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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2003 한국 공포 에세이 [2]

‘예술’을 너무 의식했던

아까 2003년이 한국 호러영화가 ‘예술’을 하기 시작한 해라고 했는데, 만큼 그 표현에 어울리는 영화는 없다. <장화, 홍련>이 작정하고 만든 장르 호러영화라면, 은 작정하고 만든 아트하우스 영화이다. 이수연은 김지운처럼 공포감 조성 따위에 매달릴 생각 따위는 없다. 공포를 주면 좋다. 하지만 억지로 관객을 질리게 만들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예술영화’니까. <장화, 홍련>의 안전망이 ‘깩깩 소음’이라면 의 안전망은 ‘예술영화’의 자의식이다.

호러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무리한 시도 때문에 좋은 영화가 막판을 망쳐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꿋꿋한 태도는 상당히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의 자의식이 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예술영화’가 되려고 한다는 데 있다.

은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영화는 강한 비극적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관객이 그 정서를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단 지적인 분석을 거쳐야 한다. 영화가 제목을 따온 ‘4인용 식탁’이라는 중심 소재 자체가 그렇다. ‘결혼을 통해 평범하고 모범적인 가족을 얻으려던 한 남자가 표준적인 핵가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4인용 식탁을 선물받지만 최종적으로 그와 그 식탁을 공유하는 것은 죽은 자들뿐’이라는 아이러니는 영화없이 말로만 설명되었을 때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런 의도가 관객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효과적으로 영화 속에 구현되었는가?

은 수많은 서브텍스트와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풍성한 느낌은 주지 못한다. 이 모호한 영화는 겉보기와는 달리 거의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을 품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가 관객보다는 평론가를 위한 영화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평론가들은 모범답안을 찾으며 훨씬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장르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호러영화의 도식적인 틀은 종종 비평가들의 표적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 장르는 특정 소재를 다루는 방식들이 수렴진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호러영화의 소재나 주제를 다루기 위해 꼭 호러영화가 될 필요는 없지만 장르의 힘과 전통을 무시하는 것 역시 도움은 되지 못한다. 종종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는 로만 폴란스키의 아파트 삼부작들도 장르를 무시한 영화들은 아니었다. <악마의 씨>는 관객이 아이라 레빈과 폴란스키가 깔아놓은 상징과 은유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여전히 불쾌하고 무섭다. 하지만 에서 두 주인공의 비극은 안개처럼 모호한 분위기 속에 디카프 커피처럼 조용히 고여 있기만 하다.

모양과 성취도는 전혀 다르지만 <거울속으로>의 장단점은 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 컨셉은 근사하다. 감독은 이 컨셉을 어떻게 시각화하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컨셉을 장편영화의 틀 안에 맞추는 동안 이야기는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거울속으로>는 보다 훨씬 심하게 망가졌다. 내가 위에서 아무리 투덜거렸어도 은 쓸쓸한 불길함의 정서를 품은 비극적인 이야기로 존재한다. 하지만 <거울속으로>는 어정쩡한 형사물의 잔재처럼 그냥 부서져 있다.

공포의 풍요로운 가능성을 향해

<거울속으로>의 결정적인 실수는 근사한 소재에 맞는 그릇을 찾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영화는 거울귀신 이야기를 끌어가는 도구로 형사물의 형식을 취했는데, 이건 장르에 대한 판단착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장르 계통수에서 호러영화와 형사물의 간격은 그렇게까지 멀지 않으니, 얼핏보면 공포영화가 형사물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형사물과 공포물이 성공적으로 결합한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 호러영화처럼 피부에 닿는 일차적인 감각을 중요시하는 장르가, 추적과 수사가 직업의 일부인 형사들과 만나는 순간 이 장르는 힘을 잃기 시작한다. 형사물의 어쩔 수 없는 산문성 역시 영화가 선택한 소재에는 독이 된다. 이 영화가 선택한 거울귀신은 기본적으로 정교한 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모든 호러영화는 기본적으로 시다. 현대 호러물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인이었다. <노스페라투> <서스피리아> <악마의 씨> <엑소시스트>와 같은 공포영화들의 걸작들은 모두 이성이 끝나고 공포와 피의 악몽이 시작되는 경계선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미친 정신을 노래하는 시였다. 따지고 보면 지난 여름을 거치는 동안 나온 한국 호러영화들의 장단점은 모두 그들이 소재와 주제에서 어떻게 시를 끌어내느냐와 연결되어 있었다.

2003년 호러영화들의 ‘예술하기’는 얼마나 성공했는가? 지금까지의 결과를 검토해보면 절반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한국 호러 영화계가 단순한 슬래셔 무비의 공식을 넘어 장르의 풍요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시도들이 여전히 수많은 계산 착오와 나태한 관습에 의해 갇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3년의 영화들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남긴 시행착오들이 이후의 한국 호러영화들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 듀나의 2003 한국 공포 에세이 [1]

▶ 듀나의 2003 한국 공포 에세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