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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의 전설,정창화를 찾아서 [1]
심은하 2003-09-17

한국 액션의 전설,정창화를 찾아서

홍콩 이어 할리우드를 제패했던 액션영화 감독

조영정/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우리 감독이 만든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하여 전미 흥행 1위를 차지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좋은 기분일 것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전미 흥행 1위는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는 것보다 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훌륭한 작품성만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소한 문화가 다른 문화권의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얻어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 머지않은 과거, 우리의 이 비현실적인 상상이 현실인 적이 있었다.

1973년 3월21일 미국에서 홍콩영화 한편이 개봉됐다. 이 영화는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무림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강호사나이들의 대결과 사부의 죽음을 둘러싼 복수를 모티브로 하는 전형적인 권격 무술영화였다. 70년대 할리우드 기준에서 볼 때에 조잡해 보이기 이를 데 없는 이 영화는 그러나 개봉과 함께 전미 흥행 1위를 차지했다. 다음주 3위로 내려앉았지만 그 다음주에는 2위로 그리고 다시 1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을 보이며 파란을 일으켰다. 이 파란의 주인공은 바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이었다. 홍콩의 쇼브러더스가 제작한 이 영화는 미국에 수입된 외국영화의 흥행기록을 경신하면서, 그해 <버라이어티>가 집계한 영화 흥행 순위에서 30위를 차지했다. 이 영화의 믿지 못할 선전은 <뉴스위크>에 기사화되었고, 이것은 곧 우리나라에도 타전되었다.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의 내용은 홍콩영화 한편이 미국에서 흥행 기록을 세워가고 있다는데 우리 영화도 자각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그리고 며칠 뒤, <조선일보>에는 아주 짧은 단신이 실렸다.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감독이 정창화라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회고전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한회의 회고전 준비가 막을 내릴 즈음에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내년에는 누구의 회고전을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내가 올해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정창화 감독을 생각한 것은 EBS에서 <장희빈>과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를 보고 난 이후부터이다. 묘한 매력을 풍기는 이 두편의 영화는 나로 하여금 정창화라는 감독을 주의 깊게 조사해볼 가치를 갖게 하였다.

정창화, 그는 누구인가? 아마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한번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는 감독이다. 우리 고전영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액션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감독이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우리나라 액션영화 장르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삶을 한번 훑어보는 것이 순서이다. 지난 일년간 내가 알아낸 감독 정창화의 영화인생을 정리해보자.

#1 한국에서…

정창화 감독은 1928년 우리나라에 액션영화를 정착시키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이 사명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은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라는 영화를 보면서부터이다. 해방의 감동을 영화 속에서 찾은 정창화 감독은 최인규 감독 밑에서 꼭 영화를 배우고자 결심했고, 그의 뜻은 두달여를 최인규 감독에게 설렁탕 국물과 밥을 두개의 깡통에 담아 나르며 이루어졌다. 약 5년간 최인규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받은 정창화 감독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첫 번째 영화 <최후의 유혹>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패로 끝난다. 7년이라는 세월, 9편의 영화를 통해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이라는 영화로 전기를 맞이한다. 당시 HLKA라디오에서 인기리에 방송되던 드라마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젊은이의 사랑과 밀매단과의 투쟁을 그렸다. 이 영화는 당시로는 예외적으로 한달 넘게 상영될 정도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을 뿐 아니라 정창화에게 액션영화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평단은 “내용은 그저 그렇지만, 액션을 연출하는 솜씨는 누구보다 탁월하다”며 칭찬을 하기 시작했고, 그는 이제 자기 스타일을 갖춘 흥행감독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 액션영화란 어른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시키는 판타지 " 라고 정의하는 정창화는 관객의 평가를 가장 두려워했던 감독이었다. 그에게서 흥행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닌 관객의 평가를 나타내는 척도였다.

대륙활극 포문, 청춘영화와 접목 등 도전의 연속

액션이 자신의 장점임을 깨달은 정창화 감독은 <지평선>이라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활극을 연이어 발표한다. 이 영화는 한때 ‘대륙물’ 혹은 ‘만주활극’이라고 불린 일련의 영화군의 시초가 된 작품이다. 당시로는 상당한 제작비를 투여한 이 영화의 성공으로 대륙활극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그러나 정창화는 새로운 액션장르를 만드는 만큼 기존의 장르를 활용하는 재치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인기장르인 사극과 멜로드라마, 그리고 60년대 간판 장르였던 청춘영화를 액션과 접목시키면서 새로운 액션스타일을 선보였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60년대, ‘액션감독’ 정창화를 따라다닌 또 하나의 이름표는 ‘흥행감독’이었다. 그는 액션을 주재료로 삼아 흥행을 노리는 상업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당시 평단은 그의 영화를 이것저것 오락적 요소를 골고루 갖춘 시간죽이기용 영화라고 폄하하면서도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었던 대중적인 호소력과 영화적 재미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아마 정창화의 이러한 상업적인 능력이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에 자주 선택되는 이유가 되었을지 모른다. 정창화 감독은 1958년 <망향>을 필두로 꾸준히 한·홍 합작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6년 <순간은 영원히>라는 영화로 다시 한번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2 홍콩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촬영현장

<순간은 영원히>는 한·홍 합작으로 007류의 첩보영화이다. 남궁원이 비밀첩보원 X7을 맡고, 김혜정이 그의 임무를 교란하는 미모의 첩보원으로 활약한다. 첩보영화로는 남다르게 완성도 높은 이야기구조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이 영화에는 홍콩 도심에서 로케로 촬영된 시가전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장면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홍콩 최대 영화사인 ‘쇼브러더스’의 사장 란란쇼였다. 홍콩 무협영화와 멜로드라마의 대표감독이었던 장철, 이한상, 호금전을 거느리고 있던 란란쇼의 눈에 현대액션물을 만들 능력을 갖춘 정창화는 탐나는 감독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창화를 영입하여 5년간의 전속계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 정창화는 좀더 좋은 조건 속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액션을 펼쳐볼 야심을 품고 홍콩으로 떠났다.

정창화의 ‘쇼브러더스’ 1호 작품은 천개의 얼굴로 둔갑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여자 악당을 그린 <천면마녀>였다. 이 영화는 홍콩에서 대단한 흥행성적을 올리고 유럽에 수출된 최초의 홍콩영화로 기록되면서 정창화의 홍콩 입성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정창화의 욕심은 현대물로 인정받는 데 그치지 않고, 홍콩 감독의 고유영역인 정통 무협영화로 뻗쳐나갔다. 그는 란란쇼를 설득해 <아랑곡>이라는 무협영화에 도전한다. 이 영화는 란란쇼와 다른 홍콩 감독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며 정창화는 달콤한 성공을 맛본다. <아랑곡>의 성공은 그에게 연이어 무협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새로운 무협영화를 고심하던 정창화는 드디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만들기에 이른다. 청나라 말엽의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권격영화의 중흥을 알리며, 홍콩영화의 작은 신화를 만드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성공도 쇼브러더스와 정창화 사이에 발생한 불화의 불씨를 끄지는 못했다.

<파계> 출연진과 함께

<칠공주> 안양세트엣

쇼브라더스와의 만남, 세계로의 진출

란란쇼의 뒤를 이른 제작자 모나 팡과의 불화로 인해 쇼브러더스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중심 제작자였던 레이먼드 초가 쇼브러더스를 떠나면서 정창화 역시 그와 행보를 함께한다. 레이먼드 초는 쇼브러더스를 이어 홍콩영화를 대표하는 일가를 이룬 골든 하베스트를 설립하고, 정창화는 그곳에서 그의 최고 장기로 인정받았던 현대 액션물을 만들며 활동한다. 쇼브러더스에서의 성공 못지않은 흥행성공을 거두며 입지를 굳혀가던 그는 1977년 <파계>를 마지막으로 홍콩에서의 화려한 감독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979년 화풍영화사를 설립한 감독 정창화는 1987년까지 제작자로 변신하여 활동하다 은퇴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 한국 액션의 전설,정창화를 찾아서 [1]

▶ 한국 액션의 전설,정창화를 찾아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