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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1]
김혜리 2003-09-05

" 대중영화는 어느 비평가보다 더 지적이다 ”

김소영 교수, 영화학계의 살아있는 족보 토마스 엘새서를 만나다

8월27일 폐막한 제4회 세네프영화제를 방문한 토마스 엘새서(60) 교수는, “당신이 학자로서 걸어온 길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청하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인물 중 하나다. 우리에게 돌아올 대답은, 어쩌면 특정 학문의 발전사를 개괄하는 반 시간 넘는 강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로 테이블에 마주앉은 김소영 영상원 교수가 즉석에서 붙여준 “살아 있는 영화학계 족보”라는 별명처럼, 토마스 엘새서는 1960, 70년대에 걸쳐 동세대 시네필들- 영화학과 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 줄줄이 이름이 발견되는- 과 더불어 영화학이라는 신생 학문의 터를 닦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이후 5세대에 이르는 제자를 길러낸 거인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해 교육받았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체류한 바 있는 ‘코스모폴리탄’ 엘새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의 영화/텔레비전 학과장으로서 왕성한 교육,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70년대 중반 더글러스 서크의 작품을 중심으로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효과를 탁월하게 분석한 교과서적 에세이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로 첫 명성을 얻은 엘새서가 권위를 자랑하는 분야로는 뉴 저먼 시네마, 멜로드라마, 초기 영화, 디지털 매체의 영화사적 의의 등을 꼽을 수 있다. 영화예술, 영화매체에 대한 30년이 넘는 매혹과 탐구의 소산은 그가 생산한 250여편의 방대한 논문에 담겨 전세계의 도서관에서 부지런한 영화학도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가장 열정적인 영화의 관객/독자를 대신해 만남을 청한 김소영 교수와 토마스 엘새서교수의 대화는 긴 호흡으로 흘러갔다. 수면 부족과 피로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던 엘새서교수는 언제 그랬냐 싶게 끈질기고 상세한 설명에 몰두했다. 역시 성실한 노학자의 오랜 습관은 여독보다 강했다.

토마스 엘새서(Tomas Elsaesser)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영화 · 텔레비전학과장 주요 저서 및 편서 <파스빈더의 독일>(1996) · <디지털 시대의 영화>(1998) · <BFI 독일 영화 가이드>(1999) · <바이마르 영화와 이후>(2000) · <현대 미국 영화 연구>(2001) 등이 있음

김소영__ 아무래도 당신이 거쳐온 기나긴 지적 여정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토마스 엘새서__ 나는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서술을 테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적 여정이랄 수는 없지만 대학 시절 지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된 타보 음베키와 연적이 된 경력도 있다. (웃음) 1966년 교내 필름 클럽을 창설하고 개봉작 정보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영향이 엿보이는 긴 기사가 같이 실린 <브라이튼 필름 리뷰>라는 잡지도 펴냈다. 내가 속한 그룹은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할리우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60, 70년대는 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 정치적 영화의 시대였고 영화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 폭발한 시대였다. 프랑스 역사학에 관한 논문을 위해 파리에서 보낸 1년은 바로 1967년에서 1968년 5월에 이르는 격동기였다.

격동기에 영화를 만나다

김소영__ 절묘한 타이밍, 절묘한 장소다.

토마스 엘새서__ 말하자면 나는 혁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1968년에, 역사가 칼라일과 미슐레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저술을 남긴 또 다른 혁명기 1848년의 역사서술을 연구했던 셈이다! 아침이면 국립 비디오테크로 직행해 프랑스 혁명사 서술에 관한 자료를 뒤졌고 6시에 비디오테크가 문을 닫으면 당장 지하철을 타고 끼니도 거른 채 시네마테크로 향했고 거기서 의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통해 앙리 랑글루아,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와 교분을 가졌다. 당시 그들은 미국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정치화되는 국면에 있었지만, 나는 60년대 초 그들이 쓴 글을 통해 샘 풀러, 니콜라스 레이, 빈센트 미넬리, 하워드 혹스,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감독에 관심을 가졌고 영국으로 돌아가 연구를 계속했다. 1971년에는 <네 멋대로 해라>가 헌정된 B급영화 프로덕션의 이름을 딴 <모노그램>이라는 잡지를 더 광범위한 독자를 겨냥해 런던에서 발행했다. 이 잡지는 아무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입에 올리지 않던 시대에 이미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갖추고 있었는데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용한 영국의 <무비>라는 잡지를 재차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웃음) 우리는 <스크린>이 알튀세르나 라캉의 이론에 경도되고 영화의 정치적 해석에 몰두하던 그 즈음에 의식적으로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 매진했다.

김소영__ 그러한 태도는 영화를 연구하는 공동체 내에서 긴장을 자아냈을 법하다.

토마스 엘새서__ 실제로 대립이 있었다. 영화학자 폴 윌먼은 내게 비판적이었다. 내 입장에 우호적이었던 인물로는 당시 영국영화연구소(BFI) 교육 부서에 있으면서 영화잡지에 대한 후원도 맡았던 영화학자 피터 월런이 있는데 그도 역시 분열적인 인간이었다. 월런이 얼마나 분열적이냐면 최근 출간된 책에서 자신의 필명 리 러셀을 인터뷰어로 동원해 셀프 인터뷰를 실었던 위인이다. (웃음) 나와 피터 월런, 로라 멀비(페미니즘영화 연구의 시금석이 된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의 저자)는 1972년 에든버러영화제에서 더글러스 서크 회고전을 기획하기도 했다.

김소영__ 더글러스 서크를 비롯한 몇몇 감독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관심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토마스 엘새서__ 당시 나는 두 가지에 매혹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특정한 부류의 영화, 즉 ‘미장센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속성을 가진 영화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대중문화였다. 더글러스 서크에 대한 관심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 역시 독일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 그곳을 떠난 만큼 이민, 망명 감독에게 시선이 쏠렸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은 서크를 연구하던 도중 발견했고 처음 영국에 소개했다. 뉴 저먼 시네마 회고전을 영국에서 주최하면서 내가 할 일이라는 확신이 섰다. 나는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처럼 <스크린>이 옹호한 해체적인 영화보다 대중과의 고리를 유지하는 영화에 끌렸다.

김소영__ 1970년대 중반은 영화학이 대학 안에서 학문으로서 제도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토마스 엘새서__ 1970년대 초 영국의 영화문화는 풍요로웠다. 지금 아시아영화 전문가인 토니 레인즈나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된 사이먼 필드 등 많은 시네필들은 각자 자신의 잡지를 만들고 있었고 서로 친밀했다. 매우 정치적이고 정열적이며 논쟁적인 시대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나는 BFI의 에드워드 보스콘과 함께 어드바이저 자격으로, 1960년대 들어 개교한 젊은 대학- 워릭, 켄트, 에섹스, 이스트 앵글리아, 키일대학에 교수 보직을 만들고 영화학과를 여는 일을 도왔다. 이때 로빈 우드, 리처드 다이어, 피터 월런, 찰스 바, 존 엘리스 등이 각 학교 영화과에 부임했다. 하나같이 성취 동기가 강했고 저널리즘 출신이 많았으며 박사학위 소지자는 거의 없었다. 제도화된 영화학의 출발은 영화비평과 학자로서의 연구를 병행해온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

대중영화를 위한 매트릭스의 탄생

김소영__ 역사, 대중문화 등 다양한 학제간 연구가 모여 대중영화 연구의 새로운 매트릭스가 탄생한 것 같다. 당신의 논문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만 예로 보더라도 그렇다. 문학적 지식, 프랑스 혁명이나 19세기 사회에 대한 언급 같은 다른 학문의 트레이닝이 논증을 뒷받침하고 있다.

토마스 엘새서__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가 힘을 발휘한 것은 그 글이 골수 시네필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탐구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대중영화가 빚진 가장 중요한 전통은 19세기 소설이라고 믿는다. 그 글에 나오는 부르주아 소설, 빅토리아 멜로드라마 연극의 논거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경험에 나온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 연구자들은 각기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학에 제도적 권위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후 다이어의 뮤지컬 연구, 나의 멜로드라마 연구, 로빈 우드의 호러 장르 탐구에서 보듯 장르영화에 대한 천착으로 발전해나갔다. 대중문화, 장르영화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특별한 매트릭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소영__ 버밍엄 학파의 형성보다 조금 앞선 시기였던 셈인가?

토마스 엘새서__ 리처드 다이어가 버밍엄 학파의 문화연구 성과를 영화학에 끌어들인 선구자다. 영화학은 버밍엄 학파의 영향도 받았지만 여전히 작가주의가 강세였다. 나 역시 스튜어트 홀의 방법론을 알고 있었지만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영화적 형식에 관한 연구와는 별 관계가 없다.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에 깔려 있던 의도는 영화작가를 작가주의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 장르 시네마 안에서 탐구해보려는 것이었다. 그 논문은 더글러스 서크, 빈센트 미넬리 감독을 분석한 글이지만 동시에 미장센 같은 형식적 이슈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특정 장르를 하나의 징후로서 읽고 비평적 독법이 가능한 대상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리처드 다이어는 ‘대중문화 속의 유토피아적 순간’을 언급한 바 있다. 나 역시 내가 왜 이렇게 미국 영화에 계속 집착했는지 자문하곤 한다. 그들은 거대한 공적인데 말이다. (웃음) 이유는 그것이 대중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김소영__ 그러한 입장은 린다 윌리엄스(<하드 코어>를 쓴 페미니스트 영화학자)의 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

토마스 엘새서__ 오, 그녀는 내가 시도 못한 장르, 포르노그라피를 영화학의 지평에 더했다. 윌리엄스의 연구에는 영국 페미니즘도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후반 나는 베를린자유대학과 아이오와대학에서 뉴 저먼 시네마를 강의했다. 아이오와와 가까운 밀워키에서 그맘때 열린 밀워키 컨퍼런스는 영국의 영화 문화가 미국으로, 즉 <스크린>의 이론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모멘트를 마련했다. 크리스티앙 메츠, 스티븐 히스, 로라 멀비, 더들리 앤드루가 모여들었고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틴 톰슨은 당시 더들리 앤드루의 제자였다. 영화학의 역사는 아이디어의 역사이지만 그 이면은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움직이고 여행하는 개인들의 네트워크다.

트라우마로서의 미국영화

김소영__ 어제 강연에서 당신은 테크놀로지가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킬까라는 이야기 중에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3>의 액션과 자동차 추격전이 어떻게 디지털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안무됐는가를 비교했다. 동시대의 액션영화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엘새서: 미국영화는 언제나 나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미국영화는 진지한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취급되지 못했고 영화광들도 1980, 90년대 미국영화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이른바 미국 액션영화를 자세히 보면 사실 ‘리액션(reaction) 영화’라고 불러 마땅하다. 포스트 베트남, 포스트 워터게이트 영화를 포함한 1980, 90년대 미국영화는 내가 보기에 ‘트라우마의 영화’다. 현재 집필 중인 책의 제목도 <멜로드라마와 트라우마, 미국영화가 보여주는 문화적 기억의 방식>이다. 논지는 멜로드라마의 예에서 출발한다. 멜로드라마는 특정한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고 그로 인해 여성의 관심을 끄는 장르다. 멜로드라마는 기다림, 행동하고 싶은 욕망과 행동의 불가능함의 장르이며, 그래서 히스테리와 위기의 영화다. 내 주장은 1950년대 멜로드라마가 한 역할과 1980년, 90년대 액션영화의 역할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람보, 슈워제네거 같은 우익영화 속 남성영웅의 몸은 트라우마를 가진 육체다.

김소영__ 그럴 수가! 나 역시 195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를 거쳐 지금은 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홍콩 합작영화와 연관 속에서 연구 중이다. 좀전에도 영화연구의 매트릭스가 형성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연구가 다른 연구와 만나고 서로 흘러드는 양상은 재미있다.

토마스 엘새서__ 나는 얼핏 보기엔 액션히어로의 영화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액션의 위기, 액션을 가로막는 장애, 하이퍼 액션, 리액션을 발견하는 영화를 주목한다. <포레스트 검프>나 <메멘토>도 예로 언급되는 영화들이다. 멜로드라마의 시대였던 전후는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하고 첫 번째 메이저 헤게모니를 갖게 된 시기였다. 미국은 승자였고 유럽과 아시아에 막대한 입김을 끼치기 시작했다. 내 질문은 미국은 왜 그처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던 시대에 미국이 스스로를 회의하는 장르, 멜로드라마와 필름누아르를 만들었는가다. 1980, 90년대에도 동일한 질문이 가능하다. 내 책의 한 챕터는 남자주인공이 이미 죽은 다음에 시작되는 <아메리칸 뷰티> <메멘토> <식스 센스> <D.O.A.> 같은 영화들에 관한 것이다. 남성영웅이 극단적으로 무력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필름누아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들은 액션히어로라기보다 리액션 히어로, 인액션(inaction) 히어로다. 내가 붙인 이름은 포스트 모던 시네마가 아닌 포스트 모르템(postmortem) 영화다. 한국말로도 말장난이 될까? (웃음)

김소영__ (웃음) 내가 지금 썼던 논문의 제목은 한국 액션영화 <유령>(Phantom Submarine)에서 따온 ‘Phantom States’인데, 죽은 주인공이 바다 위를 부유하며 뇌까리는 독백이 서두다.

토마스 엘새서__ 그거야말로 <썬셋대로> 아닌가! 할리우드는 늘 그러했고 현재도 그렇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할리우드영화도 사회적 현상의 징후를 드러낸다. 나의 이런 관점은 나와 지크프리드 크라카우어(<칼리가리부터 히틀러까지>라는 저서에서 1920년대 바이마르 영화를 파시즘의 징후로 진단한 학자)의 끝나지 않는 대화이기도 하다. 나에게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 부정적인 감정에 관한 예술이다.

▶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1]

▶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