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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변화와 고민을 캐묻다 [2]
박혜명 2003-09-19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롱숏의 영화

남동철 | <봄여름…>에서 정서적인 클라이맥스는 감독 자신이 직접 맷돌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이다. 그것은 바로 앞의 장면들 때문에 멜로드라마의 맥락을 갖는다. 보자기를 쓴 여인은 과거 자신이 죽인 여자를 연상시킨다. 그 여자가 아이를 낳아 암자로 데리고 왔고 거기서 죽는다. 이 장면에서 김기덕 감독이 연기한 장년승은 감옥에 갔다옴으로써 사회적인 죄사함은 받았지만, 스스로는 죄책감이 남아 그걸 풀고자 한다. 고행을 통해 스스로 죄를 사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과거의 영화들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전작들에선 그런 죄의식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이 자해를 했지만 여기서는 자해 대신 고행을 한다.

김기덕 | 과거의 그녀와 유사한 삶의 구조를 가진 여자가 다시 자기에게 왔을 때 그가 자신의 과거 모습을 거기에 대입하는 것은 맞다. 그 여자가 과거의 그 여자냐 아니냐는 건 중요하지 않다. ‘겨울’장면에 필요했던 건 자신에 관한 에피소드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는 ‘봄’, ‘여름’, ’가을’로 충분했다. 내가 가진 죄의식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고행으로 봐선 안 된다. 고민이다. 어릴 때 집착해서 살인한 이미지를 불러들여오는 것도 그런 것이다. 여자가 죽음으로써 관객은 옛날을 회상하게 되고 그 사람은 맷돌을 지고 올라간다. 그리고나서 반가사유상 뒤에 숨어서 내 마음이여, 이 불상을 닮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멜로인 것 같다는 말도 중요하다. 그러나 멜로라고 구분짓는 것들과 아닌 것의 차이점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삶 자체는 멜로이고 거기서 세분화된 이미지들이 있는 것이다. 맞다. 이 영화는 멜로라고 말할 수 있다.

남동철 | 그리고 그 대목에서 <정선아리랑>을 썼다.

김기덕 | 맞다. 김영임씨가 부른 노래인데, 어떤 TV프로그램에 나와서 이 노래를 불렀을 때 듣고서 반했다. 흐드러지는 운율이 내 근저에 있는 심리를 건드렸다. 그래서 이 노래에 맞는 이미지를 찾았다. 이 노래가 먼저 있었고 노래에 맞춰 장면을 만들었다. 원래 없던 장면이다. 해발 1100m 정도 되는 고지인데, 스탭들과 밥먹으면서 이따가 저기 올라간다고 했더니 아무도 안 믿었다. 그런데 정말로 올라갔다. 욕을 얼마나 먹었는데. 난 맷돌 지고 올라가고 스탭들은 카메라 들고 올라갔다. 영화 30도였다. 신발 벗으면 바로 동상 걸릴 정도였는데, 난 그것마저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1차 편집하고 보니까 노래 끝하고 영화 끝이 딱 맞아떨어져서 더 자르고 붙일 필요도 없었다. 신기했다.

남동철 | 이 영화에는 실소를 터뜨릴 만한 부분들이 있다. 소년이 바위에서 내려다 보다가 거꾸로 떨어지는 장면이나 형사들이 살인범을 잡으러왔다가 기다리라고 하니까 순순히 기다리는 장면 같은 것이다. 좀더 쉽게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찍지 않았다. 그런 심리는 어떤 것일까? 관객에 대한 배려라면, 즉 상업적인 영화로서 관객에게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실소를 터뜨리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김기덕 | <악어> 때나 지금이나 영화에서 문맥의 연결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김기덕의 수준, 김기덕의 매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예로 들었는데, 그게 내 정서다.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이 작위적이라고 해도 그 다음 얘기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설득력은 없지만 이야기구조를 실어나르는 데 불가피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형사들이 와서 기다려주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럴 수 있는 형사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총도 있겠다, 지가 도망가봐야 물속이고. 사람들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이야기의 설득력보다 중요한 것이다.

남동철 | ‘가을’에서 김영민이 분노를 참지 못하는 대목도 전체적인 톤과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대사가 격렬해진다. 그건 너무 직접적인 표현이다.

김기덕 | 말하자면 살인장면을 인터컷으로 보여주거나 그래야 했다는 건가?

남동철 | 격렬한 대사가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괴리를 못 참는다

김기덕 | 요즘 감독들은 영화를 참 리드미컬하게 찍는다. 화를 누른다. 난 그런 표현이 싫다. 이런 경향을 ‘날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오아시스>를 보면 종두가 공주를 건드리지만 강간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인내심을 보여줬다가 나중에 합리적으로, 강간이 아니라는 것처럼 보여준다. 난 그러지 못한다. 난 아예 강간을 보여주고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차이점이다. 인간이 이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다, 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김영민이 등장하자마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시발, 개 좆 같은 것들!” 그러는 것은 말초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전이시킨 것이고, 난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자연스럽다고 느낄 관객이 있겠지만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까 초반에 그랬잖나. 난 이 영화를 50%만 만들었다. 나머지 50%는 내가 찾지 못해서 표현을 못했거나,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자기 삶의 어떤 사건들이나, 보았던 이미지나, 들었던 이야기나, 책에서 얻은 정보를 합쳐서 볼 때 메울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줄기를 따라가면서 ‘나 같으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물론 난 관객이 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주길 바라지만 그래도 혹시 부족하다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남동철 | <봄 여름…>은 제목부터 순환을 암시하고 있다. <수취인불명>도 그렇고 <섬>도 그렇고, 어떤 고리가 돌아서 끝에 가서는 맞물려 있어서 완전히 닫혀지는 세계처럼 보인다.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라는 느낌. 그 순환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다. 초월적 경지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악순환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래서 <봄 여름…>은 김기덕의 영화가 ‘순환의 영화’라는 걸 추상화해서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김기덕 | <봄 여름…>의 제목부터가 그런 순환의 압력을 주고 있지만 반대로 볼 수도 있다. 영화가 결국엔 완결을 말했을 수도 있지만. 그 질문은, 김기덕이라는 인간 안의 한계구조라는 말로 들려서 답답하기도 하다. 이 영화를 그렇게 구조화해서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황진미 | 나는 앞도 뒤도 시작도 끝도 없는 플로팅(floating, 浮流)으로 봤다.

김기덕 | 뒤로 빠져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이 계속 연결됐다고 보면 그냥 진행형이다. 인간이 살면서 얼마나 달라질 수 있고 얼마나 탈출할 수 있으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어제와 오늘은 그렇게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다. 내가 정말로 없애고 싶은 건 ‘편견’이다. 잠깐 <나쁜 남자> 얘기를 하면 그건 계급의 문제 이전에 창녀와 깡패라는 괴리감이 문제였다. 그래서 억지로 뒤섞고 붙여놓는 거다. 니네 이래도 서로 이해 안 해볼래? 이래도 안 친해볼래? 그러고 어쩔 수 없이 교미를 시키고 나와서 부끄러워서라도 손잡고 나오게 한 것이다.

황진미 | 그 지점에서 김기덕 감독이 무섭단 느낌이 든다. 그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폭력성, 사회적이거나 규범적인 이 거리를 해체하고 확 줄여서 들러붙이고 싶은 욕망이 이 사람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괴리를 못 참는다.

김기덕 | 맞다. 인간과 인간과의 괴리는 어쩔 수 없는 건데 난 그들을 끊임없이 교미시키려고 한다. 오늘 여기까지 오면서도 수없이 스쳐간 사람들과 나는 왜 인사를 안 하는가 고민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딱 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 혼자 한다. 둘인데 둘이 자꾸만 새끼를 치고 점점 많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몰랐다는 근거로 그냥 스치고 지나간다. 난 모두가 내 살 같다고 생각하고, 내 영화에서 관계들을 충돌시켜가는 재미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해가 불가능한 관계들일수록 더욱. 그러면 이제 질문을 해야 한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잘살 수 있는 것을 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고.

황진미 |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보다 각자 개별적 인간,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김기덕 | 내 말은 우리가 원래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가정을 해보면서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봄 여름…>이 그런 영화다. 큰 변화지. 지금까지는 한몸 안의 갈등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이제는 한몸의 새끼들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남동철 | 김기덕 영화의 결론이, 우리는 원래 한몸이었어, 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봄 여름…>에서 어린아이가 그렇게 미물을 괴롭히는 것처럼 김기덕 영화는 인간 본성에 나쁨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순환이라고 얘기한 것도 단순히 닫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는 게 아니다. 닫힘 속에서 우리 내부의 악함을 인정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기덕 | 옛날부터 나는 우리 안에 악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얘길 해왔다. 지금까지도 그건, 해답을 못 얻었다. 정리 박혜명 na_mee@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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