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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1]
2003-08-14

영화 속 자살, 영화밖 자살

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1]

공포영화가 말하는 현실의 악

김봉석

의 여인들은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베란다에 서 있던 연이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 거꾸로 떨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한숨과 눈물까지도 보고 만다. 그 찰나의 순간은 연이에게 남겨진 거대한 흉터다. 남편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세상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내몰리다가 연이도 같은 길을 간다. 그렇게 세상의 그녀들이 죽어간다. 어딘가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해도, 이 사회의 곳곳에서 숨막히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고꾸라진다.

<여고괴담>의 소녀들도 그렇게 죽어간다. 성적 때문에, 외모 때문에, 우정 때문에, 따돌림과 질시 때문에 소녀들이 죽어간다. 결코 나약하거나, 현실감각이 약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성적만이 최고라는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외모만을 중시하는 그릇된 가치관 때문에,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비틀린 세태 때문에 소녀들은, 살해당한 것이다. 그것이 억울해서, 그들은 돌아온다.

한국 공포영화에서는 기묘하게도 자살한 원혼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살해당한 자가 복수의 염을 품고 돌아오거나 외부의 괴물이 침입하는 경우가 주류인 외국 공포영화와 비교해볼 때 지나치게 많다. 한국 공포영화에서 자살한 자들의 원혼은 여전히 세상에 머무른다. 그리고 복수를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원한을 품고 돌아오는 이유는, 죽음의 이유가 타인이나 사회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보기에도 그들의 원한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사회적인 것이다.

나카다 히데오의 <링>에서, 사다코는 자신을 죽인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에 복수를 꾀한다. 사다코는 자신을 우물에 밀어넣은 살인자가 아니라, 그녀와 어머니를 벼랑으로 몰아넣은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복수한다. 저주의 비디오를 본 사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타인에게 복사한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 대신에 타인에게 죽음을 전가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기본 법칙이다. 로또처럼, 한 사람의 행운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주머니가 털리게 된다. 누군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링>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만 한다면, 결국 그 사회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링>의 원제에는 ‘바이러스’란 부제가 붙어 있다. 바이러스처럼 사다코의 원한은 급속도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전파된다.

전환점을 맞이한 한국 공포영화

에서 보이는 자살, 혹은 죽음 역시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죽음이란 충분히 고려해볼 법한 도피처다. 아이들과 함께 죽는 것이 유아살해라고도 하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동반죽음이 한편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 아이들만 살아남았을 때, 그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사회의 보호 속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비참한 미래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택한다. 한국의 공포영화에서 유별나게 자살이 많고, 아이들의 죽음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들의 죽음을 보여주면서 유별난 공포심을 자극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당면한 한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안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보호받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고괴담> 시리즈와 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이다. 우리의 현실이 안겨주는 공포가 그려진다. 성적이 나쁘고, 일류대학에 가지 못하고, 좋은 직장을 들어가지 못하면 그는 사회의 낙오자가 된다. 오로지 그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소녀들은 단지 떨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발버둥을 치다가 자신의 발이 이미 선 밖으로 나왔음을 깨달았을 때, 소녀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사람들이 굳이 외면하는 것들을, 나만이 홀로 보고 있음을 알았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비정상이라고 차별받고, 사회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한번 보기 시작하면 결코 멈출 수 없다. 고개를 돌려도, 한번 눈에 보인 것은 영원히 남아 있다. 내 망막에서 잠시 사라져도, 그것은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다. 보지 않아도, 엄연히 존재함을 알고 있다. 영화의 공포는 며칠이 흐르면 잊혀지지만, 현실의 공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장화, 홍련> <여우계단> <거울 속으로> 등 최근 만들어진 공포영화들은 그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현실의 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몇년 전 등장했던 <해변으로 가다> <하피> <찍히면 죽는다> <가위> 등이 단지 ‘공포’만을 부각시켰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가위>를 제외한 10대 슬래셔 영화들이 대중의 외면을 받은 것은 단순한 쾌감을 느끼기에는 영화의 숙련도가 너무 낮았고, 현실과의 접점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반면 올해의 공포영화들은 <여고괴담>과 <소름> 등이 보여주었던 현실의 공포를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올해는 한국 공포영화의 전환점이 된 해라고도 말할 수 있다.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1]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2]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새로운 가족윤리를 꿈꾼다 [3]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4]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