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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ef 3인의 못 말리는 제작기 [2]
이영진 2003-09-05

현장에 가면, 싸움도 있고 카섹스도 있고~

# 촬영현장은 온갖 종류의 기(氣)가 부딪히고, 뒤섞이는 곳이다. 지칠대로 지친 감독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드는 훼방꾼들의 돌발 행동과 캐릭터와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배우들의 성스러운 감정이 한데 뒤엉켜 묘한 긴장감을 생성해낸다. 현장은 끊임없이 분출하는 용암, 그 자체다.

임필성 넋놓은 박해일, 넋 잃은 여고생 그리고 정신 나간 주정뱅이

뭐라. 영진위쪽에 <튜브> 촬영 뒤, 남은 지하철 세트가 있다고? 임필성 감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실제 지하철을 옮겨타고 다니며 촬영하다보니 원하는 상황을 잡아내려면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한 스탭의 귀띔에 감독은 자칫 홀릴 뻔했다. 그러나 지하에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외부로 나가는 순간을 찍기 위해 2호선 타고 같은 역을 2번씩이나 지나쳤던 강행군의 과실을 모두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정신을 다잡고 의자에 앉아 멍한 표정의 박해일을 찍고 있는데 이번엔 한 취객이 카메라에 접근한다.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며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4명의 스탭들이 달라붙어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내 모두 튕겨나간다. ‘과연 괴력의 소유자군.’ 알코올로 인해 헐크로 변한 사내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각선에 앉아 있는 박해일은 여전히 초점 잃은 눈망울을 굴리고 있다. 연기를 위해 부러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 와서 넋놓은 연기를 보여주는 박해일과 어서 찍어야 한다며 헐크를 제지하는 스탭들. 그런 아수라 속에 박해일을 가까이서 보겠다는 일념으로 몇 시간째 지하철에서 머물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수다만이 생기를 반짝인다.

<Show Me> 中 남기웅 감독의 <준비된 악당은 속도가 다르다>

남기웅 깁스 부분만 안 나오면 되는 것을…

강원도 평창 산골에서 휴대폰이 잘 터지기나 하는 걸까. 벌써 4시간째 휴대폰을 들고 여배우를 수소문하는 안철호 프로듀서가 안쓰럽다. 카섹스하는 장면에 출연하기로 한 여배우가 갑자기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다리 한쪽을 깁스했고 이 때문에 출연 못하겠다는 전갈을 보내와서다. 남기웅 감독으로선 이해가 좀 안 된다. 다리 다쳤다고 그걸 못하나 싶기도 하다. 앵글에만 안 잡히면 되는데, 쩝. 안 PD는 아는 연극 배우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학생 배우들까지 섭외하는 듯하지만 그게 신통하게 먹힐 리 없다. 몇 장면 안 나오는 단역인데다 시나리오도 주지 않고서 카섹스 장면을 위해 강원도행을 권유하는 건 무리인 듯싶다. 다들 여자 배역을 머리 긴 남자가 하면 어떻느냐면서 안 프로듀서를 흘깃거린다. 안 프로듀서는 그걸 아는지 전화 거는 데 정신없다. 이 상황에선 다른 장면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설화의 세계로 들어간 건태와 떡호랑이(‘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위협하는 호랑이로, 실제 원하는 ‘떡’은 좀 다른 종류의 것이다)가 직접 대면하게끔 설정을 바꾸어 촬영을 진행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안 PD라도 출연시켰어야 했나.

<Show Me> 中 남기웅 감독의 <준비된 악당은 속도가 다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synopsis 백수 건태(기주봉)는 인사동을 쏘다니다 한 골동품 가게에서 ‘벼락부자 설화지도 판매’라는 광고를 본다. <대동여지도>의 별책 부록이라며 이 지도를 손에 넣으면 설화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건태에게 골통품 가게 주인은 지도 한장을 헐값에 내어준다.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난 건태는 어느 낯선 곳에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는 호랑이와 마주치고 주인의 말을 믿게 된다. 현실로 돌아온 건태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지도책 값 100만원을 구하러 다닌다.

연출의 변 “혹부리 영감 설화를 바탕으로 했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건데. 좀 크게 보면 도깨비 방망이를 얻으려고 애쓰는 이들이 벌이는 해프닝을 통해 돈이 돈을 낳고, 권력이 권력을 낳는 그런 세상을 비꼬고 싶었다. 힘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세상은 무서운 것 아닌가. 잘 보면 세상에 그런 방망이가 많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지휘관들이 들고 있는 지휘봉이 대표적이다. 그거 조금만 까딱해도 사병들은 아무 말 못하고 연병장을 돌아야 한다.”

임필성 허진호, 김지운! 이 악마!

4년 만에 영화를 찍으려다보니 임필성 감독은 촬영 초반 영 버벅거렸다. 인물들의 동선이 엉키고, 언제 컷을 불러 끊어야 할지도 감이 잘 안 왔다. 무엇보다 박해일이 함께 교회에 다녔던 여자친구와 우연히 조우하는 장면에 대한 부담은 지기 힘들만큼 컸다. “4년 전에 결혼한 이후론 남녀 애정묘사에 자신이 없다. 그러고보면 매번 영화에 여배우를 출연시키는 (임)창재 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도 형은 여배우를 무려 2명이나 등장시키지 않았는가.” 임필성 감독은 이런 현상이 비단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징후가 아님을 알아채고 자신을 다독인다. “<피도 눈물도 없이> 현장에서 류승완 감독은 전도연과 연기에 관한 대화를 나눌 적에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항상 먼산 바라보는 늙은이 흉내를 내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난 약과다. 자, 자 박해일이 자신을 좀 안아달라고 말하자 안아주는 환상장면을 어서 끝내자, 라고 임 감독은 맘먹는다. 그러나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어떻게 알았는지 청담동을 배회하며 에스프레소를 양식으로 삼는 좀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당도하자마자 허진호 좀비가 말한다. “필성이는 멜로를 왜 저리도 못 찍을까. 게다가 동선도 좀 이상하네.”모자를 눌러쓴 김지운 좀비는 옆에서 비웃는 듯하다. 결국 이 장면은 상당 부분 못 썼다. 혹시 좀비들의 저주 때문?

남기웅 프로 배우란 이런 것이다!

도깨비 다섯이 대거 등장하여 악당들과 대결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다. 도깨비로 분하는 데만 한 사람당 6시간이 걸린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에서 배우들이 분장하는 시간이 4시간이라고 하니 대단한 정성 아닌가. 이들은 모두 극단 목화를 비롯해서 무대에서 한가닥하는 배우들이다. 남기웅 감독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이번에도 프로 배우들은 커다란 가면을 써야 했다. 문제는 도깨비 머리를 뒤집어쓰고 나면 밥도 못 먹는다는 것. 빨대로 미싯가루를 홀짝일 수밖에 없다. 얼굴도 안 나오는데 다들 열심을 부려 남 감독 입장에선 황공할 정도다. 서로 다른 극단 소속이지만, 특별한 리허설 없이도 촬영에 들어가자 단번에 오케이를 내려도 좋을 만큼 호흡과 안무가 완벽했다. 대사를 일본어로 했으면 좋겠다 싶어 시나리오 지문에 (일본어)라고만 적어놨는데, 이분들은 이날 진짜 일본어 대사로 바꿔 외워오기까지 했다. 프로는 역시 프로였다. 이쯤되면 남기웅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이 나자빠질 뻔 했다는 말도 과장은 아니다.

<Show Me>의 영화 ③ 임창재 감독의 <멀고 가까운>

임창재 공무원도 철야할 땐 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촬영현장에서 임창재 감독은 공무원 스타일이다. 야간촬영을 밥먹듯 하는 것이 예술하는 이라면 무릇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거늘, 그는 해 떨어지면 곧바로 철수한다. 컨디션 유지를 위해서다. 밤 새우고 나면 어차피 다음날 한나절은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다. 무리하게 일정을 강행한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졸음을 막아낼 장사도 없다. 과부하에 걸려 스톱할 바에야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찍고서 편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의 합리적인 지론도, 그러나 이번만은 지켜질 수 없었다.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산장을 며칠 동안 빌려 그 기간 안에 촬영을 종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트가 아닌 일반 숙소를 빌려 찍었던 탓에 찍기도 힘들었거니와 배우와 스탭들 또한 새우잠을 쪼개 자야 했다. 몇 시간의 리허설 끝에 소녀가 계단에서 총을 맞는 장면 촬영이 시작됐지만, 첫 테이크에서 붐 마이크를 들기까지 했던 조감독의 팔이 처지는 바람에 NG가 줄을 이었고, 촬영은 새벽 5시가 넘어서까지 계속됐다.

<Show Me>의 영화 ③ 임창재 감독의 <멀고 가까운>

선녀를 가둔 나무꾼, 정말 착한 사람일까?

synopsis 엘스 자이트라는 카페.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다. 단골인 형사와 사냥꾼을 제외하곤 여주인과 보석을 찾아내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소녀, 그리고 웨이터 청년이 전부다. 웨이터는 소녀를 사랑하지만, 어느 날 숲속에서 사냥꾼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분노에 찬 웨이터는 사냥꾼을 쏘아죽이고 소녀와 함께 탈출하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연출의 변 “선녀와 나무꾼 설화에서 나무꾼은 항상 착한 인물로 묘사되어왔다. 그런데 가만 보면 선녀의 옷을 빼앗고, 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버리고 자신이 소유하려 든다. 카페의 주인공의 성을 중성적으로 변주했지만, 실은 소녀를 착취해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설화의 캐릭터 설정 틀을 빌려와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 양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스크린 뒤의 마지막 전투

# 세 작품 모두 미완성이다. 무슨 소리냐고. 감독들은 극장 개봉을 위해서라면 사운드와 색보정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1주일 남짓한 기간에 소리 만들고, 색 다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것이다. 실제로 8월23일 첫 상영 때 임필성 감독의 <모빌>은 편집 중이라 상영되지 못했고, 26일에도 상영시간을 20분 늦춰서야 시간을 댈 수 있었다. 마무리 작업까지도 백병전이라 할 만큼 정신없는 전투를 치러야 했던 이들의 남은 스토리.

임필성 <낭만자객>팀 미안하오

상영 2시간 전. 임필성 감독의 무리들은 영상원 사운드실에 모여 있었다. 이쯤 되니 전문 인력을 운용할 시간적인 여유는 사치였다. 대사를 따는 ADR은 배우들이 했지만, 인물이 걷는 모습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폴리 작업 등은 모두 제작부장이 도맡았고, 음악을 맡았던 별 또한 그 옆에서 타이틀 디자인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원래 <자장가>라는 제목이었으나 같은 제목이 너무 많아 임 감독은 상영 직전 <모빌>이라고 개명했다고 털어놨다). 며칠 전 편집할 때도 방식은 무데뽀였다. 노트북 화면만으로 편집을 하려니 인물의 표정이 보일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단편 때 편집을 맡았던 함성원, 김선민 기사의 작업실로 쳐들어가서 점거했다. 편집실 조명이 맘에 안 든다며 전구까지 갈아끼우는 못할 짓을 하는 바람에 눈총을 받기도 했다는 이들은 자신들 때문에 편집실에서 진행 중이던 <낭만자객> 작업에 차질을 빚지 않았나 미안하다는 말은 남긴다. “일률적인 시스템 공정 아래선 맛볼 수 없는 스릴이죠.” 임 감독의 변명이다.

임창재 실수도 역시 비범하시다

저건 뭔가. 임창재 감독의 <멀고 가까운>이 상영되던 8월26일, 상영관이었던 시네마 오즈의 관람석에선 일순 침묵이 흘렀다. 요염한 의상의 여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걷는 장면이 정지된 것이다. 디지털영화 상영 때는 흔히 있는 사고였는데도 객석에선 “역시, 이번 실험도 평범하지 않은데”라는 수군거림이 뒤이어 나왔다. 정지화면이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사실은 스크린 크기에 맞게 영사 사이즈를 재조정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 감독의 전작들을 봤던 이들은 오랫동안 멈춰선 이미지가 감독의 범상치 않은 재기의 발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영이 끝난 뒤, 안철호 프로듀서는 감독들과 배우들을 무대 앞으로 불러내 인사하는 과정에서 “영사 착오로 인해 감독님과 스탭들에게 죄송하다”고 하자 또 한번 상영관은 술렁였고 이내 웃음으로 화답했다.

임필성 감독은 곧 크랭크인 시점을 발표할 것이라 했다. 남기웅 감독은 일단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며 어딘가에 돈벌러 간다고 했다. 임창재 감독은 쓰고 있던 장편 시나리오를 마무리할 예정이라 했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흩어져 자신의 욕망을 그려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작은 영화를 한편씩 만들었던 올해 여름의 기억은 혹여 가물가물해졌을지도 모를 초심을 그들에게 일깨워준 좋은 보양식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편집 권은주

▶ senef 3인의 못 말리는 제작기 [1]

▶ senef 3인의 못 말리는 제작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