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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기자의 즐거운 베니스 다이어리 [2]

8월28일 목요일

__ 베니스의 연정

<잘있어요, 용문객잔>

아침 일찍 산 마르코 광장을 가로질러 바포레토 정류장으로 부지런히 발을 옮기다 보니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이른 관광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고3 수험생처럼 아침 8시30분부터 새벽 2시까지 꽉 짜여진 시간표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 되고보니, 저 웅장한 산 마르코 광장이, 사진기를 둘러멘 이 많은 관광객이, 지겨운 비둘기떼들이, 모두 블루스크린 위로 영사되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베니스, 이곳에 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바다의 냄새와 이 수분을 가득 품은 더운 공기, 지중해의 햇살 때문이다.

가장 큰 기대를 하고 있던 차이밍량의 신작 <잘있어요, 용문객잔>(베네치아60 경쟁부문/ 감독 차이밍량/ 출연 이강생, 첸샹치(chen shiang chyi), 미아오 티엔, 시 준)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다 내 마음 같았는지, 며칠 동안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이던 극장이 만석이다. 그러나 스크린 속 저 극장엔 사람이 없다.

♣ 저녁에는 카지노 앞에 커다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긴 기다림을 달래주었다. 아침 9시 정도부터 시작하는 상영이 5∼6편 정도 이어지고 나면 영화제의 하루가 저문다.

폐관을 하루 남겨둔 낡은 영화관. 호금전의 1968년작 <용문객잔>이 상영 중인 이 영화관엔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두어명의 사람이 앉아서 서로를 훔쳐보고 있을 뿐이다. 절름발이 매표소 소녀는 커다란 찐빵을 반으로 갈라, 영사실 남자의 책상에 조용히 올려놓고 온다. 한 영화관에서 일하지만 보폭이 다른 그들은 도통 만나지 않는다. 극장 밖은 도저히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비가 온다. 더럽고 칙칙한 복도를 훝으며 짝을 찾는 일련의 동성애자 무리들로부터 한 일본인 관객은 “이 극장에 귀신이 있다”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나 스크린 옆으로 난 조그만 문으로 매표소 아가씨가 들어선 이후로 영화 속 영화와 현실의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검객의 시선과 매표소 아가씨의 클로즈업이 교차로 편집되고, 35년 전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늙은 몸으로 좌석에 앉아 눈물을 훔친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다니 너무 반갑네.” 영화 속에서 칼을 나누던 두 사람이 문 앞에서 조우하고 “이제 아무도 우릴 기억해주지 않아”라며 씁쓸한 독백을 내뱉는다.

<착>(Ciak)을 비롯한 영화제 모든 데일리지에서 매긴 평점에서 현재까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잘있어요, 용문객잔>은 <구멍>에서 빠져나와 <거기 지금 몇시인가?>로 이어지는 차이밍량의 영토가 여전히 확장 중임을 보여주는 영화다. 길고 긴 복도를 답답할 만큼 느리게 걷는 여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는 수분간의 롱테이크는 몇몇 이탈리아 관객에게 야유섞인 박수를 받기도 했지만, 그녀가 사라진 공간에 남아 있는 외로움은 뼛속 깊은 곳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기자들 중 몇몇은 <애정만세>로 이미 연정을 보낸 베니스가 이 말레이시아생 대만 감독에게 두 번째 고백을 던질는지, 조심스럽게 수상을 점치고 있었다.

8월29일 금요일

__ 진짜 기적이라는 건 말야…

<기적>

오늘 아침 많은 이탈리아 언론의 관심은 어제 상영된 파올로 벤베누티의 힘있는 정치고발극 <국가기밀>(Segreti di Stato/ 베네치아60 경쟁부문/ 감독 파올로 벤베누티/ 출연 안토니오 카타니아>에 쏠려 있었다. 1947년 시칠리아의 포르텔라 델라 지네브라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로 정확한 배경과 동기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덮어둔 이 사건은 당시 정부와 미국과의 관계, 우파와 좌파, 시실리와 마피아와 지역정당, 경찰 등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발생되었기에 더욱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국가기밀>은 이 사건을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터치로 풀어내고 마지막 신에서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고발에 가까운 의견을 제시한다. 시사 뒤 ‘우∼’ 하는 야유와 힘찬 박수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터져나왔고 또한 <일 가제티노>는 별점 1점을,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7점을 매기는 큰 의견 차이를 보인 이 영화는 올해 영화제의 문제작 중 하나로 지목될 만하다. “<국가기밀>의 폭로. 이탈리아 즉시 격론에 들어가다”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를 소개한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영화가 끝나고 터져나온 그 찬사는 대학살에 대한 고발만큼이나 강한 것이었다”며 벤베누티의 용감함에 이어 관객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비엔날레 고문인 발레리오 리바는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근거에 의존하고 있으며, 공적 책임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결말은 거의 코미디였다. 개인적으로 줄리오 안드레오티(이탈리아 정계 대부로 수십년간 마피아와의 관련성을 의심받았음, 영화에서 이 사건의 배후인물 중 하나로 지목됨)에게 이 영화를 관람하라고 전화를 걸어볼 것이다”라며 씁쓸해했고 <라 누오바>는 “단지 상상력에 의존한 영화일 뿐이다”라고 영화의 사실성 여부를 일축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이역만리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류의 이런 저런 뉴스에 파묻히고, 오늘 들어 5번째 영화 <기적>을 보려고 다 식은 샌드위치를 들고 아득히 긴 줄에 서 있으려니 갑자기 배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어지럼증이 밀려온다. 과연 졸지 않고, 꼬꾸라지지 않고 마지막 영화를 볼 수 있을까?’과연 ’기적’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 “<드리머스> 매진, <토킹픽처> 매진.” 일반관객을 위한 매표소 앞에는 그날 매진된 영화를 알리는 방이 붙는다.(왼쪽사진)♣ 영화제 데일리지인 <CIAK>에 실린 자신의 기사에 사인을 남긴 오마 샤리프. 담배회사 사장으로 오해 마시라. <닥터 지바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명망 높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영화배우다.(오른쪽사진)

모든 피로를 단숨에 날려준 <기적>(Il miracilo/ 베네치아60 경쟁부문/ 감독 에도아르도 윈스피어/ 출연 클라우디오 다고스티노, 카를노 브루니)은 팍팍한 일정 속의 단비 같은 영화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도 다치기는커녕 한번의 터치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비한 능력을 갖게 되는 12살 소년 토니오. 그를 치고 도망간 신시아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뒤에 얼굴에 웃음을 거두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춘기 소녀다. 토니오는 신시아의 얼굴을 기억하면서도 그를 경찰에 알리지 않고, 이후 두 사람은 우정을 쌓아간다. 토니오의 손길이 닿기만 했는데도 병상에 누워 있던 옆반 친구의 할아버지가 거리를 걷고, 신시아의 엄마는 남자친구와 결별하고 돌아온다. 그러나 기적이 끼어들기에 세상은 너무 비정하다. 토니오의 부모는 아들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매스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의 할아버지는 운명을 달리하며, 신시아의 엄마는 다시 그의 곁을 떠난다. 애초에 기적이란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연락을 두절하고 웅크려 지내던 신시아가 시너를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그녀를 찾아온 토니오가 창문을 넘는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소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자막이 뜬다, ‘Il milacolo’(기적). 그래 기적은 저런 거다. 앉은뱅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장님의 눈을 번쩍 뜨게 하고, 죽은 자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른 인간들에게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 하나를 줄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에도아르도 윈스피어가 우리에게 전하는 최소의 혹은 최고의 ‘기적’인 것이다.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11살 소년의 <기적>, 베니스 관중을 감동시키다”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를 다루면서 “뭔가를 지적하거나 큰소리로 경고하는 것 없이도 감동과 눈물을 주는 영화. 관중은 7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박수갈채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기나긴 화장실 줄에 서 있는데 앞에 있는 여자 둘이 떠든다.

베니스의 너무 바쁜 배우들

바쁘다 바빠, 배우 바빠

물론 가장 바빠야 할 사람은 안토니오 반데라스였다. 개막일 비경쟁으로 상영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에서 낯익은 기타 선율을 들려주며 ‘엘 마리아치’의 귀환을 알린 그는 영화제 바깥에서 홍보행사를 가진 <스파이 키드3: 게임오버>에도 출연했고, ‘베니치아60’ 경쟁부문에 오른 <이메지닝 아르헨티나>에는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된 남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1976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메지닝 아르헨티나>는 흥미를 끄는 다큐멘터리적인 도입부와는 상관없이 억지 설정과 빈약한 이야기전개로 관객의 야유를 받았고, 반데라스는 “베니스에 오지 않은 건 그가 한 일 중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한편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냈던 나오미 왓츠는 제임스 아이보리의 <프렌치 아메리칸>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으로 베니스를 찾았다. 한명의 정점에 오른 거장과 한명의 떠오르는 신예감독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던 그는 두 감독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나이 탓도 있겠지만, 제임스 아이보리는 언제나 사려깊고 예의 바르게, 또한 조용하게 촬영장을 오갔고, 알레한드로는 정열적이고 귀찮을 만큼 세세하게 나를 괴롭혔다”며 “달라도 너무 다른” 두 감독에 대한 평을 밝혔다.

한편 이와이 순지의 <피크닉>, 미이케 다케시의 <이치 더 킬러> 등에 출연했던 일본 배우 아사노 다다노부는 펜엑 라타나루앙 감독의 타이영화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에서 방콕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으로 <자토이치>에서 맹인검객 비트 다케시와 비장한 검투를 나누는 사무라이로 등장했다.

이 밖에도 <애니싱 엘스>에서 크리스티나 리치의 엄마로 출연한 스토커드 채닝은 <프렌치 아메리칸>에서는 나오미 왓츠, 케이트 허드슨의 엄마로 다시 한번 등장하면서 ‘딸부자’가 되어야 했고, 역시 <프렌치 아메리칸>에서 아이까지 딸린 조강지처 나오미 왓츠를 배신하고 러시아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프랑스인 남편으로 등장한 멜빌 포포드는 ‘베네치아60’ 경쟁작인 노에미에 르보브스키의 <감정>에서 옆집 중년남자에게 부인의 심장을 빼앗기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 백은하 기자의 즐거운 베니스 다이어리 [1]

▶ 백은하 기자의 즐거운 베니스 다이어리 [2]

▶ 백은하 기자의 즐거운 베니스 다이어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