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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세네프로! 가자, 영화의 미래로! [2]
2003-08-14

9시간 상영을 꿈꾼 고집스런 대작

탐욕 Greed | 감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 미국 | 1924년 | 140분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시간과 물질에 예속된 존재인지 말없이 웅변하는 무성 시대의 걸작. 금광 노동자 맥티그는 힘세고 온순한 청년이다. 그는 아들의 삶이 안락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뜻대로 돌팔이 치과의사에게서 기술을 배워 샌프란시스코에 개업한다. 바위 같은 그의 심장은 트리나라는 아름다운 환자의 머리칼 향기를 맡는 순간 난생처음 울렁거리고, 트리나를 연모하던 맥티그의 친구 마커스는 양보한다. 그러나 트리나가 산 복권이 5천달러에 당첨되고 두 사람이 결혼하자 박탈감에 눈이 먼 마커스는 맥티그의 무면허 의료행위를 고발한다. 5천달러에 집착한 나머지 병적으로 인색해진 트리나는 맥티그를 알코올과 절망에 빠뜨린다.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 맥티그는 메마른 ‘죽음의 골짜기’로 도주하지만 구원은 없다.

<탐욕>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유실물’이다. 1923년부터 24년에 걸쳐 제작된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탐욕>은 14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으로 공개됐으나 애초 9시간(!)을 찍은 감독은 제작자와 주먹싸움을 벌였다. 9시간짜리 <탐욕>은 영영 사라졌지만, 후대에 영화사가와 복원전문가의 손으로 부활한 ‘불완전한’ 판본도 육중한 감동을 안긴다. 신랄한 자막과 가차없는 결말, 남편 대신 금화 곁에서 나체로 잠드는- 절대반지를 보는 골룸 같은 눈빛으로- 여인의 이미지는 좀처럼 잊기 힘들다. 영화 서두에 인용된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진실만을 말했다. 그것이 진실인 것을 나는 안다”라는 원작자 프랭크 노리스의 글은, 고집스런 폰 스트로하임 감독의 육성처럼 보인다.

너희가 뉴요커를 아느냐?

알 필요 없어 Nobody Needs to Know | 감독 아자젤 제이콥스 | 미국 | 2003년 | 95분

그는 맨해튼 전체에 감시카메라 시스템이라도 깔아놓은 것일까? 뉴욕 젊은이들의 생활과 심리적 동기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알 필요 없어>는 갈피갈피마다 ‘뉴요커 영화’라는 자의식이 진하게 풍겨나오는 영화다. 초보배우 아이리스는 젊은 감독 조나스의 오디션에 지원하지만, 고통받다 혼자서 죽는 연기를 요구받자 거절하고 돌아온다. 막막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좀더 실리적인 룸메이트 미라와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근처에서 영화를 찍던 할리우드 스타 커트와의 만남이다. 할리우드 시스템에 고문당하는 젊은 예술가의 표정을 지어 보이는 커트는 아이리스의 옥상에서 고뇌를 토로한다. 그리고 아이리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다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독백과 투정이 이어진다. 대니얼 안드레이드의 농밀한 흑백촬영은 돋보이지만 제목의 어감만큼이나 자기현시의 욕망도 느껴지는 데뷔작. <노팅 힐> <엘리자베스> 등에 출연한 배우 에밀리 모티머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카메오로 등장한다. 2003년 로테르담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고 홍콩, 트라이베카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나를 버렸다, 그래서 나를 찾았다

마음의 지도 A Map of the Heart | 감독 도미니크 그라프 | 독일 | 2002년 | 116분

원초적 본능과 자연의 마력이 아직 살아 있는 이방의 땅으로 떠나, 모험을 통해 성장과 자기 정화에 도달하는 서구/미국인들의 무용담은 이제 하나의 서브 장르를 형성할 만큼 친숙한 이야기다. 코르시카섬의 한 호텔. 독일 여성 카트린은 직장 상사이자 연인인 위르겐으로부터 아내가 임신해서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통고를 듣는다. “당신은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라고 수긍한 카트린. 매순간이 사랑의 추억을 헤집는 마지막 밀회를 끝낸 둘은 서먹하게 헤어진다. 참담한 심경의 카트린은 위험한 유혹의 기운이 가득한 섬에서 스스로를 밑바닥까지 던진 다음 새롭게 출발하기를 꿈꾼다. 그녀의 욕구는, 베를린에서 존속 살인죄를 저지르고 교정 캠프에 와 있는 독일 청년 말테를 만나면서 예기치 못한 출구를 찾는다. 영화의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세네갈 상인은 임의로 고른 소품을 재주껏 연결시켜 스토리를 만드는 시범을 보인다. 핸드헬드 비주얼과 결합해 관객을 끊임없이 동요하게 만드는 <마음의 지도>의 스토리 전개방식 역시 이같은 아프리카의 전통적 서사형식을 따른다.

황금기 할리우드를 추억하다

픽션의 몰락 The Decay of Fiction | 감독 팻 오닐 | 미국 | 2002년 | 75분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빈 방. 얼핏 마이클 스노의 악명높은(?) 고전 실험영화 <파장>(Wavelength)을 연상시키는 도입부가 끝나면 반투명한 몸의 선남선녀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유령들처럼 방과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픽션의 몰락>은 최근 철거된 LA의 호텔 앰배서더에 관한 영화. 앰배서더는 1920년대에 지어져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교장, 첫 번째 오스카 시상식장으로 쓰이는 영화를 누렸던 호텔이며, 1968년에는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장소로 핏빛 명성을 떨쳤다. 팻 오닐 감독은 1989년 영업을 중지한 이래 1천여편의 영화 로케이션으로 이용되어온 퇴락한 호텔의 안팎을 저속촬영한 화면 위에, 누아르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30, 40년대 의상을 차려입은 배우들을 별개의 세트에서 흑백으로 촬영한 영상을 이중 인화했다. 그들을 둘러싼 우주의 시간은 진동하며 빠르게 움직이지만, 그 안에서 소요하는 과거의 영화스타, 갱스터, 경찰, 신혼부부는 누구도 그들에게 죽음을 일러주지 않았다는 듯 비장하게 호소하고 끈질기게 집착한다. 다큐멘터리도 극영화도 아닌 <픽션의 몰락>에는, 흘려듣는 대화의 조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단편적인 상황만 있을 뿐 중심 줄거리는 없다. 팻 오닐 감독은 사진작가 로버트 하이네켄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963년부터 아방가르드영화를 연출한 노장. <픽션의 몰락>은 내러티브영화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시대 자체가 ‘픽션’의 풍모를 지녔던 황금기 할리우드에 대한 추억이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Senef 2003 상영일정표및 예매

▶오라, 세네프로! 가자, 영화의 미래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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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세네프로! 가자, 영화의 미래로! [3]

▶오라, 세네프로! 가자, 영화의 미래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