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3]

시상식장에서의 김기덕 감독.

세태 혹은 문화

8월14일, 오전 11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공식 기자회견이 열리다. 그리고 오후 4시15분 열린 공식 상영장에서는 몇분간이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예상대로다.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추상적인 ‘세태’가 아닌 정서적인 ‘문화’를 표현했고, 그것이 캐릭터와 풍경을 근거삼아 외국 기자(관객)들에 의해 한국 문화 또는 불교 문화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절이 한국에는 실제로 있는가?” “불교 문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등등. 적어도 그런 수준을 벗어난, 몇 가지 질문과 대답.

당신의 이번 영화는 전작과 많이 다른 것 같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작들이 ‘클로즈업’의 영화였다면, 이번 영화는 다소 한 걸음 빠져나와 세상을 보는 ‘롱숏의 영화’이다.

당신의 영화에서 ‘언어’란 어떤 의미인가. 이 영화는 나조차도 이 영화의 대상이 되는 그런 영화이다. 내 영화에서 대사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데, 그건 언어의 약속들이 잘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몸의 표현이 더 순수하고 원칙적이라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어떤 영적인 것의 추구, 또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모든 것이 선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인간이, 그리고 세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50%만을 만든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것이다.

아쉽게도, 이날 본 영화는 모두 꽝이었다. 그중 경쟁작들만 말하자면, <마리아>는 재주는 코미디에 있지만 생각은 진지하게 하고 싶어하는 감독의 균열이 보이는 작품이다. 루마니아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일곱 아이들의 엄마가 어떻게 매춘부가 되어가는지에 대한 서글픔을 담는다. 시작은 마치 에미르쿠스투리차의 주인공들을 다룰 듯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웃음에서 슬픔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의 진공을 영화는 쉽게 메우지 못하고 이내 거칠어진다. 이란영화 <조그만 눈송이>는 눈뜨고 졸았거나, 뭔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본 이란영화 중에 가장 안이한 형식을 지닌 영화가 될 것 같다. 광산에서 일하는 두명의 친구에게 인생의 낙이란 멀리, 저 멀리 길을 걸어가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여인의 뒷모습을 거친 세상에서의 희망이라 간주한다 해도, 이 형식의 도입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반복구조가 부패된 정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점점 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로카르노영화제의 작품들, 특히 경쟁작들의 질이 떨어진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집 앞> 상영에 앞서 무대인사를 하는 김진아(사진 왼쪽) 감독.

안도 바깥도 아닌

8월15일, 즐거운 마음으로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유이레의 신작을 보기 위해 그루잘 극장으로 향하다. 알렉산더 클루거가 뉴 저먼 시네마의 선언자였다면,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유이레는 끝까지 행동으로 보여주는 실천주의자들이다. 그들을 독일의 고다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고, 영화의 브레히트라고 말해도 실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탈리아어에 프랑스어자막. 나는 결국 70분간 그림만 보고 나왔다(그래서 더 깊게 이야기하면 거짓말이 된다). 대신 스칸디나비아 영화회고전 중 하나인 미카 카우리스마키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형제의 중·단편영화 모음들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경험이다. 국내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록키 6>를 비롯하여 <거짓말쟁이> <부츠> 등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들의 유쾌함이 음악을 타고 화면을 뒤집는다.

6시30분 김진아 감독의 <그 집 앞>이 메인 상영관 페비에서 첫 상영을 가졌다. 시간대가 좋지 않아 많은 관객이 들어차지는 않았지만, 감독이 전하는 신중한 메시지에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이는 표정들이다. 한 남자의 애인과 아내인 가인과 도희, 한명의 시간은 뺄셈으로, 또 한명의 시간은 덧셈으로 흐른다. <그 집 앞>은 두 여주인공을 통해 상실의 시간을 담아낸다. 김진아 감독의 말에 따르면, 디지털로 촬영한 뒤 35mm로 블로업한 이 영화는 “총 13만 프레임의 프레임마다 색보정을 다시 한” 엄청난 기술적 노력을 깃들인 작품이다. 상영이 끝난 직후, 야외 인터뷰 공간 스파지오 시네마에서 김경현 교수는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 “그 안도 아니고, 그 바깥도 아닌 사이-공간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하며, 이 영화가 이론적인 바탕을 깔고 제작되었음을 시사했다.

수상 혹은 논란

8월16일, 수상이 발표되다. 그리고 논란이 예상된다. 대상은 파키스탄 감독 사비아 스마르의 <카모스 파니>에 돌아갔다. 심사위원 특별상에는 칼린 네처의 <마리아>, 은표범상에는 보스니아 피예르 잘리카의 <갈리 바르타>, 캐서린 하드윅의 <써틴>이 선정됐다. 이란영화 <조그만 눈송이>는 고바야시 마사히로의 <헤어드레서>와 함께 특별언급으로 결정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본상을 제외한 넷팩상, 청년비평가상, 돈키호테상, 국제예술영화관연맹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날, 스파지오 시네마 야외공간에서 4시부터 시작한 수상식에서 김기덕 감독은 연거푸 4번을 단상에 나가 인사를 해야 했다. 결국 마지막에 단상에 오른 김 감독은 거의 모든 외국인이 <뵘, 예름, 가울, 계울, 구리그, 뵘>이라고 소개하는 발음상의 문제를 또박또박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말로 교정해주는 짧은 퍼포먼스로 인사를 대신함으로써 박수갈채를 받았다. 수상식이 끝난 직후 로카르노 현지의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외국인은 “김기덕 감독의 이번 영화가 대상을 타지 못한 것은 로카르노의 수치이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사죄한다”라고 김 감독에게 미안함을 표시했고, 당일자 <버라이어티>는 “공식상영 때 기립박수를 받고, 기자상영 때조차 박수갈채를 받은 이번의 경쟁작 중 논쟁의 여지없는 히트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프랭크 노치를 위시한 본상 심사위원들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멘트로 이번 수상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했다.

축제 혹은 전투

8월17일, 다시 취리히 공항. 타지 못한 상을 되돌릴 수는 없다. 김기덕 감독은 열심히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도 사실은 선댄스영화제 참석 당시 호텔방에서 생각해낸 구상이다. 지금, 이 순간 또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 영화감독에게 영화제란, 영화한테 영화제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기습한다. 이번 로카르노영화제는 소수 양질의 영화제에서 대중확산의 영화제로 나아가는 과정의 산고일 수도 있다. 분명 앞으로의 로카르노영화제가 나아갈 정치적 지향이 드러난 자리였다. 그 순간에 선택과 배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건 경쟁을 하는 예술, 영화의 슬픔이며, 그 축제 뒤에 남는 당연한 아픔이다.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1]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2]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