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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2]
김혜리 2003-09-05

대중영화는 지적이다

김소영__ 독일 영화사는 기본적으로 지크프리드 크라카우어와 당신의 대화로 쓰여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국가를 불문하고 근대성이 야기시키는 트라우마는 영화를 통해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를 보자면 클로즈업과 같은 파편화로 이뤄진 영화장치는 바로 그것을 통해 근대성의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또 트라우마는 영화를 통해 그 형상을 찾는 미장아빔(거울 이미지)을 구성해온 것 같다.

토마스 엘새서__ 트라우마에는 희생자의 상처도 있지만 가해자의 트라우마도 있다. 가해자 트라우마 영화의 전형적 모티브는 <람보> <포레스트 검프> <지옥의 묵시록>같은 ‘구조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원, 구조에 미국영화는 강박적으로 매달리는데 거기서 구조의 행위는 공격의 다른 형태다. 구조라는 명분으로 액션의 모티브를 고쳐 쓰는 것이다.

김소영__ 한국영화는 강박적으로 희생자의 트라우마에 매달린다.

토마스 엘새서__ 미국인들이 스스로를 구원자로 상정하는 의식의 역사적 기원은 미국이 세계대전에서 유럽, 아시아를 파시스트 독재자로부터 구하는 역할을 맡은 데에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구원자 역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선민의식을 가진 두 국가다.

김소영__ 책에도 그렇게 썼나? (웃음)

토마스 엘새서__ 안 써도 그 점은 분명하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가까운 까닭도 역사적 사명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 기독교의 우익이 유대인 지식인 공동체보다 훨씬 시오니즘에 가까운 태도를 갖고 있다는 거다. 어쨌거나 멜로드라마, 여성영화, 누아르, 남성 트라우마 장르 등 많은 할리우드영화는 표면에 명시된 이데올로기 이상으로 흥미롭다. 대중영화를 볼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라. 그들은 지식인 비평가들의 분석보다 한층 지적인 산물이다. 이데올로기 비평을 지지하는 폴 윌렘과 논쟁했을 때 나는 “오케이, 나도 미국영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관찰하면 할리우드영화는 겉으로 내세운 이데올로기보다 지적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정서적 지성’이라고 할 만한데, 나는 영화 표면에 드러난 이데올로기에 대한 실제적 대안보다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분석하는 비평을 이야기한 것이다.

구조자를 자임하는 서구의 판타지

김소영__ 당신은 미국이 지닌 구조자 판타지의 역사적 근거를 세계대전 뒤 미국의 상태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러한 판타지는 서구 모더니티 전체의 축도이기도 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서구의 보편적 경향이 미국 헤게모니 안에서 구체화된 것은 아닐까?

엘새서: 맞다. 미국은 20세기에 다른 국가가 저질러놓은 난장판을 수습하는 입장에서 사명감을 갖게 됐다. 미국인들은 사실 고립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확신이 있다기보다 주저하는 거인이다. 미국이 클래식한 제국주의적 파워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구조자적 사명감의 기원에 대한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사실 미국 밖 문화에도 구조의 모티브는 존재한다. 빅토리아 시기 연극의 멜로드라마는 대표적이다. 거기서 구조되는 것은 위기에 처한 여성이다. 멜로드라마와 남성 트라우마 영화는 구원자 남성의 판타지로 연결된다. 내가 가해자의 트라우마에 집중하는 것은 내가 전쟁 중 독일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죄책감과 유산을 감당해야 할 입장이라는 점과도 관련된다. 여러 국가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반독 감정을 접했고 그것은 나의 상속 재산이었다. 나는 독일 최대의 미군 기지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0살 무렵부터 미국영화에 빠졌다. G.I.와 어울리는 독일 매춘부 아가씨들, 가난한 우리 이웃과는 너무 다른 멋진 자동차와 물건들을 기지 문 너머로 엿보았다. 나는 마치 티후아나 담장 너머로 미국을 건너다보는 샌디에이고의 멕시코인 같았다.

김소영__ 그러니까 당신이 쓴 빔 벤더스 감독론은 실은 본인의 이야기였던 거다.(웃음) 미국 문화는 나의 구명대였다는.

토마스 엘새서__ 1940, 50, 60년대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연구에 이어 1970년대 미국영화에 관한 책을 썼고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영화 제목을 본떠 <라스트 아메리칸 그레이트 픽처 쇼>라고 명명했다. 할리우드의 이행기에 관한 책이다. 한데, 내가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 딱 한편의 논문만 쓴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얼마 전에 일일이 세어보니 내가 쓴 논문은 250편이고 180권의 책에 글이 실렸더라.

김소영__ (웃음) 젊은 시절에 유명한 페이퍼를 써내고 커리어를 잡아먹히는 봉변을 당하는 학자들이 있다. 로라 멀비의 경우는 아마 더 심할 거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초기 영화에 대한 당신의 연구와 디지털 문화에 대한 관심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어떤 과정이 있었나?

초기영화의 디지털영화의 만남

토마스 엘새서__ 나는 영화학자 노엘 버치와의 교분을 통해 뉴욕 아방가르드에 친숙했다. 당시 뉴욕 아방가르드는 초기 영화 또는 할리우드 이전의 영화에 매혹되어 있었다. 스탠 브래키지, 마이클 스노, 케네스 앵거 같은 미국 전위 감독들은 디지털 문화의 전조로 재해석할 수 있다. 사실 “디지털과 시네마는 서로 모순이다”라는 장 두셰의 표현처럼 디지털 시네마에는 미학적 모순이 있다. 고전적 의미의 영화는 카메라 앞의 사물과 그것이 새겨지는 셀룰로이드 사이에 필연적인 물리적 관계가 있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에서 그 관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 면에서도 문제가 있는데, 기술적 완성도가 아무리 근접한다고 해도 나는 ‘변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영화는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미래의 과거, 잊혀진 미래의 역사’라고 붙인 어제 강연의 제목처럼 디지털영화는 초기 영화가 가질 수 있었던 가능태의 미래를 보여준다. 초기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한 형태의 영화와 다르다. 그래서 고전영화가 영화의 정해진 규범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구경거리의 영화’ (Cinema of Attraction)라고 톰 거닝이 초기 영화를 규정하기도 했지만 초기 영화는 내러티브 이외의 요소가 영화를 끌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포인트는 초기 영화가 강력한 다큐멘터리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수효과나 가공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디지털 시네마의 내용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디지털화(digitization) 과정을 배제하고 사고하면 디지털의 관점으로 초기 영화가 걸을 수 있었던 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감시, 경계, 검열, 과학, 모니터링의 영화다. 세네프에 출품된 많은 디지털영화에서도 웹캠, 경비 카메라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김소영__ 어제 강연에서 당신은 국제영화제 서킷을 통한 한국영화의 부상을 말했다. 독자들을 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청해도 될까?

토마스 엘새서__ 지난해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본 디지털영화 <낙타(들)>은 네오 리얼리스트 영화라 할 만했다. 오늘날 디지털 시네마가 보여주는 ‘포스트 네오 리얼리즘’- 바보 같은 명명법이긴 하지만- 은 흥미롭다. 도그마, 이란영화 붐, 중국 6세대 이후 영화는 일상에 지근거리로 침투하고 있다. 이 현상은 지각적인 네오 리얼리즘,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바라보고 시간성(temporality)을 기록하는 디지털 문화의 성향을 보여준다. 새로운 영화는 예술영화 버전의 웹캠이며 전세계의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한국영화는 <낙타(들)> 같은 미니멀리즘을 보여주는 한편 <매트릭스> 타입의 스펙터클 액션, 안무된 폭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아시아영화의 포지션도 드러낸다. 아시아 문화, 한국 문화의 무엇이 이 두 가지를 공존하게 하는지 궁금하다.

김소영__ 언젠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도 어떤 힘이 한국영화 스크린의 폭력을 점화하는지 보고 싶다면서 정말 한국에 와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급한 미니멀리스트 영화는 실제 한국 영화계에서 정말 미니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 홍콩, 인도네시아의 비디오가게에 가면 이제 인터내셔널 섹션의 1/3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들이다.

토마스 엘새서__ 이번 한국 방문에서 좀더 한국영화를 볼 기회를 가졌어야 했는데 딱한 일이다.

김소영__ 영어 자막이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구해주겠다. 어떤 쪽을 원하나?

토마스 엘새서__ 오, 미니멀한 작품은 많이 본 것 같다. (웃음) 액션블록버스터쪽으로 부탁한다. 정리 김혜리 vermeer@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편집 권은주

대담을 마치고

타자에 무관심한 서구 남성 지식인을 보다

<씨네21>의 인터뷰 , 그리고 세네프의 디지털 익스프레스 심사를 같이 하면서 토마스 엘새서 교수와 장시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엘새서 교수가 영화연구에 끼친 영향에 존경을 보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의 학문적 담론의 유럽 중심주의 그리고 젠더 정치학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앨세서 교수와의 대담은 그 대화방식과 질문과 대답시간의 할애 측면에서 증후적이다. 그는 한국이라는 곳에 와 대담을 하고 영화제에서 심사를 하면서도 한국이라는 지형 속에서 영화연구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한국영화의 지형은 어떤 것인지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화연구의 역사와 저자의 유럽과 미국영화에 대한 연구를 당연히 이곳 한국의 독자가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은밀한 패라다임과 암묵적 기준이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종종 강연자와 청자의 관계로 끝났다. 이론을 구성하고 역사화하는 1세계의 지식인과 그것을 침묵 속에 경탄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비서구 지식인이라는 낡은 이미지가 얼핏 지나간 것은 그 때문이다. 몇 차례 나의 개입 시도는 대답을 얻는 대신 엘새서 교수의 자신의 주장에 대한 장황한 부연 설명으로 이어지곤 했다.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에 나는 미국, 유럽 중심적인 영화연구의 지역화, 한국화 그리고 인터 아시아적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네프 심사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난 토마스 엘새서 교수에게 인터 아시아 문화연구의 아시아영화 특집판을 선물했다. 그가 아시아영화와의 대화를 통해 유럽 중심적 틀을 벗어나 대화적 양식으로 나오기를 희망하면서.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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