징적 대사)은 충분히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특히 감독과 음악감독(장영규)의 공동작품일 ‘사운드’의 독창적인 사용은 주목할 만한 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감독의 전작들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어떤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청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기억하고 있다. <>의 전화 통화음, <물안개>의 물 속의 적막. 이런 것들이 그 영화들이 간직한 묘한 긴장감을 쉽게 잊혀지지 않도록 한다). 현장의 소음이 효과음을 대신하고(정원이 처음 자신의 방에 들어서는 장면), 현장의 소음들을 충돌시켜 효과적인 극적 긴장감을 끌어내기도 하며(공사 현장에서 라디오 소리와 현장 소음의 충돌 장면), 현재의 소리와 과거의 회상 장면은 효과적으로 오버랩된다(카세트로 들리는 연의 ‘현재’의 목소리와 함께 펼쳐지는 상담받는 연의 ‘회상’ 장면). 영화의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도 이미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소리(소녀들의 목소리)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의 새로움은 그 ‘육신’에 있지 않다. 그 육신의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시선과 태도로서의 ‘영혼’, 또는 그 ‘육신’과 ‘영혼’의 흔치 않은 ‘행복한 조우’, 이것이야말로 또는 감독 이수연의 영화세계가 지닌 진정한 새로움이다. 그녀는 서둘러 주장하려 하기보다는 냉정하게 질문한다. 아직도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아직은 ‘미래형’으로 남아 있는 새로운 ‘가족 윤리’에 대해서. 영화의 초반, 정원의 약혼녀는 오늘날의 식탁이 “단순히 밥 먹는 공간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한명 한명이 하이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조명을 설계했다”라고도 한다. 어쩌면 그녀의 이 말과 태도는 감독 자신의 발언일 수도 있다. 감독은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한국 사회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가족 윤리’를 꿈꾼다. 그런 의미에서 정원과 정숙이 보여주는 실패의 궤적은 그 새로운 가족 윤리가 아직은 우리의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1]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2]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새로운 가족윤리를 꿈꾼다 [3]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4]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